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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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온지 긴모치는 1849년 교토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가로,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활약했다. 그는 우다이진의 아들로 태어나 사이온지 가문의 양자가 되었으며, 메이지 천황과는 어린 시절부터 친분을 쌓았다. 프랑스 유학을 통해 자유주의적 사상을 접했으며, 입헌정우회 창당에 참여하고 두 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원로로서 총리 지명 권한을 행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군부의 세력 확장에 저항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그는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리쓰메이칸 대학 등 여러 교육기관 설립에 관여했으며, 국제 협조주의적 외교를 추구했으나,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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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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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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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49년 12월 7일 |
출생지 | 교토, 일본 |
사망일 | 1940년 11월 24일 (90세) |
사망지 | 오키쓰, 시즈오카, 일본 |
정당 | 헌정회 |
모교 | 파리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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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및 훈장 | |
작위 | 공작 |
훈장 | 종1위 대훈위 국화장경식 대훈위 국화대수장 훈1등욱일동화대수장 욱일대수장 훈1등서보장 욱일중광장 욱일중수장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도쿠다이지 긴쓰나 |
형 | 도쿠다이지 사네쓰구 |
동생 | 스에히로 다케마로, 스미토모 도모스미 |
양아버지 | 사이온지 모로토키 |
양자 (양자) | 사이온지 하치로 |
손자 | 사이온지 기미카즈, 사이온지 후지오 |
증손자 | 사이온지 가즈아키, 사이온지 아키히로, 사이온지 기미토모, 사이온지 사치코, 사이온지 히로오 |
정치 경력 | |
직책 |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1906년 1월 7일 - 1908년 7월 14일 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21일 |
국왕 |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
이전 수상 | 가쓰라 다로 |
다음 수상 | 가쓰라 다로 |
기타 정치 경력 | |
직책 | 추밀원 의장 |
재임 기간 | 1900년 8월 27일 - 1903년 7월 13일 |
이전 의장 | 구로다 기요타카 |
다음 의장 | 이토 히로부미 |
직책 |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추밀원 의장 겸임) |
재임 기간 | 1901년 5월 10일 - 1901년 6월 2일 |
이전 수상 | 이토 히로부미 |
다음 수상 | 가쓰라 다로 |
직책 | 외무대신 |
재임 기간 | 1896년 5월 30일 - 1896년 9월 22일 1906년 3월 3일 - 1906년 5월 19일 (총리 겸임) |
직책 | 반열 |
재임 기간 | 1900년 10월 27일 - 1901년 5월 10일 |
직책 | 문부대신 |
재임 기간 | 1894년 10월 3일 - 1896년 9월 28일 1898년 1월 12일 - 1898년 4월 30일 |
직책 | 귀족원 의원 |
재임 기간 | 1890년 2월 - 1940년 11월 24일 |
직책 | 니가타 현 지사 |
재임 기간 | 1868년 10월 28일 - 1869년 2월 22일 |
2. 생애
1849년 교토에서 우다이진 도쿠다이지 긴이토의 아들로 태어나, 구게 가문인 사이온지 가문에 입양되었다.[6] 어린 시절 메이지 천황의 놀이 친구로 자주 궁궐을 방문하며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6] 친형 도쿠다이지 사네츠네는 궁내대신을 지냈고, 동생 스미토모 기치자에몬은 스미토모 재벌의 수장이 되었다.[6]
보신 전쟁에서 관군의 산인도 진무 총독을 맡았고, 프랑스 유학 후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 되었다. 제2차 이토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여 외무대신을 겸임했으며, 제3차 이토 내각에서도 문부대신을 지냈다. 제4차 이토 내각에서는 무임소 대신으로 입각, 이토 히로부미의 병환 중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고, 이후 이토의 사임으로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을 맡았다.
1903년 이토의 뒤를 이어 입헌정우회 총재에 취임, 1906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제1차 사이온지 내각,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을 조직했다. 이 시기는 가쓰라 다로와 번갈아 정권을 잡아 "가쓰라-사이온지 시대"로 불렸다.
1916년 원로가 되었고, 1924년 마쓰가타 마사요시 사후에는 "마지막 원로"로서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을 보필하며 총리 선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숙 릿메이칸을 창설하여 릿쿄 대학의 초석을 놓는 등 교육에도 헌신했다. 1940년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서간과 자료들이 소각되었다.
