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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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간토 지방 남부를 진원으로 발생한 대규모 지진이다. 지진으로 인해 도쿄와 가나가와 현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최대 10m 높이의 쓰나미와 화재가 잇따랐다. 지진 이후 일본 정부는 수도 이전 논의를 중단하고 도쿄를 재건했으나, 재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반정부 인사와 재일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간토 대지진
지도 및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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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파괴된 아사쿠사의 료운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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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간토 대지진 진도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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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파괴된 아사쿠사의 료운카쿠
기본 정보
이름간토 대지진
현지 이름간토다이지신/関東大地震일본어
칸토다이신사이/関東大震災일본어
발생 날짜1923년 9월 1일
발생 시간오전 11시 58분 32초 일본 표준시
지속 시간48초 (첫 지진만), 4분, 혹은 10분 이상
진앙지야마나시현 동부, 가나가와현 서부 또는 사가미 만
깊이23 km
지진 유형해구형지진, 주향이동단층 성분을 포함한 충상단층
단층사가미 해곡
지진 규모
모멘트 규모7.9 - 8.2 Mw
일본 기상청 규모7.9
표면파 규모8.2 - 8.3 Ms
최대 진도7 진도 (추정)
최대 진도 지역도쿄부, 가나가와현, 지바현 보소 반도 등 (추정)
최대 지반 가속도~ 0.41g (추정) ~400 gal (추정)
쓰나미
최대 높이시즈오카현 아타미시에서 최대 12 m
피해
사망자105,385 - 142,800명
피해액약 45억 엔 (현재 가치 약 18조 엔)
산사태네부카와 부근에서 대규모 산사태 발생 (네부카와역 열차 전락 사고)
여진
규모 M7 이상 여진6회
관련 정보
영향 지역간토 지방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등
재해 방지의 날방재의 날 제정의 계기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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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진 발생

1923년 (다이쇼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32초, 간토 지방 남부를 진원으로 하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지진학자인 이시모토 미시오는 도쿄 혼고구의 가속도가 대략 300gal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도쿄, 요코하마의 야마노테에서 최대 가속도의 주기가 0.3초 정도였다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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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진의 흔들림은 진원에서 약 9,000km 떨어진 오스트리아 기상청에도 관측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기상청 측에서 재빨리 간토 대지진의 발생을 알렸다.

동고라 호(SS Dongola) 선장은 요코하마 내항에 정박해 있던 중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오전 11시 55분,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안 쪽을 바라보니 끔찍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었고, 건물들이 사방으로 무너져 내렸으며, 몇 분 만에 먼지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먼지가 가라앉자 여러 방향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30분 만에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이 지진은 도쿄, 항구 도시 요코하마, 그리고 주변의 지바현,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등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간토 지방 전역에 광범위한 피해를 야기했다. 지진의 규모는 매우 커서 진앙에서 60km가 넘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에서는 무게 약 121톤의 대불이 약 60cm나 이동했다.

지각변동을 통한 추정으로는 진원단층이 쇼난 지역 내륙 안쪽까지 있다고 추정되며, 지진의 진동은 오다와라 지역이 제일 심했다. 도쿄도에서 진도6을 관측했으나 이 간토 대지진을 마지막으로 2000년 미야케섬 화산 분화로 인한 지진을 제외하고는 도쿄도에서 진도6 이상을 지진을 관측한 적이 없다.

2.1. 지진의 원인과 특징

간토 대지진은 필리핀해판북아메리카판 아래로 섭입하면서 발생한 전형적인 해구형 지진으로, 진원 단층은 사가미 해곡을 따라 형성되었다. 1971년 가나모리 히로는 간토 대지진이 미우라반도 연장선 방향의 사가미 해곡을 따라 발생한 주향이동성 저각 역단층 지진이라고 추정했다. 1996년 다케무라 마사유키는 P파 초동분포를 분석하여 가나모리의 주장처럼 필리핀해판의 섭입 방향으로 추정되는 북북동 방향으로 34도 정도 경사진 경사면이 단층면으로 추정되며, 주향이동 성분이 많다고 보았으나, 다른 가설들도 많아 확실하지는 않다.

