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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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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한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며, 병력과 군수 물자뿐 아니라 약 1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성공적으로 구출하여 완료되었다. 철수 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명령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최대 규모의 피난민을 수송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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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흥남 철수
전체한국 전쟁
철수 직후, 폭파되는 [[흥남구역|흥남항]] 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철수 직후, 폭파되는 흥남항 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날짜1950년 12월 15일 - 12월 24일
장소함경남도 함흥시 흥남
결과유엔군의 흥남 철수 성공
교전 세력
교전국 1
교전국 2


지휘관
지휘관 1최용건
김책
마오쩌둥
펑더화이
쑹스룬
지휘관 2더글러스 맥아더
에드워드 아먼드
조지 스트레트메이어
더글러스 드라이달
송요찬
이종찬
김백일
병력 규모
유엔군100,000명
북한/중국군알 수 없음
관련 정보
관련 링크The Refugee Evacuation from Hungnam: 9-24 December 1950
[다큐온] 6.25한국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작전으로 손꼽히는 대규모 해상철수작전 ‘흥남철수작전’ “1950년 흥남철수의 비밀 1부” (KBS 210619 방송)
흥남철수 기념비 세운다

2. 작전 명칭

2003년부터 흥남 철수 작전의 당시 작전암호명(code name)이 '''''크리스마스 카고 작전(Operation Christmas Cargo)''''이었다고 언론 기사 등에 소개되었고[11] 2017년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의 미 제2보병사단 방문 연설문에도 포함되었는데[12]이는 와전되어 완전히 잘못 알려진 낭설이었다.

그 이유는 1996년 발간된 현봉학 박사의 회고록 '나에게 은퇴는 없다'(pp. 148~149)에 따르면 흥남 철수 작전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과 알고 있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1985년에 원고 정리를 완료한 '흥남철수작전기'라는 책의 제목이 '''''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였으며 이 제목은 작가로 대필을 맡았던 딸이 12월 24일에 마지막 배가 흥남부두를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작명했다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유엔군은 작전 보고서(action report)에서 '''''Hungnam Redeployment'''''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13]

한편 철수 작전이 큰 피해없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크리스마스의 기적'''(Miracle of Christmas)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작전 성공 보고를 받은 당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언급했다고 당시 국내 언론기사에서 외국인 특파원의 말을 빌려 보도했었는데 관련된 외신 기사원문을 통해 교차 검증이 되지는 않았다.[14]

3. 배경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였지만 중공군이 개입하였고 1950년 11월 27일 청천강 전투장진호 전투 등을 겪으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엔 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5]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 명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인민지원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했고, 12월 15일 미국 제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5]

한편 평양은 이미 12월 4일대한민국 국군이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12월 6일북한이 평양을 수복하였다.[5] 1950년 12월 8일, 미군 제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제10군단을 흥남을 통해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10군단을 흥남으로 집결하라는 이전 결정에 따라, 원산에서의 철수는 12월 3일에 시작되었다. [5] 1주일 동안, 중국 인민지원군(PVA)이나 조선인민군(KPA)의 방해 없이, 제31연대 전투단 (RCT 31), 미 제3보병사단, 그리고 미 제1해병사단의 상륙 부대 등 총 3,800여 명의 병력, 1,100대의 차량, 10,000톤의 기타 화물, 그리고 7,000명의 피난민이 제임스 H. 도일 제독의 제90기동부대가 제공한 수송선과 LST에 탑승했다.[5]

12월 11일, 송진에서 온 한국군과 장진호에서 온 해병대와 육군이 흥남으로 들어오면서 항구 주변의 방어선은 도시 외곽에 인민지원군/인민군의 접근로로 보이는 지점에 위치한 일련의 대대 및 연대 거점들로 구성되었다. 미 제7보병사단의 대대들은 흥남 북쪽의 부전호 인근 도로를 따라 넓고 깊게 배치되었으며, 대한민국 제1군단의 3개 연대는 항구 북동쪽 해안과 인근 접근로를 방어했다.[5]