다음은 사이온지 긴모치의 연보이다.
연도 | 내용 |
---|---|
1849년 | 교토에서 도쿠다이지 긴스미의 차남으로 출생. |
1850년 | 공망으로 개명. |
1852년 | 종5위하 서위. 사이온지 스에스케의 양자가 됨. |
1853년 | 정5위하 승서, 시종 임관. |
1854년 | 종4위하 승서. |
1855년 | 종4위상 승서. |
1856년 | 정4위하 승서. |
1857년 | 원복, 우근위권소장 전임. |
1861년 | 우근위권중장 전임, 종3위 승서. |
1862년 | 정3위 승서. |
1868년 | 관군참여 겸대, 산인도 진무 총독 겸대, 권중납언 전임. |
1869년 | 니가타 현지사 사임, 정3위 권중납언 관위 반납, 사숙 릿쿄칸 개설. |
1870년 | 프랑스 유학. |
1878년 | 정3위 복위. |
1880년 | 귀국. |
1881년 | 메이지 법률 학교 강사, 동양자유신문 창간, 참사원 의관보. |
1882년 | 훈3등 욱일중수장 수훈. |
1883년 | 참사원 의관 전임. |
1884년 | 후작 수작. |
1885년 | 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공사 부임. |
1886년 | 법률 조사위원 겸임. |
1887년 | 주독일 제국 공사, 주벨기에 공사 겸임. |
1891년 | 귀국, 상훈국 총재 취임. |
1892년 | 민법상법 시행 조사 위원장 겸임. |
1893년 | 법전 조사회 부총재, 귀족원 부의장 취임, 종2위 승서. |
1894년 | 추밀 고문관 및 상훈국 총재 겸임, 제2차 이토 내각 문부대신 입각. |
1895년 | 외무대신 임시 대리 겸임, 훈1등서보대수장 수훈. |
1896년 | 외무대신 겸임, 훈1등욱일대수장 수훈, 제2차 마쓰카타 내각 외무대신 겸 문부대신 유임. |
1898년 | 제3차 이토 내각 문부대신 입각, 정2위 승서. |
1899년 | 오이소에 별장 건설. |
1900년 | 추밀원 의장, 제4차 이토 내각 반열,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 |
1901년 |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 대장대신 임시 겸임. |
1903년 | 추밀원 의장 사임, 입헌정우회 총재 취임. |
1906년 | 내각총리대신 취임(제1차 사이온지 내각), 문부대신 임시 겸임, 외무대신 임시 겸임. |
1907년 | 훈1등욱일동화대수장 수훈. |
1908년 | 내각총리대신 사임. |
1911년 | 내각총리대신 취임(제2차 사이온지 내각). |
1912년 | 내각총리대신 사직, 전관 예우. |
1913년 | 교토 세이후 소에 은거. |
1914년 | 정우회 총재 사임. |
1917년 | 오이소 별장 매각. |
1918년 | 대훈위국화대수장 수훈, 제국 경제 고문 취임. |
1919년 | 파리 강화 회의 전권 임명, 시즈오카현 오키쓰정에 별장(좌어장) 건설. |
1920년 | 공작 승작. |
1928년 | 대훈위국화장경식 수훈. |
1937년 | 제국 경제 고문 사임. |
1940년 | 훙거, 종1위 추증, 국장. |
2. 1. 성장 과정
1849년 교토에서 우대신 도쿠다이지 긴이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6] 4세에 사이온지 가문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6] 유년 시절 거주지가 어소(御所)[70]와 가깝고, 메이지 천황이 되는 사치노미야 황태자와 나이가 비슷하여 종종 그의 놀이 상대로 부름을 받았다.[6]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6]이와쿠라 도모미, 산조 사네토미 등과 교류하며 막부 말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고메이 천황이 설치한 가쿠슈인에서 배우고, 11세 때부터 어전에 출사하여, 유노미야 (후의 메이지 천황)의 측근이 되었다.[23][24] 이와쿠라 도모미와도 이 시기에 친해졌다.[24]
학문은 이토 유사이와 아키타 슈세츠에게, 검술은 교토 제일의 검객으로 불린 토다 에이노신과 그의 조카 후시미 슈지로부터 배웠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을 읽는 등 세계 정세에도 관심을 가졌다.