일본 지진조사위원회는 필리핀해판의 섭입으로 인해 북아메리카판이 튕겨져 올라가면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간토 대지진이 판 내부에서 발생한 지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각 변동을 통한 추정에 따르면, 진원 단층은 쇼난 지역 내륙 깊숙이까지 뻗어 있으며, 오다와라 지역에서 가장 강한 진동이 관측되었다.

간토 대지진의 진앙은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주요 설은 다음과 같다.

각 연구자에 의한 주요 추정 진앙 위치
각 연구자에 의한 주요 추정 진앙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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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진앙 위치비고
이마무라 아키쓰네(1924)사가미만 거의 중앙부
허버트 터너(1927)사가미만 거의 중앙부
우쓰 도쿠지(1979)사가미만 거의 중앙부(진원역의 중심)
마쓰자와 다케오(1928)사가미만 북부
베노 구텐베르크, 찰스 릭터(1954)사가미만 북부
우사미 타쓰오(1966)사가미만 북부
히라노 레스케(1924)야마나시현 가와구치호 동쪽 4km
가나모리 히로, 미야무라 셋조(1970)±15km가나가와현 서부
하마다 노부오(1986)가나가와현 서부, 진원 깊이 최소 25km 이상
이과연표(2015)가나가와현 서부
일본 기상청


가나모리와 미야무라는 진원 깊이를 0-10km로 추정하였으나, 하마다는 진원단층이 지표상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진원 깊이가 10km 미만일 수는 없으며 최소 25km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의 단층 모델은 여러 연구자들이 제시하였으며, 모두 우수향 저각 역단층을 주요 단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관측 데이터 부족과 다중 진원으로 추정되어, 이 지진의 실상은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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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방향경사각미끄럼각길이(km)폭(km)미끄럼량(m)
가네모리(1971)290°34°162°130702.1
Ando(1971)315°45°153°130656.7
Ando(1974)315°30°153°85556.7
이시바시(1980)325°, 325°, 195°, 195°45°, 35°, 30°, 30°160°, 160°, 60°, 60°40, 45, 15, 1540, 60, 30, 157.0, 7.0, 6.0, 4.0
Matsu'ura(1980)294°25°140°95544.8

2.2. 진앙과 규모

1923년(다이쇼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32초에 간토 지방 남부를 진원으로 발생한 지진이다. 이시모토 미시오는 도쿄 혼고구의 가속도가 대략 300gal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진의 흔들림은 진원에서 약 9,000km 떨어진 오스트리아 기상청에도 관측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기상청 측에서 재빨리 간토 대지진의 발생을 알렸다.

각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간토 대지진의 진앙 위치
각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간토 대지진의 진앙 위치


간토 대지진의 진앙은 연구자마다 견해가 전부 다르다. 주된 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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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앙 위치주장한 학자지도 표기
사가미만 거의 중앙부이마무라 아키쓰네(1924년)Im
사가미만 거의 중앙부허버트 터너(1927년)Tu
사가미만 거의 중앙부우쓰토 구지(1979년)Ut
사가미만 북부마쓰자와 다케오(1928년)Ma
사가미만 북부베노 구텐베르크-찰스 릭터(1954년)Gu
사가미만 북부우사미 다쓰오(1966년)Us
야마나시현 가와구치호 동쪽 4km히라노 레스케(1924년)Hi
가나가와현 서부가나모리 히로, 미야무라 셋조(1970년)Ka
가나가와현 서부하마다 노부오(1986년)Ha
가나가와현 서부2015년 이과연표 기준


가나모리와 미야무라는 진원 깊이를 대략 0-10km로 추정하였으나, 하마다는 진원단층이 지표상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진원 깊이가 10km 미만일 수는 없으며 최소 25km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1951년 가와즈미 히로시는 간토 대지진의 규모를 M7.9로 추정했는데, 도쿄에서 진도가 대략 진도6이라고 했을 때 진앙과의 거리가 100km라고 가정해 계산한 값이었다. 1964년 쓰보이도 규모는 대략 M7.9라고 추정했으나, 일본 국외 지역의 지진파형을 이용해 분석하면 규모 M8 이상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으며, 표면파 규모는 대략 Ms8.2에서 Ms8.3까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다케무라 마사유키, 이케무라 도모노리, 노자와 히로시(1999-2000)는 아키타, 센다이, 나가사키 등 7개 지역의 이마무라식 강진지진계 기록 데이터를 바탕으로 규모를 Mj8.1±0.2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원래 사용하였던 규모 M7.9도 오차 범위 안에 있으므로 타당한 값이라고 결론내렸다.