4. 철수

제10군단 철수 단계선 지도


에드워드 알몬드는 병력 철수와 방어선 유지를 위해 두 가지 방안, 즉 모든 사단을 방어선에 배치한 후 각 부대의 일부를 동시에 철수하는 방안과 한 번에 한 사단씩 철수하여 남은 병력을 줄어든 전선에 배치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제1해병사단 등 일부 부대가 더 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후자를 택해 해병대를 먼저 수송하고, 제7사단, 제3사단 순으로 철수시켰다. 알몬드는 미 육군 사단과 대한민국 제1군단, 제10군단 지원 부대, 주요 보급품 및 중장비를 단계적으로 철수할 계획이었다. 이는 전투 병력과 지원 병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적절한 물류 지원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5]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신속한 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세 개의 통제 지점을 설정했다. 제10군단 사령부에서 G-3 및 G-4는 부대의 해변 배치를 지휘했고, 해안가에서 병력과 물자의 실제 수송은 에드워드 H. 포니 대령 휘하 통제 그룹이 감독했다. 포니의 지휘 아래 제2공병특수여단은 부두 시설을 운영하고, 증강된 해병 해안 경비대는 LST 및 소형 선박 해변을 운영하며 항구에 정박할 배를 위한 바지선을 통제하고, 약 5천 명의 한국 민간인이 부두 노동자로 일했다. 해군 측 수송 절차에서 도일은 기함에서 통제반을 통해 모든 수송을 조정하고, 정박지를 배정하며, 접안 및 출항 지시를 내렸다. 육상과 해상의 통제 그룹 간 직접 연락으로 병력, 물자, 장비를 가용 선박에 맞췄다. 알몬드는 아서 M. 머레이 중령이 이끄는 통제 그룹을 부산으로 파견하여 해상 및 공로로 도착하는 병력, 물자, 장비를 수령하고 집결 지역으로 이동시켰다.[5]

원산과 성진에서 수송된 병력과 물자를 포함, 알몬드는 105,000명의 병력, 18,422대의 차량, 약 350,000톤의 벌크 화물을 수송할 공간이 필요했다. 도일이 125척 이상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수송 그룹을 지휘했지만, 일부 선박은 두 번 이상 왕복해야 했다. 극동 공군 전투 화물 사령부는 연포 비행장에서 공중 수송을, 해군과 해병대는 전술 항공 지원을 담당했다. 아서 듀이 스트루블 제7함대 사령관은 7척의 항공모함 등으로 지원했다.[5]

제10군단의 육상 병력이 줄면서 방어선을 질서 있게 축소하기 위해, 제1해병사단은 흥남 주변 세 개의 철수 단계선 중 첫 번째를 향해 출발했다. 첫 번째 선은 요위천을 따라 연포 비행장 바로 아래에 위치, 흥남 중심부에서 약 약 4.83km 떨어진 호였다. 두 번째 선은 미 제3사단 지역에서 성천강 상류를 따라 이어졌다. 제7사단 출항 시 제3사단의 두 번째 선으로의 철수는 연포 비행장 포기를 의미했다. 세 번째 선은 제3사단이 점령할 흥남 경계선 바깥 약 1.61km에 있는 좁은 호였다. 철수 마지막 단계에서 제3사단은 후방 경비 전술을 사용했다.[5]

알몬드는 12월 11일 공식 철수 명령을 발표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회담 후, 알몬드는 철수가 질서 있게 진행될 것이며, 중공군/북한군의 심각한 방해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12월 27일까지 완료를 추산했다.[5]

4. 1. 피난민 구조 결정 과정

국내에서는 김백일 국군 제1군단장과 미 제10군단 소속의 민사 고문관 현봉학과 미국 해병대 에드워드 H. 포니 대령이 에드워드 알몬드 제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원래 피난민을 제외하고 철수하려다가 극적으로 피난민을 포함하여 철수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미군들은 피난민 철수를 반대했지만 당시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민사 고문관 등 한국인들이 설득하여 피난민 철수가 극적으로 성사된 것처럼 알려져 왔다. 그러나 미국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흥남 철수 당시의 10군단 사령부 지휘 보고서와 10군단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 간의 무선통신 전문 등 9개 문서를 보면, 1950년 12월 8일부터 "북한 피란민들을 구출하라"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명령이 이미 하달되어 이 명령에 따라 철수가 진행된 것으로, 당시 항해사였던 제임스 로버트 러니 역시 동일하게 증언하였다.[15][16]

그리고 1950년 12월 14일 미 제10군단 사령부에서 일본 도쿄 극동군 사령부에 보낸 무선통신 내역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 역시 "북한 피란민들을 수송해 줄 것"을 유엔군 측에 요청하였다고 하는데,[17] 위와 같이 피난민 구조 결정에 관해 기록들이 상이하므로 더욱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4. 2. 철수 과정

김백일 국군 제1군단장과 미 제10군단 소속 민사고문관 현봉학에드워드 아먼드 제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피난민을 포함한 철수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미국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1950년 12월 8일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북한 피란민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이 이미 하달되어 있었고, 당시 항해사였던 제임스 로버트 러니도 이를 증언했다.[15][16]

