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은 1922년 6월 12일부터 1923년 9월 2일까지 448일 동안 재직했다. 가토 도모사부로는 해군 대장 출신으로 해군대신을 겸임했으며,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군축을 추진했다. 내각은 육군의 사단 감축과 시베리아 출병 중지를 결정하고, 보통 선거법안을 제안했지만 부결되었다. 가토 총리 사망 후에는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총리대신 직무를 대행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22년 일본 - 시나노강 학살 사건
1922년 7월 일본 시나노강 나카쓰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수십 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 속에서 공사 현장 감독에 의해 살해당하고 시신이 유기된 사건으로, 재일 한국인 권익 보호 운동과 노동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의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 1922년 일본 - 워싱턴 회담
워싱턴 회담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주도로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9개국 국제 회의로, 해군 군비 제한, 태평양 지역 질서 재편, 중국 문제 등을 논의하여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등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사변 이전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켰다. - 1923년 일본 - 간토 대지진
1923년 9월 1일 간토 지방 남부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은 대규모 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 여진, 쓰나미로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으며, 간토 대학살과 같은 비극을 낳고 일본의 재해 예방 및 도시 계획에 큰 영향을 준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이다. - 1923년 일본 - 제2차 야마모토 내각
제2차 야마모토 내각은 1923년 9월 2일부터 1924년 1월 7일까지 존속한 일본 내각으로,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붕괴와 간토 대지진 혼란 속에서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수도권 복구에 집중했으나 도라노몬 사건으로 총사퇴, 일본 정당 정치 부활에 영향을 미쳤다. - 다이쇼 시대의 내각 - 제3차 가쓰라 내각
가쓰라 다로가 이끈 제3차 가쓰라 내각은 다이쇼 정변으로 62일 만에 총사직하며 단명 내각으로 기록되었고, 신당 창당 시도와 호헌 운동, 다이쇼 천황의 조칙 등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 다이쇼 시대의 내각 - 제1차 와카쓰키 내각
제1차 와카쓰키 내각은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총리대신을 맡아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재임하며 보통선거법 시행 후 정치적 혼란과 금융 공황을 겪었으며, 타이완 은행 구제안 부결로 인해 총사퇴했다.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 |
---|---|
기본 정보 | |
![]() | |
내각 번호 | 21대 |
내각 이름 |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
총리 | 가토 도모사부로 |
전직 | 해군 대장 |
성립 | 1922년 6월 12일 |
종료 | 1923년 9월 2일 |
정치적 지지 기반 | 관료, 귀족원 입헌정우회의 각외 협력 |
선거 | 없음 |
해산 | 없음 |
이전 내각 | 다카하시 내각 |
후임 내각 | 제2차 야마모토 내각 |
정치 | |
국가 원수 | 다이쇼 |
총리 | 가토 도모사부로 |
여당 | 중의원 블록: 입헌정우회 고신 클럽 귀족원 블록: 고유 클럽 겐큐카이 |
총 의석수 | 알 수 없음 |
야당 대표 | 알 수 없음 |
야당 | 알 수 없음 |
야당 내각 | 알 수 없음 |
입법부 현황 | 알 수 없음 |
마지막 선거 | 알 수 없음 |
임기 | 제46회 제국의회 |
구성 | |
출범일 | 1922년 6월 12일 |
해산일 | 1923년 8월 24일 |
2. 재직 기간
1922년 (다이쇼 11년) 6월 12일 ~ 1923년 (다이쇼 12년) 9월 2일[1]
3. 내각 구성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은 다카하시 내각이 하라 다카시 수상 암살 이후,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당내 통합에 실패하여 반년 만에 총사직하면서 시작되었다.[6] 후임 내각으로는 헌정회가 예상되었으나, 원로들은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의 역량을 의문시했다. 그래서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 대신을 우선 후보로 선정했다.
가토 도모사부로는 처음에는 은퇴를 고려했으나, 헌정회로의 정권 이양을 막으려는 입헌정우회의 지원 약속을 받고 내각을 조직했다. 정우회는 가토 도모사부로 정권에 각외 협력 형태로 여당 지위를 유지했다.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의 각료 구성은 다음과 같다.
출신 | 국무대신 | 기타 |
---|---|---|
교우구락부 | 4 | |
연구회 | 3 | 내각법제국장관 |
경신구락부 | 0 | 내각서기관장 |
군부 | 2 | 국무대신 총 3명 |
관료 | 1 | |
10 | 국무대신 총 11명 |
3. 1. 국무대신
직책 | 대신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내각총리대신 | 가토 도모사부로 | 해군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8월 24일 |
외무대신 | 우치다 고사이 | 무소속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내무대신 | 미즈노 렌타로 | 입헌정우회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대장대신 | 이치키 오토히코 | 무소속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육군대신 | 야마나시 한조 | 육군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해군대신 | 가토 도모사부로 | 해군 | 1921년 11월 4일 | 1923년 5월 15일 |
다카라베 다케시 | 해군 | 1923년 5월 15일 | 1923년 9월 2일 | |
사법대신 | 오카노 게이지로 | 입헌정우회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문부대신 | 가마타 에이키치 | 입헌정우회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농상무대신 | 아라이 겐타로 | 입헌정우회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체신대신 | 마에다 도시사다 | 무소속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철도대신 | 오키 엔키치 | 무소속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내각관방장관 | 미야타 미쓰오 | 무소속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내각법제국장관 | 바바 에이이치 | 무소속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9월 2일 |
[1]
1923년 8월 24일, 가토 도모사부로 총리가 사망한 이후, 우치다 고사이는 1923년 8월 24일부터 9월 2일까지 내각총리대신 직무대행을 맡았다.[1]
3. 2. 우치다 외상의 임시 겸임 기간
1923년 8월 24일에 임명되어[4] 10일간 재직하였다.
3. 3. 내각서기관장·법제국 장관
무소속(경신구락부)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