2. 2. 에도 막부 말기 · 메이지 유신
이와쿠라 도모미 등 에도 막부 타도에 적극적이었던 인물들과 비교하면, 사이온지 긴모치는 에도 막부 말기의 정치적 공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도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조정에서 이를 도쿠가와 가문과 시마즈 가문의 사적인 싸움으로 보려는 의견이 나오던 중, 사이온지는 적극적인 관여와 주전론을 주장하여 이와쿠라 도모미 등 토막파 공경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보신 전쟁에서 사이온지는 산인도 진무총독, 아이즈구 정벌대참모 등을 역임하며 각지를 전전했고, 에치고 부지사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10대라는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가문의 후광 덕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작가 시바 료타로는 저서 '화신'에서 도막파 병학자 오무라 마스지로가 사이온지를 후계자로 보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마스지로에게 "당신은 군문 쪽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67년과 1868년 일본에서 일어난 보신 전쟁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어린 메이지 천황을 (명목상) 정부의 수장으로 옹립하는 사건이었다. 조정의 일부 귀족들은 이 전쟁을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사무라이들이 도쿠가와 씨족에 맞선 사적인 분쟁으로 여겼다. 사이온지는 조정의 귀족들이 주도권을 잡고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황실 대표로서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다.
그의 첫 번째 만남 중 하나는 가메오카를 무혈 입성시키는 것이었다. 다음 만남은 사사야마 성에서 있었다. 수백 명의 사무라이들이 길에서 만났지만, 수비군은 즉시 항복했다. 그 후 후쿠치야마도 싸움 없이 항복했다. 이때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만든 황실 기를 얻었는데, 붉은색 바탕에 해와 달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사무라이들은 황실 기를 든 군대를 공격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쉽게 ''쇼군''을 버렸다. 2주 후 사이온지는 기쓰키에 도착했고, 또 다른 유혈 사태 없이 사이온지는 배를 타고 오사카로 돌아왔다. 결국 일은 나가오카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실제 전투에서는 지휘에서 물러났고 에치고의 지사로 임명되었다.[1]
2. 3. 프랑스 유학
1871년 오무라 마스지로의 추천으로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71] 유학 당시의 편지에는 프랑스로 가는 배 안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해하고, 백인 소년에게 이별의 키스를 요구받아 당황했다는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파리 코뮌을 직접 경험하고, 조르주 클레망소(후의 프랑스 수상), 나카에 조민,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교류하며 자유주의 사상을 접했다.[71]
귀국 후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여 1881년 3월 18일 나카에 조민,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함께 동양자유신문을 창간했으나,[71] 정부의 압력으로 4월 30일 제34호까지만 발행된 후 폐간되었다.
2. 4. 정치가로서의 사이온지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순방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으로 정계에 입문했다.[61] 유럽에서 이토의 신임을 얻은 사이온지는, 1900년 입헌정우회 창당에 참여하여 1903년에는 총재가 되었다.[61] 이후 다이쇼 천황 즉위 시에 원로 반열에 올랐다.[61]프랑스 유학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진 사이온지는, 중의원 다수파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의 상도를 지지했다.[61] 그러나 군부 등은 그를 국가주의에 반하는 세계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61]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후 일본에서 사이온지만큼 정치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61] 그는 원로로서 궁중, 국무, 군부의 조정 역할을 맡아 일본 정계를 이끌었다.[61]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교육칙어 개정을 시도하는 등 국가주의적 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군부 세력 확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61]
귀국 후 추밀원에 합류하여 귀족원 부의장을 역임했다.[61] 제2차 및 제3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1894–1896, 1898)과 제2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며 교육 과정의 질을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61]
1900년 이토가 리켄 세이유카이를 창당하자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61] 같은 해 8월 추밀원 의장이 되었고, 1903년 리켄 세이유카이 총재가 되었다.[61]
1906년 1월 7일부터 1908년 7월 14일까지, 그리고 1911년 8월 30일부터 1912년 12월 21일까지 두 차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61] 이 시기는 사이온지와 가쓰라 다로가 번갈아 정권을 담당하여 "가쓰라-사이온지 시대"로 불렸다.[61]