1977년 가나모리 히로는 모멘트 규모를 Mw7.9로, 2011년 나메가야는 Mw8.0으로 추정했다. 일본 중앙방재회의 수도직하지진모델 검토회에서는 간토 대지진의 모멘트 규모를 Mw8.2로 추정하였으며 이 규모가 지각 변동이나 쓰나미 높이를 잘 재현하였다고 발표하였다.

2.3. 단층 모델

1971년 가나모리 히로는 간토 대지진이 미우라반도 연장선 방향의 사가미 해곡 주축에 평행한 우향 낮은 섭입 각도의 역단층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추정했다. 1996년 다케무라 마사유키도 P파의 초동분포를 통해 진원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가나모리의 주장처럼 필리핀해판의 섭입 방향으로 추정되는 북동동 방향으로 34도 정도 경사진 경사면이 단층면으로 추정되며 옆으로 어긋난 성분이 많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다른 가설들도 많아 확정적이지는 않다.

간토 대지진의 주요 학자들의 단층 모델.
간토 대지진의 주요 학자들의 단층 모델.


간토 대지진의 단층 모델은 여러 학자들이 가설을 제시했지만, 이들 가설 모두 우향으로 어긋난 낮은 섭입각의 역단층이 주성분이다. 하지만 관측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 확정적인 단층 모델은 아직 없으며, 진원 또한 여러 곳으로 추정되지만 데이터 부족으로 지진 발생 메커니즘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단층 모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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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주향경사각미끄럼각길이 (km)폭 (km)미끄러진 길이 (m)
가나모리 (1971)290°34°162°130702.1
안도 (1971)315°45°153°130656.7
안도 (1974)315°30°153°85556.7
이시바시 (1980)325°45°160°40407.0
325°35°160°45607.0
195°30°60°15306.0
195°30°60°15154.0
마쓰우라 (1980)294°25°140°95544.8 (외 1개 모델)

2.4. 다원 지진

간토 대지진은 여러 개의 진원에서 발생한 지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다원 지진으로 추정된다. 1929년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지진파형 분석을 통해 간토 대지진이 사가미만 중앙, 단자와 산지 방면, 사가미만 오다와라 앞바다에서 발생한 3개의 지진이 합쳐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5년 다케무라 등은 이마무라식 2배 강진계 분석과 체험담을 바탕으로, 간토 대지진에서 특히 강한 흔들림을 발생시킨 것은 파괴 개시 후 수 초 후에 발생한 오다와라- 하다노 직하의 암반 파괴(제1 이벤트/제1진)와 그 약 10~15초 후에 시작된 미우라반도 직하의 파괴(제2 이벤트/제2진)이며, 다중 진원 지진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진원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지진계 바늘이 꺾여 정확한 흔들림의 양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체험담을 바탕으로 흔들림의 대략적인 양상을 추정한 것이다.

제1 이벤트에 가까운 오다와라에서는 흔들림이 시작되자마자 상하 수평의 강한 흔들림이 덮쳐오고 10~20초 정도 약해진 후 다시 강한 수평 운동이 덮쳐왔다. 제2 이벤트에 가까운 가마쿠라후지사와에서는 처음 흔들림은 약했지만, 얼마 후 강한 흔들림이 덮쳐왔다고 한다. 도쿄에서도 주요 동요 중에 진동 방향이 남북에서 동서로 변했다는 체험담이 있다. 이 두 이벤트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쌍둥이 지진"이나 "두 개의 지진의 조합"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5. 각 지역의 진도

일본 중앙기상대(현 일본 기상청)의 관측 기록에 따르면, 도쿄부에서 진도 6이 관측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진도7이라는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최고 등급인 진도 6으로 측정된 것이며, 피해 상황을 토대로 볼 때 오다와라사가미만 연안과 보소반도 남부에서는 진도 7급의 진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도쿄시 내에서도 스나초(현재 고토구)나 하네다(현재 오타구) 등 도쿄만 연안 지역과 미카와시마(현재 아라카와구) 등 내륙 일부 지역에서 진도 7급의 진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토 대지진의 일본 각지 진도
간토 대지진의 일본 각지 진도


다음은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각지에서 관측된 진도이다.

