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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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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라노 겐은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78년부터 1996년까지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주니치 드래건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외야수로 활약하며 9번의 골든 글러브상과 1986년 도루왕 타이틀을 수상했다. 통산 450개의 희생타를 기록하여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에 올랐고, 은퇴 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 2군 감독,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코치, KIA 타이거즈 타격 코치 등을 역임했다. 2016년에는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감독으로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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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선수 이름히라노 겐
로마자 표기Ken Hirano
출생지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생년월일1955년 6월 20일
신장179cm
체중75kg
수비 위치외야수
투구우투
타석양타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77년
드래프트 순위드래프트 번외
첫 출장1981년 4월 4일
마지막 경기1996년
소속 구단 (선수)주니치 드래건스 (1978 ~ 1987)
세이부 라이온스 (1988 ~ 1993)
지바 롯데 마린스 (1994 ~ 1996)
감독 및 코치 경력
소속 구단 (코치)지바 롯데 마린스 (1995, 1997 ~ 2002)
스미토모 금속 가시마 (2003 ~ 2005)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6 ~ 2008)
KIA 타이거즈 (2011)
주니치 드래건스 (2012 ~ 2013)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2015 ~ 2019)
야마기시 로지스터즈
유튜브 채널 정보
채널 이름평야 겐의 야구길
채널 URL평야 겐의 야구길 유튜브 채널
활동 기간2020년 11월 10일 - 현재
장르야구
구독자 수 (2021년 8월 29일 기준)약 2580명
조회수 (2021년 8월 29일 기준)약 84만 회
기타 정보
관련 웹사이트야구길

2. 선수 경력

2. 1. 프로 입단 전

히라노 겐은 1955년 아이치현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6살 위에 누나 (나이토 요코)가 있는 4인 가족이었다.[3]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닮아 운동 신경이 뛰어났으며, 4살 때 아버지가 사준 비닐 제품을 글러브로 만들어 캐치볼을 했다.[62]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 5학년 때는 선발 팀의 유격수를 맡았고, "장래에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될 수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62][3] 초등학교 시절에는 오 사다하루(왕정치)를 동경하여 자신의 방에 붙인 포스터 앞에서 흉내를 내기도 했다.[63]

1961년에 아버지가 간경변으로 사망하고, 1967년에는 어머니가 위암으로 사망했다.[4] 이 때문에 누나가 고등학교를 1년간 휴학하고 철물점을 경영하게 되었고, 히라노 자신도 가게를 도왔다.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 운동장이 좁아 야구부가 없었기 때문에 축구, 탁구, 농구 등 여러 운동부에서 동시에 활동했다.[63][4] 집 근처에 대형 슈퍼마켓이 개점하면서 철물점 운영이 어려워지자, 1970년 겨울에 철물점을 폐업하고 토지와 가옥을 팔아 이누야마시로 이사했다.

이누야마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 투수로 활약했다. 2학년 때 여름 고시엔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 오미야 타츠오가 있던 쿄에이 고교를 꺾고,[5] 준결승에 진출했다. 같은 학년이자 야마쿠라 가즈히로가 소속된 도호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3안타를 기록했지만, 4-15로 크게 패했다.[64][6]

고교 시절의 활약을 인정받아 나고야 상과대학에 특별 전형으로 입학,[65][7] 아이치 대학 야구 리그에서 투수와 외야수를 겸하며 활약했다.[66][8] 3학년 때인 1976년 추계 리그에서는 8승을 올려 우승에 기여하며 MVP를 수상했다.[64] 리그 통산 투수로서 55경기에 등판하여 19승 18패, 평균자책점 2.31, 타자로서 62경기에 출장, 145타수 40안타, 타율 .276, 2홈런, 18타점을 기록했다.

197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곤스가 지명한 6명의 선수 중 3명이 입단을 거부했기 때문에,[9] 구단 측에서는 드래프트 번외로 히라노의 입단을 결정했다.[67][9] 담당 스카우트는 야마자키 젠페이였고,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1,400만 엔, 264만 엔, 등번호는 81번이었다.[10] 한편,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에 취업이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학과의 문제로 이어져, 야구부 OB회에서 제명됨과 동시에 면제되었던 학비도 졸업 시에 일괄 납부했다.

