홍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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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인한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조 때 관료로 활동하며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정조 즉위 후 숙청되어 사사되었다. 그는 선조의 6대손이자 홍봉한의 이복동생으로, 175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 등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후 호조참판,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영조의 신임을 받았으나,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정후겸 등과 결탁하여 세손을 공격했다. 정조 즉위 후 탄핵을 받아 사형되었으며, 철종 때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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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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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홍인한 |
직책 | 우의정 |
임기 | 1774년 ~ 1775년 |
군주 | 영조 이금 |
섭정 | 왕세손 이산 |
출생일 | 1722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776년 7월 5일 혹은 7월 11일 (향년 55세) |
사망지 | 조선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 |
거주지 | 조선국 한양 |
국적 | 조선 |
별명 | 자(字)는 정여(定汝). |
학력 | 1753년(영조 29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
경력 | 문신 |
종교 | 유교(성리학) |
자녀 | 아들 홍낙윤 |
부모 | 아버지 홍현보 |
형제 | 홍봉한(이복 형) |
친인척 | 사촌형 홍상한, 조카 혜경궁홍씨, 조카사위 사도세자, 외종손 정조, 외종손 의소세손, 8촌형 홍창한, 9촌조카 홍낙춘, 10촌 종손 홍국영 |
정치 | |
국가 | 조선국 |
정당 | 노론 세력 |
2. 생애
홍인한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이자, 선조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와 좌참찬을 지내고 증 좌찬성에 추증된 정헌공(貞獻公) 홍현보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이세황의 딸이다. 홍봉한의 이복동생이자, 혜경궁 홍씨의 이복 작은아버지(숙부)이며, 친동생은 홍용한, 홍준한 등이다. 1970년대 이후, 왕조실록, 문집, 고전서적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홍인한이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홍국영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혜경궁 홍씨에 의하면 홍국영의 백부 홍낙순과 홍인한이 서로 원수처럼 여겼고, 홍인한이 홍국영을 꾸짖었으며, 홍국영이 아버지 홍낙춘의 관직을 홍봉한에게 청탁했을 때 홍인한이 홍국영을 미쳤다고 적은 편지를 홍국영이 보게 된 것 등이 원인이었다.
1736년(영조 12년), 송시열, 송준길을 성균관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 동참 서명하였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이 되었고, 1751년 효장세자빈 효순현빈이 죽자 빈전의 집사로 참여했다. 1753년 통덕랑으로 재직 중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 2등으로 급제하였다.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자 혜경궁 홍씨의 친정 숙부라는 점이 작용하여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1753년 승정원가주서와 사간원정언을 지냈고, 1754년 교리로 있을 때 조영순(趙榮順)을 변호하려다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하여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1755년 부교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내고 당상관으로 특진, 1757년 전라감사로 부임했다. 1757년 호조참의,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됐다. 그 후 승지, 한성부우윤, 대사헌, 1760년 도승지, 비변사 당상 등을 지냈다.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로 순무하고 돌아왔고, 176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1765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로 승진, 공조판서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1773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고, 1774년 의정부우의정으로 특진하였다. 이듬해 약방도제조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774년 우의정에, 1775년에는 좌의정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1775년 세손(훗날의 정조)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자 정후겸 등과 결탁해 이를 반대했다.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할 때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고 강변하며, 승지와 사관의 대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사전에 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홍인한은 벽파의 당론에 따라 세손을 반대하였고, 영조의 면전에서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1776년 음력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홍인한은 서명선 등의 탄핵을 받은 뒤 정후겸, 문성국, 김귀주 등과 함께 여러번 탄핵을 당한 뒤 사판에서 삭제되고, 문외출송되었다. 곧 충청도 여산에 유배되었다가 고금도로 옮겨졌고, 위리안치형을 받았다가 그해 7월 5일 사사령을 받고 처형됐다.
2. 1. 생애 초반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이자, 선조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와 좌참찬을 지내고 증 좌찬성에 추증된 정헌공(貞獻公) 홍현보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이세황의 딸이다. 홍봉한의 이복동생이자, 혜경궁 홍씨의 이복 작은 아버지(숙부)이며, 관찰사를 지낸 홍창한은 8촌 형이다. 친동생은 홍용한, 홍준한 등이다.고조부는 홍주원의 장남 홍만형이고, 홍주원의 차남 홍만용은 홍국영의 6대조가 된다.
홍인한은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은 1970년대 이후, 왕조실록, 문집, 고전서적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알려졌다. 그의 성격과 외모는 알려진 것이 없다.
홍국영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혜경궁에 의하면 홍국영의 백부 홍낙순과 자신의 숙부 홍인한이 서로 원수처럼 여긴 것, 홍인한이 홍국영을 어떤 이유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홍인한이 홍국영을 꾸짖은 일, 홍국영이 아버지 홍낙춘의 관직을 홍봉한에게 여러번 청탁하자, 홍봉한은 상중이라서 거절하다가 홍인한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홍인한이 편지에 홍국영을 미쳤다고 적은 것을 홍국영이 보게 된 것을 이유로 들었다. 홍인한이 세손을 반대하면서, 세손을 보호하던 홍국영은 홍인한 역시 공격했다.