사이온지의 두 내각은 모두 보수주의자이자 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의 긴장 관계가 특징이었다.[61] 사이온지와 이토는 정당을 정부 운영의 유용한 부분으로 여겼지만, 야마가타는 정당과 민주적 제도를 부패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61]
사이온지는 국가 예산 문제와 육군의 확장 요구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61] 첫 번째 내각은 1908년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에 대한 정부 탄압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 야마가타 등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무너졌다.[61]
두 번째 내각 붕괴는 다이쇼 정국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군 예산 논쟁에서 비롯되었다.[61] 육군 대신 우에하라 장군이 내각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아 사임했고, 야마가타의 지시로 후임 육군 대신을 찾지 못해 내각이 사임하게 되었다.[61] 이는 육군이 내각 사임을 강요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61]
사이온지는 천황을 보호해야 하며 정치에 직접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61] 이는 국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그들은 천황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원했다.[61]
2. 4. 1. 제1차 호헌 운동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여당 정우회가 중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여 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1913년 예산안에서 육군의 2개 사단 증설 요구와 해군의 전함 3척 건조 요구에 직면했다. 육군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증설을 달성하려 했고, 내각이 거부하자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9]이는 각료가 수상을 거치지 않고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또한, 육군은 후임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아 사이온지 내각은 육군대신 없이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로 인해 육군대신의 사임은 내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9]
사이온지는 다이쇼 천황에게 불려가 육군대신의 사표 제출을 알게 되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후임 육군대신에 대해 상담했지만, 야마가타가 후임 육군대신을 추천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총사직했다.[9]
정우회를 통해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벌족 타파와 헌정 옹호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등과 제휴하여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하라 다카시,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가 중심이 되었다.[9]
의회는 정우회가 다수였기에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가쓰라 내각을 압박했다. 벌족 측은 영국의 조지 5세의 사례를 들어 다이쇼 천황의 칙어로 정쟁 중지를 설득하려 했다.[9]
정우회는 천황의 의사에 따라 불신임안을 철회하려 했으나, 오자키 유키오의 반발과 이누카이 쓰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하고, 정우회는 내각 퇴진을 요구했다. 이때 야마모토 곤베에가 정우회 본부를 방문했다.[9]
제1차 호헌 운동으로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에 총사직했고, 후임 수상 결정을 위한 원로 회의가 열렸다. 사이온지는 원로로서 회의에 참석했지만 정우회 대표는 아니었다. 회의에서 사이온지가 후계 수상으로 추천되었지만 칙어에 반한다며 사양했고, 결국 야마모토 곤베에가 후계 수상으로 결정되었다.[9]
2. 5. 원로로서의 역할
1912년 사이온지는 원로로 임명되었다.[3] 당시 원로의 역할은 줄어들고 있었지만, 주요 기능은 총리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총리 후보를 천황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추천하는 것이었지만, 천황이 그들의 조언을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24년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사망한 이후, 사이온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원로였다. 그는 1940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총리를 지명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사이온지는 할 수 있을 때마다 의회의 다수당 대표를 총리로 선택했지만, 그의 권력은 항상 육군과 해군의 묵시적인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그는 효과적인 정부를 구성할 만큼 강력할 수 있을 때만 정치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군인과 무소속 정치인을 지명했다.다이쇼 천황 즉위 후 원로 반열에 올랐으며, 마쓰카타 마사요시 사후에는 '마지막 원로'로서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총리 추천 과정에 깊이 관여하며, 중의원 다수당 대표를 총리로 추천하는 '헌정의 상도'를 확립하려 노력했다. 쇼와 천황에게 특별 칙어를 받아 내각총리대신 주천의 직무를 맡는 것이 확립되었다.
2·26 사건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혐오감을 받았으며, 암살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반란 소식을 들은 사이온지는 차를 타고 도망쳤지만, 그와 일행은 그를 살해하려는 군인들이 타고 있다고 생각되는 의심스러운 차량에게 오랫동안 추격을 당했다. 실제로는 신문 기자들이 타고 있었다.