{| class="wikitable"
|-
! style="width:2em" | 진도
! 관측된 지역
|-
! style="" | 6
| 구마가야, 도미사토, 도쿄 지요다 오테마치, 요코스카, [[고

3. 전조

1905년 도쿄제국대학 교수 오모리 후사키치이마무라 아키쓰네 사이에 지진 예측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사가미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오모리 후사키치는 소규모 지진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면 지진응력이 해소되어 오히려 지진 위험성이 줄어든다는 가설을 주장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발생으로 오모리의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간토 대지진 발생 이전 가까운 시기에 지진 활동이 활발해 졌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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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내용
1915년(다이쇼 4년) 11월도쿄에서 유감 지진이 과거 최다인 18회 발생. 그 후 지진은 잠잠해짐.
1921년이바라키현 남부에서 규모 7.0의 지진 발생. 류가사키 지진으로도 불림.
1922년우라가 수도에서 규모 6.8의 지진 발생, 25명 사상.
1923년 5~6월이바라키현 동쪽에서 200~300회의 군발지진 발생(유감 지진은 미토 73회, 조시 64회, 도쿄 17회)

3.1. 오모리-이마무라 논쟁

1905년, 도쿄제국대학 교수 오모리 후사키치이마무라 아키쓰네 사이에 지진 예측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마무라 교수는 태양에 사가미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도쿄 전역이 대지진과 화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마무라의 예측은 명확한 근거가 없었고, 선정적인 보도로 인해 다른 학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특히, 세계적인 지진학자였던 오모리 교수는 이 예측을 강하게 비판했다.

오모리 교수는 소규모 지진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면 단층의 지진응력이 해소되어 오히려 지진 위험성이 줄어든다는 가설을 주장했다. 그는 1921년 말(M6.4-7.0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1922년 중반(M6.8 가나가와현 동부 지진), 1923년 초(M6 이바라키현 해역 지진)에 주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근거로 도쿄 지역의 대지진 위험성이 해소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3년 간토 대지진 발생으로 오모리의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3.2. 전진

* 8년 전
1915년(다이쇼 4년) 11월, 도쿄에서 유감 지진이 과거 최다인 18회 발생.
그 후 지진은 잠잠해짐.
오모리 후사키치·이마무라 아키쓰네 두 박사의 간토 대지진 논쟁.
* 1~2년 전
1921년 - 이바라키현 남부에서 규모 7.0의 지진 발생. 류가사키 지진으로도 불림.
1922년 - 우라가 수도에서 규모 6.8의 지진 발생, 25명 사상.
* 2~3개월 전
1923년 5~6월, 이바라키현 동쪽에서 200~300회의 군발지진 발생(유감 지진은 미토 73회, 조시 64회, 도쿄 17회)