2. 2. 프로 선수 시절

2. 2. 1.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78년 투수로서 웨스턴 리그 경기에 등판해 시즌 2승을 올렸다. 그러나 대학 시절 사구로 다친 오른쪽 팔꿈치에 통증을 느꼈고, 프로 2년차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히로노 이사오 코치의 외야수 전향 권유를 받았다.[66] 이후 홍백전에서 후지나미 유키오에게 속구를 간단하게 맞은 것을 계기로 외야수 전향을 결심, 그 해 웨스턴 리그에서 3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할 7푼 6리를 기록했다.[66] 1980년에는 타격 부진으로 결장한 적도 있었고, 준족을 살리기 위해 우타자에서 스위치 히터로 전향하여 히로노 코치와 함께 연습했다. 같은 해 웨스턴 리그에서 61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은 2할 7푼 1리로 작년과 거의 같았다.[66]

그 해 오프 시즌, 팀 전력에서 제외될 뻔했으나 곤도 사다오 신임 감독의 제안으로 잔류했다. 곤도 감독은 야수의 분업제를 내걸어 수비나 주루 스페셜리스트를 발굴하고자 했다.[68] 1981년 시범 경기에서 보살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개막 이후 1군에 합류, 시즌 도중에는 주로 찰리 스파이크스의 대수비로 경기에 출전했다. 그 해 1군에서 110경기에 출전하며 경험을 쌓았다.[69] 시즌 종료 후 스파이크스와 레이 코지가 방출되면서 좌익수오시마 야스노리, 우익수는 다오 야스시가 주전이었지만, 중견수 포지션은 공백이었다.

1982년 도요다 세이스케와 중견수 포지션 경쟁을 했지만, 도요다가 시범 경기 도중 사구를 맞아 부상당한 사이 좋은 성적을 남기며 2번·중견수로 개막전 엔트리에 올랐다.[70] 개막전에서 자신이 친 타구가 오른쪽 무릎에 맞아 부상당해 경기 도중 교체되었지만, 다음날 경기에서 테이핑을 하고 홈런을 칠 정도로 활약하며[71] 그대로 2번 타자로 1년 동안 주전 선수로 뛰었다. 1번 타자인 다오가 시즌 174개의 최다 안타를 기록했고, 히라노는 당시 시즌 기록인 51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72] 수비에서는 최다 보살을 기록했고, 타격에서도 팀내 3위인 타율 2할 8푼 8리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83년부터는 전년 시즌 끝으로 은퇴한 도미타 마사루를 대신하여 등번호 '''3'''번을 달고 2번 타자로서 활약했고, 1982년 골든 글러브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1984년 시즌 종료 후 다오가 세이부 라이온스로 맞트레이드 되면서, 1985년부터 팀의 간판 타자로서 활약했고,[73] 정규 시즌에서 처음으로 3할 대 타율을 기록하며 통산 두 번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48개의 시즌 최다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고,[74] 데뷔 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도 출전하는 등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외야수로 성장했다. 오프에는 팀 야수 최고 연봉인 4,0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고, 스즈키 다카마사의 후임으로 주니치의 선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987년 왼쪽 장딴지와 아킬레스건 손상으로 스프링 캠프 조정이 늦어졌고, 4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기타벳푸 마나부에게 사구를 맞아 오른손 새끼 손가락에 골절상을 입는 등 숱한 부상으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75] 6월에 1군에 복귀했지만, 그 사이 히코노 도시카쓰의 활약으로 히라노는 복귀 이후 우익수가 되었다.[75] 그 해부터 감독으로 부임한 호시노 센이치는 선수들에게 투쟁 정신을 강하게 요구했다.[75] 7월 21일, 3경기 반 차이로 맞이한 1위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4회말 원 아웃 상황에 워렌 크로마티가 친 타구를 유격수 우노 마사루와 서로 양보하는 형태의 수비 플레이를 해 안타를 허용했고, 4회에 3점을 내주는 등 경기 도중에 교체되었다.[71] 이 경기의 패배로 주전 선수 자리를 잃게 되어, 같은 해 출전 경기 수는 90경기에 그쳤다.