정치학자 케네스 콜그로브는 1936년에 사이온지가 일본 정치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썼다.[3]
2. 6. 쇼와 시대
1926년 쇼와 천황이 즉위한 후에도 사이온지는 유일한 원로로서 내각총리대신 지명에 계속 관여했다.[3] 1936년 2·26 사건 당시, 사이온지는 군부 측 인사들에게 암살 대상으로 지목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사이온지는 도쿄와 시즈오카현의 별장들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원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성립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삼국 군사동맹 성립 2개월 후 사망했다. 고노에를 수상으로 추천한 것을 후회하며 "도대체 어디로 나라를 끌고 가는 것이냐"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3]
1941년 고노에 내각에서 활동하던 손자 기미카즈가 조르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사이온지는 일본 군국주의에 혐오감을 느꼈으며, 2·26 사건 당시 암살 대상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히로히토 천황의 가장 진보적인 조언자 중 한 명으로, 영국 및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중시했다. 그러나 삼국 동맹을 막지 못하는 등, 현실적인 한계에 직면하기도 했다.
1939년(쇼와 14년) 2월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는 여러 차례 몸 상태가 악화되었고, 1940년(쇼와 15년) 여름에는 연례 행사였던 고텐바 별장으로의 피서도 가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감지하고, 친한 사람들에게 유품으로 금전을 보냈다. 7월 16일에 요나이 내각이 붕괴되고, 후임으로 고노에 후미마로가 추천되는 움직임이 있었다. 7월 17일에 사이온지의 집을 내각 비서관장 이시와타 소타로가 방문하여 동의를 구했지만, 사이온지는 "이 봉답만은 사양하고 싶다"라며 봉답을 거절했다. 그는 "요즘 같은 때에 인기만으로 정치를 하려고 하다니,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자는 안 돼", "멈춰서서 할 만한 결심이 있는가"라며 고노에의 자질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반대했던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이 성립되자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 투성이로,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다"라고 한탄했다.
11월, 사이온지는 신우신염을 앓았고, 그것 자체는 완치되었지만 11월 24일 오후 9시 54분에 쇠약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향년 92세(만 90세). 증 종1위. "나는 죽어도 승려나 신관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라며 국장도 사퇴하고 싶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히비야 공원에서 웅대한 국장이 거행되었다.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같은 날 공개된 좌어장에도 8000명의 참관자가 방문했다. 묘소는 다마 영원에 마련되었으며, 도고 헤이하치로와 마주 보도록 세워져 있다.
3. 사이온지와 교육
사이온지 긴모치는 문부대신 시절, 교양 있는 시민 육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과학, 영어, 여성 교육을 중시하라"고 강조했다.[1] 또한, "인민이 모두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존경하고, 스스로 생존하는 동시에 타인을 생존하게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며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90년 이노우에 고와시 등이 만든 교육칙어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교육 방침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제2차 교육칙어 작성을 건의했다. 이 초안에는 "충효"나 "애국"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여성을 포함한 일본 신민이 다른 나라 국민들과 대등하게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이온지가 병에 걸리고,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교육칙어의 존엄성을 해친다며 반대하여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초안만 남았다. 이 "제2차 교육칙어" 초안은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3. 1. 교육기관 설립 관여