4. 여진

지진 직후 큰 규모의 여진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아래는 규모 M6.0 이상이거나 최대진도 4 이상을 기록한 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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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진원지규모최대 진도비고
9월 1일 12시 0분누마즈 측후소불명5
9월 1일 12시 1분도쿄만 북부M7.2도쿄 23구 및 가나가와현 동부 요코하마-가와사키 지역에서 매우 강한 흔들림을 느낌.
9월 1일 12시 3분가나가와현-야마나시현-시즈오카현 경계 지역M7.3가나가와현 서부, 시즈오카현 동부, 야마나시현에서 매우 강한 흔들림을 느낌.
9월 1일 12시 7분이즈오섬 근해M6.03
9월 1일 12시 11분사이타마현 북부 구마가야시불명4
9월 1일 12시 11분이즈오섬 근해M5.65
9월 1일 12시 17분이즈오섬 근해M6.45
9월 1일 12시 23분사가미만M6.55
9월 1일 12시 36분이바라키현 남부M6.03
9월 1일 12시 40분사가미만M6.53
9월 1일 12시 47분야마나시현 중서부M6.85
9월 1일 13시 13분지바현 동남쪽 해역M6.23
9월 1일 13시 20분이즈오섬 근해M6.25
9월 1일 13시 31분시즈오카현 동부M6.15
9월 1일 14시 22분시즈오카현 이즈 지방M6.65
9월 1일 15시 19분이바라키현 해역M6.33
9월 1일 16시 37분시즈오카현 동부M6.65
9월 1일 17시 0분가나가와현 서부M4.35
9월 1일 22시 52분이즈오섬 근해M6.14
9월 2일 3시 4분야마나시현 고후시불명5
9월 2일 4시 13분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M4.65
9월 2일 11시 46분지바현 동남쪽 해역M7.35
9월 2일 18시 26분지바현 동쪽 해역M6.95
9월 2일 18시 48분지바현 동쪽 해역M6.34
9월 2일 22시 9분시즈오카현 이즈 지방M6.55
9월 2일 23시 16분가나가와현 서부M6.24
9월 8일 2시 32분이즈오섬 근해M6.12
9월 14일 15시 32분이바라키현 남부M5.25
9월 26일 17시 23분이즈오섬 근해M6.84
9월 26일 17시 26분누마즈 측후소불명4
10월 4일 0시 54분시즈오카현 동부M6.34
10월 4일 14시 5분사이타마현 구마가야시불명4
10월 5일 22시 5분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M6.23
10월 17일 3시 3분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M5.74
11월 5일 5시 45분도쿄 다마 지역 동부M6.34
1924년 1월 15일단자와 지진M7.319명 사망, 638명 부상

5. 쓰나미

지진 발생 후 수 분 만에 태평양 연안 혼슈 지역과 이즈 제도에 쓰나미가 덮쳤다.

5.1. 주요 지역 쓰나미 피해

* 아타미에서는 지진 발생 5-6분 후 물이 빠졌다가 곧바로 제1파가 덮쳤고, 5-6분 뒤에는 높이 7m~8m, 일부 지역은 12m에 달하는 제2파가 덮쳐 가옥 162채가 유실되고 9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해안에서 200m 안쪽까지 지반 높이 약 7m 정도가 침수되었다.
* 하쓰시마섬에서는 지진으로 섬이 융기하면서 마을에 쓰나미가 덮치지 않았다. 항구 부근에서는 쓰나미 높이가 약 1.8m였고, 섬 서부에서는 최대 3m를 기록했다.
* 이토에서는 높이 9m의 쓰나미가 덮쳐 해안에서 빈카이도 사이 마을이 거의 유실되었고, 우사미촌도 집 111채가 유실되었다. 시모다정에서는 높이 2.5m, 만 바깥쪽에서는 높이 4m의 쓰나미가 덮쳤다.
* 가마쿠라에서는 지진 직후 200m~300m 정도 바닷물이 빠졌다가 10분 후 제1파가 덮쳤고, 제2파가 가장 높았는데 자이모쿠자에서는 5m~6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쳤다.
* 보소반도에서는 평균 2m 정도의 쓰나미가 덮쳤고 3m 이상의 쓰나미가 덮친 곳은 적었지만, 아이하마에서는 9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쳐 주택 63채가 유실되었다. 다테야마 측후소 인근은 200m 안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최대 수심이 9m 정도에 달했고, 내습한 쓰나미 크기는 1.8m였다.
* 소토보 연안은 겐로쿠 지진 당시에는 평균 7m~10m의 쓰나미가 덮쳐 막대한 피해가 있었지만, 간토 대지진 때에는 평균 2m의 쓰나미가 덮쳤다.
* 도쿄만의 검조소 기록에서는 후카가와, 시바우라, 지바에서 1m 정도의 쓰나미를 관측했으며, 우치보 연안에서 도쿄만 안쪽으로 가는 쓰나미는 겐로쿠 지진 때보다 높이가 낮았다.