추계 스프링 캠프 도중인 11월 18일 호시노 감독에게 트레이드 관련 사실을 전해 들으며, 오노 가즈유키와의 맞트레이드로 세이부에 이적한다.[76] 처음에는 개인적인 좋고 싫음으로 팀에서 방출되었다는 것에 대해 호시노 감독에게 원한을 품기도 했지만,[76] 실제로는 이시게 히로미치와의 ‘AK포’를 잇는 2번 타자로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적극적으로 히라노의 영입을 희망하고 있었다.[76] 부인은 실제 거주지가 구마가야시이며 같은 현 내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세이부로 이적한 것에 대해 기뻐했다고 한다.[76]

2. 2. 2.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모리 감독은 히라노에게 “전체 130경기의 출전을 보장하겠다”라고 얘기했고[76] 합동 트레이닝에서도 베테랑으로서의 조정은 자유롭게 맡고 있었지만 주위에 있는 베테랑 선수도 힘든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의식을 바꾸었다.[77] 몇 개월도 하지 않고 “자신 이상에게 익살스럽다”라고 이시게 히로미치에게 말하는 등 세이부의 팀 특성에도 친숙해졌다.[78] 이적 첫 해인 1988년에는 개인 최고 타율인 3할 3리를 기록함과 동시에 리그 최다인 41개의 희생타를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체력이 소모될 정도였지만 이후 일본 시리즈에서도 5경기를 모두 출전했다.[77]

그 후 세이부에서 2번·우익수로 뛰는 등 1989년에는 98경기에 출전하여 특히 수비면에서는 시즌 21개의 보살을 기록했고[79][80] 이듬해 1990년에는 요시다 요시오 (한신 타이거스)의 일본 기록을 경신하는 통산 265개째의 희생타를 기록하는 등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년 연속으로 퍼시픽 리그의 최다 희생타를 기록했다. 이렇게 해서 세이부 황금 시대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본인도 주니치 시절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일본 시리즈 우승을 4차례나 이끌었다.

그러나 1993년에는 6년 연속이자 통산 9번째의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지만 2할 3푼 9리의 저조한 타격 성적을 기록하여 나이면에서도 한계에 이르자 일본 시리즈에서는 7차전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작년의 계약과 관련해서는 1억 엔이 된 연봉에 대한[81] 구단과의 의견 차를 좁히지 못했고 팀의 미래를 위해 젊은 선수들의 기용을 목표로 하는 세이부 구단 측으로부터 시즌 종료 후 방출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2. 2. 3.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어린이들에게 야구 선수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82] 자유 계약 신분으로 1994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했고 트레이드 상대였던 오노 가즈유키도 동시에 지바 롯데로 이적했다. 다음 해인 1995년에는 타격 코치로 겸임했다. 이듬해 1996년 5월 23일 긴테쓰 버펄로스(나고야 구장)와의 경기에서 사상 최초로 통산 450개의 희생타를 달성했지만 6월 무렵 구장을 이동할 시에 탑승한 신칸센 열차의 좌석 테이블 사이에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끼이는 사고를 당해 골절상을 입는 등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24] 자유 계약 신분이 되었고, 야기사와 소로쿠 감독으로부터 팀의 정리 역할로 영입되어[25]1994년에 지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했다. 또한, 과거 트레이드 상대였던 오노 카즈유키도 동시에 롯데로 이적했다.

1995년에는 코치를 겸임했다.

1996년에는 5월 23일 긴테츠전 (나고야 돔)에서 사상 최초의 통산 450개의 희생타를 달성했지만, 6월 2일 오릭스전 (그린 스타디움 고베) 종료 후, 지바에 돌아갈 때 탔던 신칸센 열차 안에서 팔걸이 내장 테이블을 수납하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끼어 골절되어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26]。결국 그 전날 경기가 현역 마지막 출장(후반, 히라이 미츠치카를 대신해 우익수로 출장)이 되었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히라노 겐은 선수 은퇴 후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의 2군 감독을 맡았고, 2002년에는 1군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 선수들의 부상에 주의하며 승리하는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을 가르치고, 팀 플레이의 자각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83] 2군 감독 시절에는 육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선수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을 맡기거나, 마운드에서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투수들을 기용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83]

