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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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계는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었다. 그는 장사군 출신으로, 손견을 섬기다 유표에게 손견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조조에게 귀순하여 조비 옹립에 기여했다. 위나라 건국 후 호분중랑장, 상서령 등을 역임했고, 조비의 신임을 받아 그의 아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관우가 조인을 공격했을 때 조조에게 조인 등을 믿고 군대를 이끌지 말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사후 정후의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환가는 안락향후를, 손자는 형양 태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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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제는 후한 말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 장막과 여포의 난 때 세 현을 지켜내고 태산태수를 역임했으며, 조비의 위나라 건국 후 관내후에 봉해지고 상서령에 이른 인물이다. - 조위의 상서령 - 배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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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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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환계 |
원어 이름 | 桓階 |
자 | 박서(伯緒) / 박서(伯序) |
출생지 | 린샹 |
사망일 | 220년 12월 ~ 226년 6월 사이 |
작위 | 안락향후(安樂鄉侯) |
시호 | 정후(貞侯) |
가족 관계 | |
조부 | 환초(桓超) |
부 | 환성(桓盛) |
형제 | 환찬(桓纂) 환이(桓毅) |
자녀 | 환가(桓嘉) 아들 3명 이상 |
관직 경력 | |
초기 관직 | 상서랑(尙書郎) |
조조 휘하 | 승상주부(丞相主簿) (208년) 조군태수(趙郡太守) (~213년)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213년~) 시중(侍中) (213년~) 상서(尙書) (~220년) |
조비 휘하 | 시중(侍中) (220년~) 상서령(尙書令) (220년~) 태상(太常) |
2. 생애
환계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다. 그의 가문은 조부 대부터 장사군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부친은 상서를 역임하여 남중 지역에서 명성이 있었다.[32]
환계는 처음에 장사군 공조(功曹)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장사태수였던 손견의 눈에 띄어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중앙 관직인 상서랑(尙書郎)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손견이 유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환계는 과거의 은혜를 갚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찾아가 손견의 시신 반환을 요청했고, 유표는 그의 의로움을 높이 사 요청을 들어주었다.[32]
그 후, 후임 장사태수인 장선(張羨)을 섬겼다. 관도 전투 시기, 유표가 원소에게 호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환계는 장선에게 조조를 도울 것을 진언하여 형주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환계는 조조에게 사절로 갔으나 원군을 얻지는 못했고, 장선이 병사하면서 반란은 실패했다. 이후 환계는 유표의 회유를 거절하고 병을 핑계로 은거했다.[32]
유표가 죽고 형주가 조조의 세력권에 들어가자, 조조는 과거 장선을 도왔던 환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등용했다. 환계는 승상연주부(丞相掾主簿)를 거쳐 조군(趙郡) 태수에 임명되었다.[32] 환계는 조조에게 조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여러 차례 진언했으며, 번성 전투에서 관우가 조인을 포위했을 때 조조가 직접 구원하려 하자 이를 만류하는 등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32]
위나라가 건국된 후, 환계는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상서령(尙書令) 등의 요직을 거치며 고향정후(高鄕亭侯)에 봉해졌고, 시중(侍中)의 지위까지 올랐다. 문제(조비)는 환계를 매우 신임하여 자신의 아들(명제)의 후견인으로 삼으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환계는 중병에 걸렸고, 문제는 그를 안락향후(安樂鄕侯)에 봉하고 식읍 600호를 하사했으며, 그의 세 아들도 관내후에 봉했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구경 중 하나인 태상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문제는 그에게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내렸고, 아들 환가가 작위를 이었다.[32]
2. 1. 가문 및 초기 생애
