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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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석기는 조선 인조 시대의 문신으로, 이조 참의 강찬의 아들이자 백부 강순의 양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인조반정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둘째 딸이 소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영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사후 딸 민회빈 강씨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숙종 때 김창집의 상소로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월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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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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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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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과학 저술가, 과학 평론가 |
분야 | 과학, 화학, 생명과학 |
활동 기간 | 2000년대 ~ 현재 |
배우자 | 김미선 |
자녀 | 1남 1녀 |
웹사이트 | 강석기의 과학카페 |
2. 생애
강석기는 문과에 급제한 후 인조반정을 거치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경상우도순안어사, 양근군수 등 외직과 내직을 오갔다. 1628년에는 영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2] 소현세자의 장인이 되었지만, 권세를 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살았다.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나, 1643년에 사망했다.[3]
사후 심기원의 옥사와 강빈의 옥사로 인해 부관참시를 당하고 삭탈관직되었다.[4] 이후 숙종 때 김창집의 상소로 복권되었다.
2. 1. 초기 생애
강석기는 이조 참의 강찬(姜燦)과 그 처 광주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백부 강순(姜焞)의 양자가 되었다.[1]2. 2. 관직 생활
이조 참의 강찬(姜燦)과 그 처 광주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백부 강순(姜焞)의 양자가 되었다.[1] 문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 이후 수찬, 정언, 검토관, 이조좌랑, 겸사서, 이조정랑, 겸시강원문학, 응교, 보덕, 사간, 집의, 사인 등을 역임했다. 경상우도순안어사로 외직에 나가 민생을 살폈고, 전한으로 내직에 복귀했다가 양근군수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이후 내직으로 돌아와 집의, 응교, 사간 등을 지냈다. 병조 참지로 재직 중 둘째 딸이 소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2] 1628년(인조 6) 유효립의 난 진압을 도운 공로로 영사원종공신 1등(寧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이후 우부승지, 대사간, 우승지, 이조참의, 도승지, 이조참판, 병조참판, 대사헌, 부제학, 예조판서,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지경연사,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세자빈의 아버지였으나 권세를 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1643년 7월 28일(음력 6월 13일) 사망했다.[3]
2. 3. 사망과 사후
1643년 7월 28일(음력 6월 13일) 사망한다.[3]이후 심기원의 옥사에 그의 일족이 거론되면서 부관참시 위기와 가문 멸종 위기에 몰렸지만, 김류와 최명길 등이 극력으로 간하여 위기를 면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딸 강빈이 인조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무고되었을 때, 그의 아내와 아들들은 목숨을 잃었다. 강석기는 강빈의 옥사 당시 이미 죽은 뒤였으나 무덤을 파서 부관참시 당하고 양사에서 간하여 삭탈관직되었다.[4] 사후 숙종 때 영의정 김창집의 상소로 복권된다.
3. 저서
- 월당집
참조
[1]
서적
국역 국조인물고
[2]
조선왕조실록
인조 17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9월 29일(임진) 1번째기사
[3]
조선왕조실록
인조 44권, 21년(1643 계미 / 명 숭정(崇禎) 16년) 6월 13일(을해) 1번째기사
[4]
조선왕조실록
인조 48권, 25년(1647 정해 / 청 순치(順治) 4년) 4월 25일(병신)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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