2003년에는 사회인 야구팀 스미토모 금속 가시마 경식 야구부(현 닛폰제철 가시마 경식 야구부)의 타격 코치로 부임했고, 2004년부터는 종합 코치를 맡았다. 2004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출전에는 실패했지만, 여름에 맹훈련을 실시하여 가을에 열린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 대회에 18년 만에 출전했다.[28] 2005년에는 도시 대항 야구 대회 8강 진출을 이끌었지만,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코치로 초빙되면서 팀을 떠났다. 사회인 야구팀 코치 시절에는 도카이 TV, 도카이 라디오 방송, J SPORTS, 도쿄 메트로폴리탄 텔레비전 등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주니치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를 맡기도 했다.

2006년, 히라노는 닛폰햄의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로 부임하여 트레이 힐만 감독이 추구한 스몰볼 야구와 함께 팀의 25년 만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44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29] 2007년에는 팀의 도루, 도루 성공률, 희생타가 증가했고, 실책은 리그 최저를 기록했다. 특히 다나카 겐스케에게 번트를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다나카는 히라노가 보유하고 있던 시즌 희생타 퍼시픽 리그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1군 타격 코치로 자리를 옮겼지만, 팀 타격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30]

2009년부터 홋카이도 방송, 도카이 TV, 도카이 라디오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고, 홋카이도 분카 방송에서 중계하는 닛폰햄 경기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2010년에는 TVh 파이터스 중계에서도 해설을 맡았으며, 같은 해 12월 7일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 후보에 올랐다.[84]

2010년 11월, 히라노는 KBO 리그 팀인 KIA 타이거즈의 타격 코치를 맡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미야자키현 휴가시에서 열린 훈련에 참가했고, 2011년 1월 KIA 타이거즈와 정식 계약을 맺고 1년간 활동했다.

2012년, 히라노는 현역 시절 친정팀인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로 복귀했다.[32] 하지만 주루 미스와 사인 미스 등으로 인해 5월에 3루 코치에서 물러나 2군으로 내려갔고, 이후 1군 복귀 후에는 1루 코치로 전념했다. 2013년에는 1루 코치로 배치되었지만, 10월에 구단으로부터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33]

2014년부터 J SPORTS, 도카이 라디오(2015년까지), STV 라디오의 해설자로 활동했다. 2019년에는 텔레비전 사이타마 개국 40주년 기념 주간에 세이부 OB 자격으로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했고, 2020년부터는 텔레비전 사이타마 해설자로 고정 출연하고 있다. 삿포로 TV 해설자로도 활동 중이다.

2015년, 히라노는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의 야수 코치로 취임했다.[34] 2016년부터는 감독을 맡아[35] 그 해 팀을 리그 동부 지구 전·후기 통합 우승,[36] 지구 챔피언십,[37] 리그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끌었다.[38]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우승팀 에히메 만다린 파이레이츠와의 그랜드 챔피언십에서도 승리하여 팀 최초로 '독립 리그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39] 2017년과 2018년에도 팀을 지구 우승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2018년에는 2년 만에 두 번째 '독립 리그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48] 2019년 전기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후기 리그에서는 3위에 그쳤고, 지구 챔피언십에서 패배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52] 이후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의 시니어 디렉터로 취임했다.[53]

2020년부터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주최 경기 중계 해설을 맡고 있으며, 유튜버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2023년부터는 사회인 야구팀 야마기시 로지스터즈의 감독을 맡고 있다.[54]

4. 플레이 스타일

4. 1. 타격

히라노 겐은 스위치 히터로서 좌우 타석 모두에서 안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66] 특히 희생 번트에 능숙하여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의 통산 희생타 기록(451개)을 보유하고 있다.[85] 번트를 할 시에는 타구의 기세를 죽이는 것보다 코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필딩이 좋지 않으면 투수 앞에 굴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70] 주자를 보낸 후에 클린업이 범퇴하면 낙담도 크지만 경기에 이기면 자신이 안타를 치지 않은 것 등에 대해서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77]

4. 2. 수비

히라노 겐은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뛰어난 외야 수비 능력을 선보였다. 골든 글러브상을 9회, 최다 보살도 5회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외야수로 인정받았다.[86][57] 세이부에서 우익수로서 중견수아키야마 고지와 구성된 우중간 수비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수비 범위의 분담도 부드러웠다.[86]