1950년 12월 14일 미 제10군단 사령부에서 일본 도쿄 극동군 사령부에 보낸 무선통신 내역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 역시 북한 피란민들을 수송해 줄 것을 유엔군 측에 요청했다고 한다.[17] 이처럼 피난민 구조 결정에 관한 기록들이 상이하므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 상선이었고, 온양호는 흥남부두를 떠난 마지막 배였다.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무기를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태워 철수,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18]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고, '김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9]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알몬드는 병력 철수와 방어선 유지를 위해 두 가지 방안을 고려했다. 모든 사단을 방어선에 배치 후 일부 동시 철수, 또는 한 번에 한 사단씩 철수 후 남은 병력 배치였다. 제1해병사단 등 일부 부대가 더 많은 전투를 치렀기에 후자를 택해 해병대를 먼저 수송하고, 제7사단, 제3사단 순으로 철수시켰다.

알몬드는 미 육군 사단과 대한민국 제1군단, 제10군단 지원 부대, 보급품 및 중장비를 단계적으로 철수시킬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세 개의 통제 지점을 설정했다. 제10군단 사령부, 에드워드 H. 포니 대령 휘하 통제 그룹, 해군 측 수송 절차 등이었다.

알몬드는 105,000명의 병력, 18,422대의 차량, 약 350,000톤의 화물을 수송할 공간이 필요했다. 극동 공군 전투 화물 사령부는 연포 비행장에서 공중 수송을, 해군과 해병대는 전술 항공 지원을 담당했다. 아서 듀이 스트루블 제7함대 사령관은 7척의 항공모함 등으로 지원했다.[5]

제10군단의 육상 병력이 줄면서, 방어선은 세 단계로 축소되었다. 제1해병사단은 첫 번째 선, 제3사단 지역은 두 번째 선, 제3사단은 세 번째 선을 담당했다. 철수 마지막 단계에서 제3사단은 후방 경비 전술을 사용했다.[5]

알몬드는 12월 11일 공식 철수 명령을 발표했다. 맥아더와 회담 후, 알몬드는 철수가 질서 있게 진행될 것이며, 중공군/북한군의 심각한 방해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12월 27일까지 완료를 추산했다.[5]

SS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에 탑승한 피난민들


제1 해병사단은 12월 11일 흥남에 도착, 15일 부산으로 출항했다. 12월 18일 제8군 통제를 받았다. 해병대 철수 동안, 제3사단에 배속되었던 제1 한국 해병 연대는 연포로 이동했다. 제3사단장 로버트 H. 소울(Robert H. Soule) 장군은 12월 16일 더 짧은 제1 단계 방어선으로 이동했다.[5]

12월 16일, 제3사단에 대한 공격은 서쪽과 북서쪽에서 발생했고, 북동쪽에서 대한민국 제1군단이 교전했다. 중공군/북한군 병력이 접근했지만 대규모는 아니었다. 민간인의 대규모 이동은 군단 방어선에 위협이었다. 헌병, 정보 요원 등이 민간인 진입을 막으려 했으나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5]

제7사단은 12월 14일 짐을 싣기 시작했다. 12월 17일, 대한민국 제1군단은 삼척으로 수송되었다. 연포 비행장 작전은 종료되었고, 해병대 비행대는 부산과 이타미 공항으로 철수했다. 12월 18일, 제3사단 좌익 부대는 송천강 하류 둑으로 철수했다.[5]

12월 20일, 중공군/북한군 정찰 공격은 약화되었으나, 18일에 다시 증가했다. 제7사단은 27일에 영천 주변에 집결했다. 12월 22일, 제3사단은 소규모 공격을 받았다. 23일, 간접 사격이 마지막 반대가 되었다.[5]

24일 아침, 방어선은 침묵했다. 제3사단의 제10공병대대(10th Engineer Combat Battalion)와 해군 수중 폭파반은 항만 시설 파괴를 준비했다. 마지막 군단 보급품과 난민이 배에 탑승했다. 도일의 군함은 항구를 폭파했다.[5]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마지막 X군단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배들은 흥남 항구를 벗어나 부산과 울산으로 향했다. 약 200톤의 탄약, 냉동 다이너마이트, 약 226.80kg 항공 폭탄 500개, 석유와 휘발유 200개 드럼은 꺼내지지 않았지만, 흥남 항구 폭발에 사용되었다.[5]

4. 3. 메러디스 빅토리호

레너드 라루 선장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린 뒤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태워 남쪽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배는 2004년에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18]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었다. 피난길 중에 이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고, 선원들은 이 아이들에게 김치라는 이름을 붙여줬다.[19]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에는 10만 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5. 결과