환계는 후한 말 창사군 임상현(린샹) 출신이다.[2] 그의 가문은 조부 환초(桓超) 때부터 대대로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환승(桓勝) 역시 군수와 상서를 역임하여 중국 남부에서 명성이 높았다.[32][3]환계는 처음에 장사군에서 공조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32] 당시 장사태수였던 손견은 환계를 효렴으로 천거하였고, 이에 따라 환계는 중앙 관직인 상서랑(尙書郎)에 임명되었다.[32] 그러나 부친상을 당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32]
이 무렵 손견이 유표와의 상양 전투에서 전사하자, 환계는 과거 손견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유표를 찾아가 손견의 시신 반환을 요청했다.[32] 유표는 환계의 의로운 행동을 높이 사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32] 그 후, 환계는 후임 장사태수인 장선을 섬겼다.[32]
2. 2. 손견과의 인연과 유표와의 갈등
환계는 조부 대부터 장사군에서 관직을 지낸 가문의 후예였다.[32] 그는 장사군 공조(功曹)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4] 당시 장사태수였던 손견은 환계를 효렴으로 천거했고, 이로 인해 환계는 낙양의 중앙 정부로 발탁되어 상서랑(尙書郎)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복상을 치렀다.[4][32]191년, 손견이 형주 자사 유표와의 상양 전투에서 전사하자[5], 환계는 과거 손견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상양으로 가서 유표에게 손견의 시신 인도를 간청했다. 유표는 환계의 의로운 행동에 감명받아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5][32] 환계는 손견의 시신을 유족에게 돌려주었고, 유족들은 손견을 곡아현(曲阿縣, 현재의 장쑤성 단양시)에 안장했다.[6]
손견 사후, 환계는 후임 장사태수 장선(張羨)을 섬겼다.[32]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 전투에서 격돌했을 때, 유표는 원소를 지원하기 위해 형주 전역에서 군사를 모아 조조를 공격하려 했다.[7] 이 소식을 들은 환계는 장선에게 나아가 유표의 움직임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정당한 명분 없는 전쟁은 실패했으며, 원소의 행동은 주 왕조에 충성했던 제 환공이나 진 문공과 정반대라고 지적하며, 유표가 원소를 지지한다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조조는 비록 어려워 보일 수 있으나, 황실을 구하고 정의를 내세워 불의를 처단하고 있으니 감히 막을 자가 없다고 주장하며, 형주 남부의 장사, 무릉, 영릉, 계양 4개 군이 힘을 합쳐 조조를 지지할 것을 제안했다.[8][9]
장선은 환계의 조언을 받아들여, 인접한 무릉, 영릉, 계양 3개 군의 태수들을 설득하여 유표에게 반기를 들고 조조에게 귀순하게 했다.[10]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으나, 당시 원소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형주로 즉시 원군을 파견할 수는 없었다.[11][32] 유표는 이 틈을 타 장선을 공격했고, 장선은 포위 공격 중에 병사했다. 장선 사후 장사군은 유표에게 함락되었고, 환계는 몸을 숨겼다.[11]
얼마 후, 유표는 환계를 사면하고 자신의 보좌관 겸 제주(從事祭酒)로 임명하려 했으며, 자신의 아내인 채씨 부인의 여동생과의 혼인도 주선하려 했다. 그러나 환계는 이미 결혼했다는 이유와 병을 핑계로 유표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은둔 생활을 선택했다.[12][32]
2. 3. 조조와의 만남과 헌신
장사태수 장선(張羨)을 섬기던 중, 유표가 관도전투에서 원소에게 호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환계는 장선에게 조조를 도울 것을 진언했다. 이에 장선은 형주 남부에서 유표에게 반기를 들었고, 환계는 조조에게 사절로 파견되었다. 조조는 이를 기뻐했으나 원군을 보내지는 못했고, 장선이 병으로 죽자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환계는 유표의 회유를 거절하고 병을 핑계로 은거했다.[32]208년 말,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여 형주가 조조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조조는 과거 환계가 장선을 도왔던 일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비범한 인물로 여겼다. 조조는 환계를 등용하여 승상 연주부(丞相掾主簿)로 삼았고, 이후 조군(趙郡) 태수로 승진시켰다.[32][13] 적벽대전 패배 후 조조가 형남 평정을 위해 환계를 보내려 했으나, 환계는 유파가 더 적임자라며 사양하기도 했다.
환계는 조식을 총애하던 조조에게 여러 차례 조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진언했다. 당시 조식을 지지하던 정의 등이 조비를 지지하는 모개와 서혁을 비방하자, 환계는 이들을 감싸주었다. 이는 타인의 장점을 밀어주고 단점을 보완해주려는 환계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진다.[32]
이후 상서가 되어 관료 임용을 담당했다. 관우가 조인을 공격하여 궁지에 몰아넣자 조조는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가려 했으나, 환계는 "조인과 서황을 믿으신다면 직접 나서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조언했다. 조조는 이 말을 받아들여 마피(摩陂)에 주둔하는 데 그쳤다.[32] 일설에는 환계가 조조에게 황제 즉위를 권했으나, 하후돈이 유비 토벌이 우선이라며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조만전』, 『세어』 인용).