현역 시절 튼튼한 어깨에 대한 평가는 좋았고, 빠른 발을 가진 히로세 데쓰로를 우익수 땅볼로 잡은 적도 있었다.[59] 투수 시절의 경험으로 무리한 자세에서도 송구 방향을 보았기 때문에 컨트롤도 좋았다. 외야 수비의 볼거리는 평범하게 수비 범위로 날아온 공을 쉽게 잡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타구 예측 능력과 머리가 상하로 움직이지 않는 발놀림을 외야 수비에 중요한 능력으로 꼽았다. 포구 후 빠른 송구를 중시했으며, 이데 슌 코치와 땅볼 포구 연구를 거듭하여 당시의 정설과는 다른 스타일을 확립했다. 보살은 1989년의 21개를 정점으로 이후 감소했지만, 강견을 두려워하여 진루를 자제하는 쪽이 다음 타자를 억제할 가능성이 있어서 바람직했다는 평가도 있다.[60]

5. 상세 정보

5. 1. 출신 학교


  • 아이치 현립 이누야마 고등학교
  • 나고야 상과대학

5. 2. 선수 경력

1978년부터 1987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활약했다. 이후 1988년부터 1993년까지는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1994년부터 1996년까지는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5. 3. 지도자 경력

히라노 겐/平野 謙일본어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지바 롯데 마린스 2군 감독을 역임했고, 2002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 1군 수석 코치를 맡았다. 2003년에는 스미토모 금속 가시마 경식 야구부 타격 코치를 맡았으며, 2004년부터 2005년까지는 스미토모 금속 가시마 경식 야구부 종합 코치를 역임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고, 2008년에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11년에는 KIA 타이거즈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12년부터는 주니치 드래곤스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를 맡고 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도카이 TV, 도카이 라디오 방송, J SPORTS, 도쿄 메트로폴리탄 텔레비전 야구 해설위원 겸 주니치 스포츠 야구 평론가를 맡았으며,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홋카이도 방송, 도카이 TV, 도카이 라디오 방송 야구 해설위원을 역임했다.

5.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히라노 겐은 1986년에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8년에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골든 글러브상은 1982년, 1985년, 1986년,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총 9회 수상했다.

5. 5. 개인 기록

히라노 겐은 통산 450 희생타(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를 기록했으며, 올스타전에 2회(1986년, 1988년) 출장했다. 1989년 6월 25일에는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히라노 겐의 첫 출장은 1981년 4월 4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 8회 초 도요다 세이유의 대주자로 출장한 것이다. 첫 안타와 첫 타점은 1981년 4월 1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차전(나고야 구장) 6회 말에 가와구치 가즈히사로부터 2점 적시 3루타를 기록한 것이다. 첫 희생타는 1981년 5월 2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나고야 구장) 9회 말에 오마치 사다오에게서 기록했다. 첫 도루는 1981년 6월 3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5차전(나고야 구장) 8회 초에 2루 도루(투수: 가토 하지메, 포수: 야마쿠라 가즈히로)를 성공시킨 것이다. 1981년 6월 16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0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2번 타자·중견수로 첫 선발 출장했다. 첫 홈런은 1982년 4월 5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나고야 구장) 7회 말에 우다 도쇼쿠를 상대로 동점 3점 홈런을 기록했다.

1988년 8월 31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21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1회 말에 야마오카 유키히코를 상대로 통산 200 희생타(역대 7번째)를 기록했다. 1989년 9월 24일, 대 롯데 오리온즈 24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3회 말에 무라타 쵸지에게서 좌전 안타를 쳐내며 통산 1000안타(역대 160번째)를 달성했다. 1990년 5월 2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8회 말에 야마우치 가즈히로를 상대로 통산 250 희생타(역대 2번째)를 기록했다. 1991년 4월 29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5차전(도쿄 돔) 7회 초에 시바타 야스미쓰로부터 통산 300 희생타(역대 최초)를 기록했다. 1992년 4월 2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5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1회 초에 와타나베 토모오를 상대로 통산 350 희생타(역대 최초)를 기록했다. 1993년 6월 17일, 대 긴테츠 버팔로스 11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6회 말에 요시이 리히토로부터 통산 400 희생타(역대 최초)를 기록했다. 1993년 9월 12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24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7회 초에 우익수로 출장하여 통산 1500경기 출장(역대 111번째)을 달성했다. 1994년 7월 7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5차전(후쿠오카 돔) 4회 초에 아시카가 유타카로부터 우전 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1500안타(역대 69번째)를 달성했다.