6. 지각 변동

간토 대지진으로 북아메리카판이 동남쪽 방향으로 필리핀해판 위에 올라타 보소반도 남쪽은 융기하였고 단자와 산지 등 내륙 지역은 침강하였다. 이 침강으로 단자와 산지 지역은 토석류 피해가 일어났다. 겐로쿠 지진 당시에도 지각 변동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으며, 특히 보소반도에서는 간토 대지진, 겐로쿠 지진 및 이전의 지진 시기 융기하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안단구 지형이 발달하였는데 겐로쿠 지진으로 만들어진 단구의 높이는 다른 곳보다도 훨씬 높다. 보소 반도 가운데 진원에 가까운 남쪽이나 사가미만에 접하는 미우라반도 전역, 사가미만 북부 연안(현재의 에노섬 지역)에서 지반의 융기가 컸고 도쿄부 미나미카쓰시카군에서 지반 침하가 컸다. 각 융기나 침하량은 일본 육지측량부 및 해군수로부의 측량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였다.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지각 변동 기록. 도쿄시가 편찬한 "THE RECONSTRUCTION OF TOKYO"의 기록이다. 빨간색이 짙을수록 융기량이 크고 파란색이 짙을수록 침강량이 크다.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지각 변동 기록. 도쿄시가 편찬한 "THE RECONSTRUCTION OF TOKYO"의 기록이다. 빨간색이 짙을수록 융기량이 크고 파란색이 짙을수록 침강량이 크다.


당시의 지각 변동 크기는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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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밀어서 보기
지역융기/침강융기/침강 높이
고코노에융기1.81m
호조융기1.57m
오이소융기1.81m
지가사키융기1.4m
하쓰시마섬융기1.8m
에노섬융기0.9m
구 히라이촌침강0.38m
스나마치침강0.27m
가메이도침강0.24m

7. 피해

지진 이후 화재가 일어난 지역(점)과 화재로 파괴된 지역을 그린 지도.
지진 이후 화재가 일어난 지역(점)과 화재로 파괴된 지역을 그린 지도.

제일소고빌딩 옥상에서 본 일본바시와 간다의 폐허
제일소고빌딩 옥상에서 본 일본바시와 간다의 폐허

불타는 마루노우치
불타는 마루노우치

간토 대지진은 가나가와현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 지바현, 시즈오카현 동부 등 간토 지방 전역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

점심 시간 즈음에 지진이 발생하여, 지진 직후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화재는 화염폭풍으로 발전하여 도시 전체를 휩쓸기도 했다.

도쿄, 요코하마 등 주요 도시와 주변 지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진앙에서 60km 이상 떨어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고토쿠인 대불(무게 약 121ton)은 60cm가량 이동할 정도로 지진의 규모가 컸다.

가나가와현 서부 산악 및 구릉 지역에서는 산사태로 약 800명이 사망하고, 오다와라 인근 네부카와 마을에서는 산사태로 마을 전체와 여객열차, 역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갔다.

지진과 거의 동시에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해안에서 발생한 태풍도쿄만에 강풍을 일으켜 화재 확산의 원인이 되었다.

다이쇼 천황과 정명황후는 도치기현 닛코에 머물고 있어 무사했다. 미국 대리 총영사 부부는 지진으로 사망했고, 영사관 기록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1960년, 일본 정부는 지진 발생 37주년을 맞아 9월 1일을 "재해 예방의 날"로 제정했다.

7.1. 인명 및 재산 피해

2004년 9월 가지마 고보리 보고서에 따르면,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총 사망자는 105,385명으로 추정되었다.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시간과 겹치면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 시내에 있는 리쿠군 혼조 히후쿠쇼(구 일본 육군의류창고)에서는 화염폭풍으로 인해 약 38,000명이 사망했다. 간토 대지진으로 간토의 수도관도 끊겨 화재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쓰나미 피해도 커 최대 10m 높이의 쓰나미가 사가미만, 보소반도, 이즈 제도, 이즈반도 동부 해안을 덮쳐 총 57만 가구의 주택이 유실되고 190만 가구가 집을 잃었다. 피난민들은 배를 타고 간토에서 간사이 및 고베까지 이동하였다. 피해액은 대략 10억 달러(현재의 15) 이상으로 추정된다.