1869년 교토 고쇼 내 사저에 사숙 '리쓰메이칸'을 창설했다.[3]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공경 가숙과 마찬가지로, 한학자 등을 초빙했으나, '사숙 리쓰메이칸'은 다른 공가 가숙과는 달리 일반적인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3] 숙생으로는 사이온지 문객·가신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원방에서부터 모여들었고, 숙은 차츰 내외의 시사 문제를 논의하는 장이 되었다.[3] 여러 번에서 모여드는 젊은 숙생 중에는 지방 향사 출신도 많았으며, 기록에 따르면 사이온지의 측근이자 훗날 리쓰메이칸 대학 창립자인 나카가와 고주로의 고향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3] 그러나 숙은 그 모습에 불안한 분위기를 느낀 교토부청 (태정관 유수관)의 차류 명령에 의해 1년도 안 되어 폐쇄되었다.[3] 1870년의 일이었다.[3]사이온지는 사숙 리쓰메이칸 폐쇄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재흥을 맹세했다.[3] 그 후를 이은 것은 보신 전쟁 이래 사이온지의 가신으로 섬긴 단바 국 향사 나카가와 고주로였다.[3] 나카가와는 사이온지의 문부대신 및 총리대신 당시 공설 비서였으며, 그 후에도 종신토록 사이온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3] 현재의 리쓰메이칸 대학은 나카가와가 1900년에 창설한 교토 법정 학교가 '사숙 리쓰메이칸'의 명맥을 이어받아 발전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사이온지의 사숙과 학교 조직으로서의 연속성은 없다.[3]
하지만 사이온지는 나카가와가 창설한 교토 법정 학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3] 교토 법정 학교 학원 간사에는 사이온지의 친동생 스에히로 다케마로가 취임했고, 친동생 스미토모 도모즈미가 학원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사이온지는 자신의 정치력과 인맥을 활용하여 협력했다.[3] 사이온지가 기부한 다수의 서적은 리쓰메이칸 대학 (구제 대학)이 대학령에 따른 승격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현재도 '사이온지 문고'로서 귀중한 컬렉션으로 보존되어 있다.[3] 이 외에도 사이온지 자신 및 사이온지 가문에서 학원에 보낸 기증품(교지 기념 식수 등 포함)은 수백 점에 달하며, 일부는 리쓰메이칸 학원이 '학보'로서 관리하고 있다.[3]
사이온지는 사이온지 가문 가문인 '왼쪽 세 갈래 동심원'을 리쓰메이칸 학원이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종전까지 이것을 염색한 깃발이 실제로 학원에서 사용되었다.[3] 나카가와가 '릿메이칸' 명칭과 정신의 계승을 사이온지에게 신청했을 때 사이온지는 매우 기뻐하며, 직접 휘호한 『릿메이칸과 유래』 대액자를 주었다.[3] 훗날 사이온지는 '내가 건설한 릿메이칸의 명칭과 정신을 계승한 귀교'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릿메이칸이 부활하여 계승되고 있음을 기뻐했다.[3] 1932년 83세가 된 사이온지는 마지막 교토 방문 때 리쓰메이칸 대학 히로코지 교지를 방문했고, 9월 22일 아침 교사 홀에 장식된 자필 『릿메이칸』 편액을 보고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고 전해진다.[3] 훗날 릿메이칸 대학 기념식전에 참석한 사이온지 히로오(사이온지 긴모치의 증손)는 이 편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3]
이 편액의 오리지널은 학교법인 리쓰메이칸 총장실에 걸려 있으며,[3] 학교법인 리쓰메이칸 '나카가와 회관'(교토시 나카교구) 현관에도 걸려 있다.[3]
그 외에도 캠퍼스 내에는 사이온지와 관련된 물건들이 남아 있다.[3] 릿메이칸 대학 이카라시 캠퍼스 내에는 1935년 사이온지가 기증한 치자나무·남천이 심어져 있고,[3] 릿메이칸 대학 사이온지 기념관 정원에는 사이온지의 도쿄 스루가다이 본저택에 놓여 있었다가 릿메이칸에 기증된 석등롱이 설치되어 있다.[3]
1940년 사이온지 서거 후, 리쓰메이칸 대학은 창립과 교육에 크게 공헌한 사이온지 긴모치를 '학조'로 하는 법인 결의를 했다.[3] 사이온지 가문과 리쓰메이칸 대학의 교류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으며, 대학 행사에 사이온지 가문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다.[3]
1894년 문부대신에 취임한 사이온지 긴모치는 "고등 교육 확장 계획"을 입안했다.[4] 도쿄 제국대학과 상호 호응하여 국가 수요에 부응할 고등 교육 기관을 교토에도 설치할 필요성을 언급했다.[4] 이를 바탕으로 문부성 내 교토 제국대학 "창립 준비 위원"이 1897년 "교토 제국대학에 관한 건"(대학 설치령)을 공포하여 교토대 창설이 확정되었다.[4] 당시 문부성 전문 학무국 근무 및 문부대신 비서관으로 사이온지 직속이었던 나카가와 고주로가 교토 제국대학 초대 사무국장에 임명되어 대학 업무를 총괄했다.[4] 건학 초부터 "자유로운 학풍"을 학설로 삼은 교토 대학은, 사이온지와 나카가와가 학문 정신으로 내세운 "자유"를 공통 이념으로 하는 리쓰메이칸 대학과 2007년 학술 교류 및 산학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4]
1881년 프랑스 유학 중 사이온지와 동료였던 기시모토 다쓰오, 미야기 고조, 야시로 미사오 등이 창설한 메이지 법률 학교(메이지 대학 전신) 강사로 초빙되어 행정법 강의를 담당하고 법론회 회장도 맡았다.[26] 동양자유신문 사장 사임 후에도 잠시 강의를 이어갔고, 이듬해 3월 이토 히로부미 수행원으로 유럽에 건너갈 때 그만두었다.[27]。그 후 메이지대 관련 행사(창립 30주년 기념식 등)에 종종 모습을 보였고, 만년에도 명예 교수 직함[28]을 유지했다.