환계는 후한에서 위로의 선양 과정에도 다른 신하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협력했다(『헌제전』 인용). 조비가 황제(위 문제)로 즉위한 후, 환계는 상서령과 고향정후(高鄕亭侯)에 임명되었고 시중의 지위까지 더해졌다. 촉한에서 항복한 맹달이 사마의와 유엽 등에게 의심받자, 환계는 하후상과 함께 맹달과 친교를 맺어 그를 안심시키기도 했다(『위략』 인용).[31]
조비는 환계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며 자신의 아들(위 명제)의 후견인이 될 만한 인재로 여겼다. 그러나 환계는 곧 중병에 걸렸다. 조비는 그를 안락향후(安樂鄕侯)로 봉하고 식읍 600호를 주었으며, 그의 세 아들에게도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구경의 하나인 태상에 임명되었으나, 환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조비는 그에게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내렸고, 아들 환가가 작위를 이었다.[32][31]
정시 4년(243년) 가을 7월, 조방(제왕)은 조서를 내려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명을 배향했는데, 환계도 그 명단에 포함되었다(「제왕기」).
2. 4. 조비 옹립과 위나라 건국
조조가 위공에 봉해진 후 후계자 문제로 고심할 때, 환계는 조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조조는 차남 조식을 총애했지만, 관례상 생존한 아들 중 맏이인 조비가 후계자가 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15] 환계는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일관되게 조비의 덕망과 장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여러 차례 진언했다.[32][31][15] 조조는 이러한 환계의 충성심과 헌신을 높이 평가하여 깊이 신뢰했다.[16]당시 조식을 지지하던 정의 등이 조비파인 모개와 서이를 비방하며 조식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17][31], 환계는 모개와 서이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보호했다.[17][32] 환계는 평소에도 부당하게 비난받는 동료들을 옹호하고 타인의 장점을 추천하는 성품으로 알려졌다.[17][31]
이후 환계는 상서로 승진하여 관료 선발을 담당했으며,[17][32] 213년 조조가 위공에 봉해진 후에는 시중과 호분중랑장에 임명되었다.[14]
후한 헌제가 조조에게 제위를 선양하여 위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환계는 다른 신하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협력했다.[31] 위나라 건국 후 조비(문제)가 즉위하자, 환계는 상서령이 되었고 고향정후(高鄕亭侯)에 봉해졌으며 시중 직위가 더해졌다.[31] 문제는 환계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며 자신의 아들(명제)의 후견인으로 삼을 만한 인물로 여겼다.[31]
2. 5. 위나라 건국 이후의 활동
219년, 조인이 번성(樊城, 현재의 샹양시 판청 구)에서 관우에게 포위되자, 조조는 서황에게 증원군을 이끌고 조인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서황이 초기에 번성의 포위를 풀지 못하자,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인을 구원할 것을 고려하며 참모들의 의견을 구했다. 대부분의 참모들은 조조에게 서둘러 번성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18]그러나 환계는 조조에게 조인과 서황이 스스로 상황을 헤쳐나갈 능력이 있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므로 조조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고 진언했다. 환계는 조조가 직접 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조인과 서황에게 그들을 신뢰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그들의 결의를 다지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19] 조조는 환계의 의견에 동의하여 군대를 모피(摩陂, 현재 허난성 자현 동남쪽)에 주둔시키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결국 환계의 예측대로 조인은 번성을 지켜냈고 서황은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20][32]
환계는 조식을 총애하던 조조에게 여러 차례 조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진언했다. 당시 조식을 지지하던 정의가 조비를 지지하는 모개와 서혁을 비방했을 때, 환계는 이들을 비호하며 타인의 장점을 밀어주고 단점을 보완해주는 면모를 보였다.[32]
후한에서 위나라로 선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군신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조위 황조가 수립된 후, 환계는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과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되었고 고향정후(高鄕亭侯)에 봉해졌으며, 시중(侍中)의 지위까지 올랐다.[32]
촉한에서 항복한 장수 맹달이 사마의와 유엽 등에게 의심을 받았을 때, 환계는 하후상과 함께 맹달과 친교를 맺어 그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문제(文帝)는 환계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자신의 아들의 후견인이 될 만한 인재로 여겼다. 그러나 환계는 곧 중병에 걸렸다. 문제는 그를 안락향후(安樂鄕侯)에 봉하고 식읍 600호를 주었으며, 그의 세 아들에게도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또한 일찍 죽은 아들 환우(桓祐)에게도 관내후를 추증했다. 환계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구경 중 하나인 태상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31][32] 문제(文帝)는 그에게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아들 환가(桓嘉)가 작위를 이었다.[32] 그의 동생 환찬(桓纂)도 산기상시가 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정시 4년(243년) 가을 7월, 조방(齊王)은 조서를 내려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명을 배향했는데, 환계도 그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
2. 6. 죽음과 평가