8. 간토 대학살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일본 사회는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자경단, 경찰, 군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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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단은 죽창,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조선인을 색출하여 살해했다. 어려운 일본어 발음을 시켜보거나, 조선식 복장을 한 사람을 찾아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 류큐인 등도 조선인으로 오인받아 희생되었다.

경찰은 학살을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으며, 심지어 일부는 학살에 가담하거나 조장하기도 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이 시체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공식적으로 확인했지만, 피해자 수를 축소 발표하고,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김승학은 각각 2,534명, 6,066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 정부는 233명으로 축소 발표했다. 독립적인 보고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6,000명에서 10,000명에 달했다.

8.1. 학살 배경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경찰서에 지역 치안 유지에 힘쓸 것을 지시했다.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는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다시 신문에 실리면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퍼졌다.

당시는 지진으로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매우 두려워했다. 이러한 소문은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했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고,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 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했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사람은 바로 살해당했다.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하기 위해,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진)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예를 들어 '쥬고엔 고쥬센'을 일본어가 어눌한 발음의 '츄고엔 고쥬센'으로 발음하는 식이었다. 이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학살은 마구잡이식이었다.

8.2. 학살 과정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경찰서에 치안 유지를 지시했다. 이때 내무성은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을 하달했고, 이는 유언비어로 확산되었다.

당시 물 공급이 끊기고 목조 건물이 많았던 일본인들은 화재를 두려워했고, 유언비어는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했다. 이에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죽창,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했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자경단은 조선식 복장을 한 사람을 즉시 살해했고, 어려운 일본어 발음(「十五円五十銭」(쥬고엔 고주센))을 시켜 조선인을 식별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지방 출신 일본인들도 오인되어 살해당했다.

일부 조선인들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피신했으나, 경찰은 학살을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오히려 조선인을 숨겨준 것은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이었다.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반정부 인사들도 학살당했다.

치안 당국은 유언비어를 알면서도 방관했고, 일부는 가담, 조장했다. 자경단의 만행이 심해지자 뒤늦게 개입했으나, 이미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은 시체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했지만, 피해자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조사했으나 형식적인 조치에 그쳤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희생자 수를 2,534명, 김승학은 저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6,066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 정부는 233명으로 추산했다.

지진 이후 학살당한 조선인들
지진 이후 학살당한 조선인들


독립적인 보고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6,000명에서 10,000명에 이르렀다. 일부 신문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를 사실로 보도했고, 이는 자경단 활동을 부추겼다. 군인과 경찰이 자경단 살해에 공모한 경우도 있었다. 잘못하여 조선인으로 오인된 중국인, 류큐인 등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약 700명의 중국인이 살해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1993년 웬저우에 세워졌다.

히비야 공원 근처 마루노우치에서 불타는 경시청
히비야 공원 근처 마루노우치에서 불타는 경시청


일본 정부는 일본군과 경찰에게 조선인 보호를 요청했고, 23,715명의 조선인이 보호 구금되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조선인이 피신한 경찰서조차 군중의 공격을 받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조선인을 보호하기도 했다. 육군은 소문을 부인하고 주민들에게 조선인을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많은 경우 자경단 활동은 육군의 작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여러 기록된 사례에서 군인과 경찰이 살인에 참여했고, 다른 경우에는 당국이 조선인들을 현지 자경단에 넘겨주었고, 자경단은 그들을 살해했다.

관동 지방에서 조선인에 대한 폭력 사태 속에서 지역 경찰과 제국 육군은 사회 불안을 구실로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했다. ja과 같은 사회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와 같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중국인 공동체 지도자 ja은 급진주의자들이 위기를 이용하여 일본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주장을 한 지역 경찰과 제국 육군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8.3. 피해 규모와 은폐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속에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경찰서에 치안 유지를 지시하였다. 이때 내무성은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을 하달했고, 이는 유언비어로 확산되었다.