메이지 법률 학교가 발행한 『명법 잡지』 제1호에서는 창설자 중 한 명으로 다루어지고, 메이지 법률 학교 설립 취지에 기시모토 등과 연명되어 있으며, 『20세기 일본인 명사전』, 『신정 정치인 명사전』 등에 메이지 대학 창립자로 기재되어 있지만, 메이지 대학 공식 사이트에는 창립자로 게재되어 있지 않다.[29] 메이지 대학 교수의 논문이 게재된 대학사 출판물에서도 창립자가 아닌 공로자, 협력자로 다루고 있다.[30]。
1901년 여자대학 설립을 돕기 위해 나카가와 고주로 저택을 자주 방문했던 나루세 진조를 후원하여 일본여자대학교 설립 발기인, 창립 위원에 취임했다.[5] 나카가와를 일본여자대학교 창립 사무 간사 촉탁으로 임명했다.[5]
4. 정치 사상 및 평가
사이온지 긴모치는 보신 전쟁에서 관군의 산인도 진무 총독을 맡았으며, 프랑스 유학 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 되었다. 제2차 이토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여 외무대신을 겸임했으며, 제3차 이토 내각에서도 문부대신을 지냈다. 제4차 이토 내각에서는 무임소 대신으로 입각하여, 내각총리대신의 병 치료 중에는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고, 이후 이토가 사임하자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을 맡았다.[3]
1903년에는 이토의 뒤를 이어 입헌정우회 총재에 취임했으며, 1906년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어 제1차 사이온지 내각,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을 조직했다. 이 시대는 사이온지와 가쓰라 다로가 번갈아 정권을 담당했기 때문에 "가쓰라-사이온지 시대"라고 불렸다.
1912년 12월에 원로로 임명되었으며,[3] 1924년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사망한 후에는 "마지막 원로"로서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을 보필하며, 총리 선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 대표단을 이끌었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그의 역할은 주로 상징적이었다. 협상 과정에서 사이온지는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조항"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지만, 인종 차별을 시행하고 있던 미국과 호주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4]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혐오감을 받았으며, 2·26 사건 쿠데타 시도에서 암살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사이온지는 일본 제국 육군이 정치 문제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히로히토 천황의 가장 진보적인 조언자 중 한 명이었으며, 영국 및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선호했다. 그러나 그는 신중하게 싸움을 골랐고,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패배를 인정했다 (예: 삼국 동맹을 막지 못한 것).
정치학자 케네스 콜그로브는 1936년에 사이온지가 일본 정치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평가했다.[3]
사이온지 긴모치는 총명하고 국제적인 시야를 지녔으며, 학식이 깊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민주주의를 지지했지만, 대중의 열광에는 비판적이었다.
프랑스 유학의 영향으로 친구미적이었고, 군부 등으로부터 국가주의에 반하는 "세계주의자"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하라 다카시 일기』에는 사이온지가 권력에 대한 집착이 부족하고 정치적 수완이 없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토 나오오 등은 원숙한 정치적 수완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사이온지는 냉담하고 사물에 담백하다는 이미지를 가졌지만, 이는 중립적인 인물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의도한 것이었다. 궁중·재계와의 인척 관계를 배경으로 사이온지는 원로로서 궁중과 국무, 군부의 조정 역할을 맡아 일본 정치를 이끌었다.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교육 칙어 개정을 시도하는 등 쇼와 초기의 국가주의적 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군부의 세력 확장에 저항했으나 전쟁 회피에는 역부족이었다.
리츠메이칸 대학에 기증한 편액에 "후지와라 기미모치"라고 사이온지 가문의 본성으로 이름을 기록한 것처럼, 후지와라씨의 후예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릴 적부터 황실과 친숙했던 점도 있어, "황실의 울타리"라는 의식이 강했고, 그것이 정치 자세가 되었다.
하라 다카시는 사이온지를 정우회 총재 및 총리로서 수완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원로 시대의 사이온지는 다나카 기이치 내각 붕괴 시의 오가와 테츠 상(小川鉄相)에 대한 태도와 같이, 각 파벌 간의 균형을 잡고 중립적인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했다.