흥남 철수 작전에서 대한민국 제1군단과 미국 제10군단의 장병 100,000명과 차량 17,000대, 피난민 약 100,000명, 그리고 350,000t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5]

흥남에서의 미 제10군단 철수는 성공적인 물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적의 해안에서 철수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은 이 작전을 방해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선적을 보호하는 축소된 경계선도 시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술적인 문제보다는 물류 문제가 철수 속도를 결정했다. 실제로 미 제10군단의 남쪽 재배치는 도일(Doyle)의 함선에 얼마나 빨리 짐을 실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5]

놀랍게도 8만 6천 명이 넘는 피난민이 흥남에서 탈출했다. 원산과 성진에서 대피한 사람들을 포함하면, 북동부 한국에서 데려온 민간인의 총수는 98,100명에 달했다.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선적 공간 부족으로 남겨졌다.[5] 철수 작전에는 SS ''메러디스 빅토리''호 한 척으로 수송된 14,000명의 피난민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단일 선박으로 육지에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이었다. 이는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의 대통령 포고령 제2914호에 따라 발효된 국가 비상사태 선포로 가능했다. 남쪽으로 대피한 민간인 중에는 전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의 부모가 포함되어 있었다.[6][7] 배에서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고, 미 해군은 이 아기들에게 김치 1–5라는 별명을 붙였다.[8][9]

6. 의의 및 평가

돌이켜보면, 흥남에서의 X 군단 철수는 성공적인 물류 작전이었다. 비록 적대적인 해안에서의 철수였지만, 중공군조선인민군은 이 작전을 방해하려는 어떠한 심각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적을 보호하는 축소된 경계선조차 시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철수 속도는 전술적인 문제보다는 물류적인 문제, 즉 도일(Doyle)의 함선에 얼마나 빨리 짐을 실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5]

놀랍게도 8만 6천 명이 넘는 피난민이 흥남에서 탈출했다. 원산과 성진에서 대피한 사람들을 포함하면, 북동부 한국에서 총 98,100명의 민간인이 철수했다. 그러나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배에 탈 공간이 부족하여 남겨졌다.[5] 특히 SS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4,000명의 피난민을 수송했는데, 이는 단일 선박으로 육지에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이었다. 이는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의 대통령 포고령 제2914호에 따른 국가 비상사태 선포로 가능했다. 남쪽으로 대피한 민간인 중에는 문재인 전 대한민국 대통령의 부모도 포함되어 있었다.[6][7] 배에서는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고, 미 해군은 이들에게 김치 1–5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8][9]

7. 관련 매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 철수 기념탑

참조

[1] 웹사이트 The Refugee Evacuation from Hungnam: 9-24 December 1950 https://arsof-histor[...] 2021-10-30
[2] 문서 UN Forces used this title in action report
[3] 웹사이트 "[다큐온] 6.25한국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작전으로 손꼽히는 대규모 해상철수작전 ‘흥남철수작전’ “1950년 흥남철수의 비밀 1부” (KBS 210619 방송)" https://www.youtube.[...]
[4] 웹사이트 흥남철수 기념비 세운다 https://n.news.naver[...] 2024-11-16
[5]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6] 간행물 South Korea Elects Moon Jae-in, Who Backs Talks With North, as President https://www.nytimes.[...] 2017-05-09
[7] 웹사이트 President Moon responds to US sailor who participated in Hungnam Evacuation http://english.hani.[...] 2018-04-06
[8] 웹사이트 Moon Jae-in and 'Kimchi 5' http://koreajoongang[...] 2017-01-20
[9] 웹사이트 The Kimchi Babies http://nedforney.com[...] 2017-12-27
[10] 웹사이트 Chang boards Korean war epic Christmas Cargo https://www.screenda[...] 2005-11-03
[11] 뉴스 흥남철수 기념비 세운다 https://n.news.naver[...]
[12] 블로그 강경화 외교장관, 미2사단 방문 연설(국/영문) https://blog.naver.c[...]
[13] Youtube 미 제10군단 작전 보고서 (영상 16분 40초) https://www.youtube.[...]
[14] 뉴스 위대할손 유엔군대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50-12-28
[15] 뉴스 '흥남철수' 美선원 "맥아더 지시로 피난민 구조시작" https://n.news.naver[...]
[16] 뉴스 우산으로 이승만·맥아더 눈 찌르고 "김일성 만세!" https://www.newdaily[...]
[17] 뉴스 우산으로 이승만·맥아더 눈 찌르고 "김일성 만세!" https://www.newdaily[...]
[18] 뉴스 흥남철수 美 '기적의 배' 기네스 등재 https://news.naver.c[...]
[19] 서적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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