당시 물 공급이 끊기고 목조 건물이 많았던 일본에서 이러한 소문은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했다. 이에 민간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죽창, 몽둥이, 일본도, 총기 등으로 무장했다.

지진 이후 학살당한 조선인들
지진 이후 학살당한 조선인들


자경단은 조선식 복장을 한 사람을 즉시 살해했고,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어려운 일본어 발음(「쥬고엔 고주센)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 일본인들도 오인받아 살해당했다.

일부 조선인들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피신했으나,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경찰은 학살을 알면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야쿠자 등이 조선인을 숨겨주기도 했다.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좌파 계열 운동가들도 학살당했다.

치안 당국은 유언비어를 알면서도 방관, 조장했고, 자경단의 만행이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서야 개입했다. 학살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은 시체의 피로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했으나, 피해자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조사는 형식적이었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에 대한 사법적,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 김승학은 저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6,066명이 피해자라고 추산했지만, 일본 정부는 233명으로 축소 발표했다. 독립적인 보고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6,000명에서 10,000명에 달했다.

히비야 공원 근처 마루노우치에서 불타는 경시청
히비야 공원 근처 마루노우치에서 불타는 경시청


일본 정부는 일본군과 경찰에게 조선인 보호를 요청해 23,715명의 조선인이 보호 구금되었다. 그러나 군인과 경찰이 살인에 참여하거나, 자경단에 조선인들을 넘겨주는 경우도 있었다.

관동 지방에서 조선인에 대한 폭력 사태 속에서 지역 경찰과 제국 육군은 사회 불안을 구실로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했다.

9. 복구

지진으로 사망한 외국인들을 위한 추모식: 향을 피우는 여성은 주일 이탈리아 대사의 부인이다. 장소는 조조지(芝公園)이다.
지진으로 사망한 외국인들을 위한 추모식: 향을 피우는 여성은 주일 이탈리아 대사의 부인이다. 장소는 조조지(芝公園)이다.


간토 대지진 이후, 일부에서는 수도 이전 가능성을 제기했고, 새로운 수도 후보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일본의 논평가들은 이 재난을 일본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재난에 대한 대응은 도시와 일본의 가치관을 재건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을 가져왔다. 도시, 국가, 일본 국민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지진은 재앙과 재건의 문화를 조성했고, 이는 군국주의 문화를 조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도쿄 제국호텔을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하여 인정을 받았지만, 실제로 건물은 손상되었다. 미국 대사관이 파괴되자 사이러스 우즈 대사는 대사관을 호텔로 이전했다. 제국호텔의 혁신적인 설계와 구조적 강인함은 링컨 로그 장난감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항공모함으로 개조 중이던 미완성 전함 아마기는 지진으로 인해 선체가 손상되어 해체되었고, 대신 미완성 고속전함 가가가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관동 지방 상공의 화재 구름
관동 지방 상공의 화재 구름


런던과는 달리, 도쿄장티푸스 발생률은 여전히 높았는데, 1923년 지진 이후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장티푸스 방지 대책 수립과 도시 기반 시설 건설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서해안의 혼다 포인트 사건에서 7척의 미국 해군 구축함이 좌초되어 23명의 선원이 사망했는데, 이는 일본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해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9.1. 부흥 사업

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으나, 지진 발생 11일 후인 9월 12일에 도쿄를 수도로 계속 두고 복구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하면서 천도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복구를 하면서 현재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공원 등이 계획되어 도시가 보다 근대적인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지진에 대비한 피난처 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다.

요코하마의 파괴된 모습
요코하마의 파괴된 모습


고토 신페이는 도로, 철도 및 공공 서비스의 현대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도쿄 재건 계획을 수립했다. 도쿄 전역에 피난처로 공원을 조성하고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공공 건물을 민간 건물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건설했다.

9.2. 제2차 세계 대전

간토 대지진으로 복구된 도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도쿄 대공습으로 다시 파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다. 일본 참모부의 이마무라 히토시는 후보지에 히메지, 경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진 11일 후인 9월 12일에는 도쿄를 수도로 계속 두고 복구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하면서 천도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복구를 하면서 현재의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공원등이 계획되어 보다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다시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