무쓰 무네미쓰는 "천하제일의 고상한 인물"이라고 평했고, 정략을 가지고 배짱도 두둑하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휘두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하라 다카시는 『하라 다카시 일기』에서 세이유카이 총재 시절의 사이온지를 "의지가 의외로 강고하지 않고, 또한 주의가 소홀하여 종종 실수가 있다"고 비판했다.
가쓰 가이슈는 1898년 10월 23일의 좌담에서 "사이온지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네. 아, 그래, 영리한 분이지"라고 답했다.[34]
4. 1. 자유주의적 성향
사이온지 긴모치는 프랑스 유학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는 중의원 다수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의 상도'를 중시했다.[3] 또, 프랑스 유학의 영향으로 친유럽적인 성향을 보여, 군부 등으로부터 국가주의에 반하는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사이온지는 천황의 친정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천황이기에 오류가 용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장쭤린 폭살 사건에 대한 상주의 불일치로 쇼와 천황에게 질책받아 총사직했을 때, 사이온지는 천황에게 누를 끼친다는 이유로 천황의 질책에 반대했다. 그는 입헌군주제 하에서 신하의 결정에 천황이 반대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으며, 이는 쇼와 천황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견해는 황도파 장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4. 2. 국제 협조 외교
사이온지 긴모치는 프랑스 유학의 영향으로 친유럽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국제 협조 외교를 중시했다.[4] 그는 "세계의 대세"를 입버릇처럼 말하며, "동양의 맹주인 일본"과 같은 좁은 관점이 아닌 "세계의 일본"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쓰 무네미쓰와의 교류를 통해 이러한 외교 사상을 더욱 굳혔다.사이온지는 청일 전쟁 이후 대두된 과도한 일본 중심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꼈다.[56] 그는 타국의 민족주의를 존중하면서도, 국민이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힘을 합치는 건전한 민족주의를 지향했다.[39]
국제 관계에 있어서는 영국 및 미국과의 협조를 중시했으며,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함께 해도 일본의 진전은 없다"고 단언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 대표단을 이끌었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그의 역할은 주로 상징적인 것에 그쳤다.[4] 협상 과정에서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조항"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지만, 인종 차별을 시행하고 있던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강력한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4]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 개최 당시, 사이온지는 조약 성립을 위해 조건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하마구치 오사치 수상과 궁중 그룹에 그 의견을 전달했다. 추밀원이 조약 비준에 반대 의사를 보이자, 내각이 추밀원 의장과 부의장을 해임해도 좋다고 격려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사이온지의 국제 협조 외교는 열강과의 관계 개선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이나 주변국과의 평화로운 관계 구축에는 소홀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4. 3. 한계
사이온지 긴모치는 헌정의 상도를 중시하여 중의원 다수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것을 관례로 여겼다. 프랑스 유학의 영향으로 친유럽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군부 등으로부터 국가주의에 반하는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후 일본 정계에서 가장 큰 정치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궁중, 국무, 군부 사이의 조정 역할을 맡아 정계를 이끌었다.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교육칙어 개정을 시도하는 등 국가주의적 정치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고, 군부의 세력 확장에 저항했으나, 전쟁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3]한국의 관점: 사이온지 긴모치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가로서, 대한제국 병합과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그가 자유주의적 사상과 국제 협조 외교를 추구했더라도, 식민지배의 역사적 과오를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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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4019号「叙任及辞令」
1896-11-19
[63]
NDLDC
『官報』第7299号「叙任及辞令」
2950645/3
1907-10-26
[64]
NDLDC
『官報』第7303号「叙任及辞令」
2950649/5
1907-10-31
[65]
서적
文藝春秋
文藝春秋
1990
[66]
뉴스
朝日新聞
1941-01-18
[67]
신문기사
故西園寺公国葬
0100297198
1940-12-06
[68]
문서
공가 중에서는 섭관가 다음의 서열로 태정대신을 맡을 수 있는 가문을 말한다.
[69]
문서
후지와라노 사네스에(藤原実季)의 장남
[70]
문서
천황의 거처
[71]
문서
187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에 걸쳐 참정권, 자치권의 성립 , 헌법 제정, 국회 개설 등을 이끌어낸 국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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