1991년 6월 19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14차전(야마가타현 야구장)에서 1경기 4희생타를 기록했다. 일본 시리즈 통산 희생타는 19개로 역대 1위이다.

6. 에피소드

세이부 시절에는 후배 선수들로부터 ‘겐 상’(겐 상/謙さん일본어)이라고 불리는 등 존경받고 있었다고 한다.[55] 현역 시절부터 격의 없는 성격과 인품으로 알려져 많은 후배들에게 존경받았다.[56] 세이부 시절에 주거지를 둔 도코로자와시의 집으로부터 지바 롯데 시절에는 우라와 시의 연습소나 홈 구장이 있는 지바시에 통근하고 있었다. 현역 시절의 취미는 마작이며, 주니치와 세이부 시절 동료들과 자주 즐겼다. 주니치 시대의 응원가는 히라노의 이름에 연유하여, TV 애니메이션 "늑대 소년 켄"의 주제가의 개사였으며,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치고 있으면, 당시 응원단으로부터 "(응원가를 틀고 싶으니) 조금 길게 공을 보는 타석도 만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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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행물 婦人公論、1993年5月号、P.276
[4] 간행물 婦人公論、1993年5月号、P.277
[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3年3月1日号、P.112
[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0年6月4日号、P.96
[7] 간행물 婦人公論、1993年5月号、P.278
[8]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78
[9]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77
[10] 간행물 婦人公論、1993年5月号、P.279
[11]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79
[12]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80
[13]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81
[14]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75
[15]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73
[16]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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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82
[19]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84
[2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88年7月18日号、P.120
[21] 간행물 Number、1991年11月5日号、P.82
[2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3年3月1日号、P.111
[23] 간행물 婦人公論、1993年5月号、P.275
[24] 간행물 婦人公論、1994年3月号、P.327
[2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3年12月27日号、P.112
[26] Youtube 【時効】プロ野球には色々な監督がいます【平野謙さん】 https://www.youtube.[...] 石毛宏典TV 2021-06-29
[2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2月19日号、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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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뉴스 ペガサス連敗で4連覇の夢散る BCリーグ東地区 栃木が制す https://www.jomo-new[...] 2019-09-16
[52] 뉴스 ペガサスの平野謙監督が退任 BCリーグ 2016年から4季指揮 https://www.jomo-new[...]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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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간행물 《후진코론》 19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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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간행물 Number 1991-11-05
[71] 간행물 Number 1991-11-05
[72] 문서 지금까지의 기록은 1965년의 [[곤도 아키히토]]([[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다이요 웨일스]])가 41개, 히라노의 기록은 1988년에 [[와다 유타카]]([[한신 타이거스]])가 그 기록을 깼다.
[73] 간행물 Number 1991-11-05
[74] 문서 2007년에 [[아라키 마사히로]]가 도루왕을 석권할 때까지 주니치 선수로서의 마지막 도루왕이었다.
[75] 간행물 Number 1991-11-05
[76] 간행물 Number 1991-11-05
[77] 간행물 Number 1991-11-05
[7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88-07-18
[79] 간행물 Number 1991-11-05
[80] 문서 시즌 20개 이상의 보살을 기록한 것은 1981년에 짐 타이론([[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이 20개의 보살을 기록한 이후였다.
[81] 간행물 후진코론 1993-05
[82] 간행물 후진코론 1994-03
[83]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2-19
[84] 웹인용 平成23年 第51回競技者表彰委員会 野球殿堂入り候補者名簿」発表 http://www.npb.or.jp[...] 2013-01-27
[85] 문서 1998년에 [[가와이 마사히로]](당시 요미우리)에 의해 기록이 깨질 때까지는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86]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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