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시마 요시유키
1. 개요
가와시마 요시유키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육군대신, 조선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89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을 거쳐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1935년 육군대신으로 취임했다. 육군 내 파벌 다툼 속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2·26 사건을 막지 못하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종전 직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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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사망 -
존 커틴
존 커틴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이자 노동당 소속 총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독자적으로 선전포고하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 징병제 도입, 사회 복지 제도 확대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
1945년 사망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20세기 중반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미국의 32대 대통령을 4번 연임하며 뉴딜 정책으로 경제 회복과 사회 안정을 추구하고, 연합국을 이끌어 추축국에 맞서 승리하며 전후 국제 질서 형성에 기여했다. -
1878년 출생 -
뤼시앵 페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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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출생 -
잭 존슨 (권투 선수)
흑인 최초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잭 존슨은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챔피언으로 활동하며 인종차별 속에서 "세기의 대결" 승리 후 인종 폭동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맨 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고 사후 사면된, 도전적인 삶으로 후대 복서들에게 영감을 준 전설적인 권투 선수이다. -
독일에 거주한 일본인 -
카지우라 유키
카지우라 유키는 1965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작곡가 겸 음악 프로듀서로, See-Saw 데뷔 후 FictionJunc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음악을 작곡하며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과 실력파 보컬리스트들과의 협업으로 알려져 있다. -
독일에 거주한 일본인 -
우치다 아쓰토
우치다 아쓰토는 가시마 앤틀러스와 샬케 04에서 활약하며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 DFB-포칼 우승 등을 기록하고 일본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후 은퇴하여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다.
2. 약력
에히메현 출신으로, 1878년 5월 25일 무사 가와시마 우이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쓰야마 시립 외측 심상 초등학교,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2.1. 군 경력
에히메현 출신으로 1898년 육군사관학교를 10기로 졸업하였다. 동기생으로는 훗날 할힌골 전투 때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우에다 겐키치가 있다. 1908년 육군대학 20기를 졸업하고, 작전자재정비회의 간사장, 육군성 인사국장, 근위 보병 제1사단장, 제19사단장, 제3사단장을 거쳤다. 이후 육군 서열 제3위 자리인 교육총감부 본부장을 거쳐, 조선군 사령관, 군사참의관을 거쳤다. 1934년 대장으로 승진하였고, 1935년 육군대신에 취임하였다. 당시 육군 내에서는 통제파와 황도파의 대립이 극심하였는데, 그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아서 타협점으로 육군대신으로 선임될 수 있었다. 그는 황도파의 거두 마사키 진자부로와 아주 친했지만, 무색무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양 파벌은 그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의 재임 시절 2·26 사건이 발발하였고, 그는 이 쿠데타에 동조하는 듯한 고시문을 도쿄경비사령부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쇼와 천황의 반발로 실패로 끝났고,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책임을 지고 예비역 처분되었다.
2.2. 육군대신 재임과 2·26 사건
1934년 대장으로 승진한 가와시마 요시유키는 1935년 하야시 센주로의 뒤를 이어 육군대신에 취임하였다. 당시 육군 내에서는 통제파와 황도파의 대립이 극심하였는데, 그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아 타협점으로 육군대신으로 선임될 수 있었다. 그는 황도파의 거두 마사키 진자부로와 아주 친했지만, 중립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양 파벌은 그를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였다.
아이자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하야시 센주로는 후임으로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가와시마, 우에다 겐키치 조선군 사령관, 니시 요시카즈 도쿄 경비 사령관을 고려했으나, 가장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와시마를 선택했고, 오카다 총리도 그를 적임이라고 평가했다.
가와시마 요시유키의 재임 시절 2·26 사건이 발발하였고, 그는 이 쿠데타에 동조하는 듯한 고시문을 도쿄경비사령부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쇼와 천황의 반발로 실패로 끝났고,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책임을 지고 예편 처분되었다.
2.3. 말년
2·26 사건 당시 가와시마 요시유키는 쿠데타에 동조하는 듯한 고시문을 도쿄경비사령부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쇼와 천황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예편되었다.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 8일에 사망하였다.
3. 인물 및 평가
육군사관학교 10기 졸업 시 110위였다. 동기로는 마쓰키 나오아키, 니시 요시카즈, 우에다 겐키치 등이 있다. 육군대학교 20기 졸업 시 6위였다.
오카다 내각에서 육군 대신으로 취임했지만, 당시 육군은 통제파와 황도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있었고, 가와시마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군 대신으로 선출되었다. 아이자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전임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신은 후임으로 처음에는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가와시마, 우에다 겐키치 조선군 사령관, 니시 요시카즈 도쿄 경비 사령관 순으로 생각했지만, 가장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와시마를 선택했고, 오카다 총리도 가와시마를 무색으로 적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중간파였기 때문에 양 파의 통제를 하지 못해 2·26 사건을 막을 수 없었다. 양 파는 물론 청년 장교들까지 그를 괴뢰로 이용하려 했던 점에서 가와시마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알 수 있다.
2·26 사건 당시 육군 대신으로서 반란 부대에 이해를 보이는 듯한 육군 대신 고시를 도쿄 경비 사령부에서 발표했다. 이후 쇼와 천황의 의향에 따라 반란 부대는 진압되었다.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 후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2·26 사건의 배후로 여겨지는 마사키 진자부로와 친했던 것 같다.
마쓰야마 중학교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였다. 다만, 가와시마는 그가 그다지 훌륭한 선생님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문학자 가와시마 겐은 증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