조비는 환계를 매우 신임하여 자신의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고자 할 정도였다.[32][22] 환계가 중병에 걸리자[32] 조비는 직접 찾아가 "어린 아들과 제국의 운명을 그대에게 맡기려 하니, 부디 몸조심하시오."라고 말하며 깊은 신뢰를 보였다.[22] 조비는 병든 환계를 안락향후로 봉하고 식읍 600호를 주었으며, 그의 아들 세 명도 관내후에 봉했다.[32][23] 또한 일찍 사망한 환계의 장남 환우에게도 사후 관내후 작위를 내렸다.[23][31]환계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비는 사자를 보내 구경 중 하나인 태상에 임명했으나,[32][24] 환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32][24] 조비는 환계의 죽음을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24] 정후라는 시호를 내렸다.[32][24] 작위는 아들 환가가 이었다.[32][31]
환계는 타인의 장점을 밀어주고 단점을 보완해주는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있다.[31] 정시 4년(243년) 가을 7월, 조방은 조서를 내려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명을 배향했는데, 환계도 여기에 포함되어[31] 그의 공적을 기렸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환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처음 손견의 부하로 등장한다. 손견이 유표 군과의 전투 중 전사하자, 환계는 사신이 되어 유표에게 가서 손견의 시신 반환을 요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후에는 역사 기록과 비슷하게 조비가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화흠, 왕랑 등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 헌제에게 제위 선양을 강요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4. 친족 관계
환계의 남동생 환찬(桓纂)은 위나라에서 산기시랑(散騎侍郎)을 지냈으며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다.[25]
또 다른 남동생 환의(桓彝)는 위나라의 경쟁국인 동오에서 상서(尚書)를 지냈다. 그는 258년, 오나라 섭정 손침이 오나라 황제 손량을 폐위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아 손침에게 처형당했다.[26] 이후 진나라 시대에 진 무제가 설영에게 오나라의 유명한 관리들을 묻자 설영은 환의를 언급하며 "충성스럽고 신실한 신하"라고 칭했다.[27]
환계의 아들 환가(桓嘉)는 아버지의 작위인 안락향후(安樂鄉侯)를 물려받았다. 그는 또한 위의 귀족 여성인 승천정공주(升遷亭公主)와 결혼했다. 조방의 가평 연간(249–254년) 동안 환가는 락안군 (樂安郡; 오늘날의 산둥성 쯔보시 부근)의 태수를 지냈다. 252년, 그는 락안군에서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동흥 전투에 참전하여 동오에 대항했으나 전사했다. 위나라는 그에게 시호 "장후"(壯侯)라는 시호를 내렸다.[28] 환가의 아들 환익(桓翊)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안락향후가 되었다.[29]
''세설신어''에는 환계에게 또 다른 손자 환릉(桓陵)이 있었는데, 그의 자는 원휘(元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릉은 진(266년-420년)에서 벼슬하여 형양군(滎陽郡; 오늘날의 허난성 싱양시 부근)의 태수까지 올랐다.[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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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Cao Pi became emperor in Dec 220 and died in Jun 226 in the Julian calen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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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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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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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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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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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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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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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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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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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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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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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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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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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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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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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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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Sanguozhi vol. 22
[26]
삼국지
Sanguozhi vol. 64
[27]
삼국지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4
[28]
삼국지
Sanguozhi vol. 22
[29]
삼국지
Sanguozhi vol. 22
[30]
삼국지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2
[31]
문서
このことから、桓階の没年は226年以前と推定される
[32]
위키문헌
삼국지 권22 환2진서위노전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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