1736년(영조 12년) 진사 이해로(李海老)ㆍ이의철(李宜哲) 등이 송시열, 송준길을 성균관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연명 상소를 올릴 때 동참 서명하였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이 되었다. 1751년 효장세자빈 효순현빈가 죽자 조카 홍낙성(洪樂性), 홍낙인(洪樂仁) 등과 함께 빈전의 집사로 참여했다. 1753년 통덕랑으로 재직 중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 2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 명문 가문인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며, 혜경궁 홍씨의 친정 숙부라는 점도 작용해 영조의 신임을 받으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2. 2. 관료 생활
1753년 승정원가주서와 사간원정언을 지내고 1754년 교리로 있을 때 조영순(趙榮順)을 변호하려다 파직되었다. 다시 교리가 되었다가, 그해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1755년 부교리가 되었다가, 같은 해 사간원헌납을 거쳐 당상관으로 특진, 1757년 전라감사로 부임했다.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기생들을 불러 춤과 노래 실력을 들은 뒤, 일일이 지적, 트집잡아 곤장을 남발하고 즐겼다고 한다. 이는 중앙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대중이 이를 듣고 청성잡기에 기술하였다.
1757년 호조참의,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됐다. 그 후 승지, 한성부우윤, 대사헌, 1760년 도승지, 비변사 당상 등을 지내고,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로 순무하고 돌아왔다. 1764년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1765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로 승진, 공조판서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어떤 이유로 세손 (정조)과 갈등했는지, 세손의 추대에 반대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형 홍봉한은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당시 노론에서는 세손 제거를 당론으로 삼았으나, 노론 내에서도 청명파 등은 세손 제거에 반대했다. 조카 혜경궁 홍씨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설득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정후겸 등과 결탁해 세손을 공격했다. 1773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774년 의정부우의정으로 특진하였다. 이듬해 약방도제조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2. 3. 임오화변 이후
1774년 우의정에, 1775년에는 좌의정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1775년 세손(훗날의 정조)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자 이를 반대했다.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할 때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고 강변하며, 승지와 사관의 대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대리청정 뜻이 확고해지자 혜경궁 홍씨는 사전에 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대조의 뜻이 그러함을 편지로 알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인한은 벽파의 당론에 따라 벽파, 외척당, 정후겸 등과 함께 세손을 반대하였고, 영조의 면전에서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이후 정후겸, 심상운 등과 함께 홍국영 등을 모해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부사직 심상운을 시켜 세손의 대리청정 반대 여론을 조장했지만, 홍국영의 부탁을 받은 부사직 서명선이 역탄핵상소를 올려 논박했고 오히려 심상운은 유배되었다.한편으로 권력을 남용하고는 자기쪽 무리들과 야합하여 말을 퍼뜨리기를, "홍씨(洪氏)를 공격하면 이는 동궁(東宮)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면서 그것을 구실로 온 세상의 입을 막으며 위협을 가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1776년 음력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숙청에 들어갔으며, 홍인한은 서명선 등의 탄핵을 받은 뒤 정후겸, 문성국, 김귀주 등과 함께 여러번 탄핵을 당한 뒤 사판에서 삭제되고, 문외출송되었다. 곧 충청도 여산에 유배되었다가 배소가 옮겨져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며, 다시 거듭 탄핵을 받고 위리안치형을 받았다가 그해 7월 5일 사사령을 받고 처형됐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그는 7월 5일에 처형됐다고 기록됐으나, 청선고(淸選考)에 의하면 7월 11일에 죄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홍봉한이 탄핵당할 때는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혜경궁 홍씨도 그의 사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한다.
3. 사후
시신은 운구되어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상도리 봉곡마산(鳳谷馬山)에 매장되었다. 그의 동생 홍용한은 정후겸과 사돈 약속을 한 일로 공격받았지만 정조가 듣지 않아 무마되었다. 1832년에는 손자 홍백영(洪百榮)이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격쟁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때 홍백영을 처벌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순조가 무마시켰다.
그의 형 홍봉한, 동생 홍용한의 초상화와 사촌 형 홍상한, 조카 홍낙성 등의 초상화는 후대에 전해졌으나 그의 초상화는 전하지 않는다.
후에 철종 때인 1855년(철종 6) 철종이 그의 혐의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그를 복직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홍문관과 양사의 반대를 받았다. 결국 여러 차례 반대로 철종은 홍인한 복권 명령을 취소하였지만 1858년(철종 9) 10월 25일 철종은 그가 혜경궁 홍씨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특명을 내려 복권시켰다. 이때 승정원, 옥당에서 취소를 상소했고, 양사에서 합계하여 복권 취소를 상소했지만 철종이 이를 거부하였다.
4.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홍중기(洪重箕) | |
아버지 | 홍현보(洪鉉輔) | (1680년 ~ 1740년) |
어머니 | 풍천 임씨 | 임방의 딸 |
이복 형 | 홍봉한(洪鳳漢) | (1713년 ~ 1778년) |
이복 누나 | 풍산 홍씨 | |
매형 | 조엄 | |
이복 누나 | 2명 | |
생모 | 성주 이씨 | 이세황의 딸 |
친동생 | 홍준한 | (1731년 ~ ?) |
친동생 | 홍용한 | (1734년 ~ 1809년) |
부인 | 평산부부인 신씨 | 신방의 딸 |
장남 | 홍낙원(洪樂遠) | |
손자 | 홍경모(洪敬謨) | |
차남 | 홍낙술(洪樂述) | |
삼남 | 홍낙진(洪樂進) | |
딸 | 풍산 홍씨 | |
사위 | 청송 심씨 심능필(沈能弼) | 경종의 국구 어유구의 외손자, 심이지의 아들, 심탁의 손자, 심수의 종손자 |
여동생 | 풍산 홍씨 |
홍인한은 선조의 6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홍주원의 장남 홍만형이고, 홍국영의 6대조는 홍주원의 차남 홍만용이다.
5. 평가
홍인한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남아있는 자료나 관련 연구가 부족하여 정확하게 내리기 어렵다.
5. 1. 긍정적 평가
(요약 및 원본 소스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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