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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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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로, 1583년 페라라에서 태어나 1643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17세기 초 건반 악기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토카타, 칸초나, 리체르카레, 변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프레스코발디는 즉흥적인 스타일과 대담한 화성, 템포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건반 악기 음악을 작곡했으며, 그의 작품은 요한 야코프 프로베르거를 통해 프랑스와 독일 바로크 오르간 악파에, 요한 세바스찬 바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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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기본 정보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1583-1643), 클로드 멜란의 판화 (1619)
이름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로마자 표기Girolamo Frescobaldi
출생일1583년 9월 13일
출생지페라라 공국 페라라
사망일1643년 3월 1일
사망지로마
국적이탈리아
직업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장르바로크 음악
악기오르간
참고
관련 인물

2. 생애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는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필리포는 부유했으며, 지롤라모와 그의 이복형제 체사레가 모두 오르가니스트가 된 것으로 보아 오르간 연주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 그는 루차스코 루차스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루차스키는 마드리갈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알폰소 2세 데스테 공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프레스코발디는 "이탈리아의 여러 주요 도시를 거쳤다"는 신동으로 묘사되며, 연주자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어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다.

20대 초반, 프레스코발디는 로마로 이주했다. 1604년 초 로마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1607년이 되어서야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는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으며,[1] 귀도 벤티볼리오의 고용인으로 플랑드르 여행에 동행하기도 했다. 1608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에르콜레 파스키니의 후임으로 선출되었고,[1] 10월에 로마로 돌아왔다. 1613년에는 오르솔라 델 피노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1]

1614년, 만토바 공작 페르디난도 1세 곤차가의 초청을 받았으나, 만토바에서의 대우는 좋지 않았고, 1615년 로마로 돌아왔다.[1] 1628년부터 1634년까지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1] 1634년, 우르바노 8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돌아와 바르베리니 가문에 고용되었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계속 일하며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에게도 고용되었다.

프레스코발디는 1643년 3월 1일, 10일간의 병으로 사망하여 산티 아포스톨리 교회에 묻혔다.

2. 1. 페라라 시절 (1583-1607)

1600년 프레스코발디의 출생지 페라라


프레스코발디는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는 부유한 사람이었고, 지롤라모와 그의 이복형제 체사레가 모두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오르간 연주자였을 가능성이 있다.[1] 페라라의 프레스코발디 가문이 동명의 피렌체 귀족 가문과 친척 관계에 있다는 증거는 없다. 프레스코발디는 마드리갈의 저명한 작곡가이자 알폰소 2세 데스테 공의 궁정 오르가니스트였던 루차스코 루차스키 밑에서 수학했다. 루차스키의 건반 악기 음악은 오늘날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사라졌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재능 있는 작곡가이자 연주가였고, 니콜라 비첸티노의 ''아르키쳄발로''를 위한 작곡과 연주가 가능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프레스코발디는 "이탈리아의 여러 주요 도시를 거쳤다"는 신동으로 묘사되며, 그는 연주자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중요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페라라를 방문한 작곡가들 중에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존 다울랜드, 오를랑드 드 라수, 클라우디오 메를로, 카를로 제수알도와 같은 많은 중요한 거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2. 2. 로마와 플랑드르 시절 (1607-1628)

1607년, 프레스코발디는 로마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1] 같은 해, 귀도 벤티볼리오가 플랑드르의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브뤼셀로 갔다.[1] 프레스코발디는 브뤼셀 체류 중 앤트워프에서 현지 음악가들의 권유로 첫 번째 작품집인 5성 마드리갈 모음집을 출판했다.[1]

1608년, 로마로 돌아온 프레스코발디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1] 1613년에는 오르솔라 델 피노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1]

2. 3. 만토바와 피렌체 시절 (1614-1634)

1614년 10월, 프레스코발디는 만토바 공작 페르디난도 1세 곤차가의 초청을 받았다. 매우 좋은 제안을 받았기에 고용에 동의했지만, 만토바에서의 환영은 차가웠고, 결국 1615년 4월 로마로 돌아왔다.[1]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출판했는데, 1615년에는 첫 번째 토카타 책의 두 번째 판과 리체르카르, 칸초나 책이 출판되었다. 대성당과 알도브란디니 기관에서의 임무 외에도, 프레스코발디는 제자들을 받았고 가끔 다른 교회에서도 일했다. 1615년부터 1628년까지는 프레스코발디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 이 시기 그의 주요 기악곡 작품으로는 첫 번째 토카타 책의 두 번째 버전(1615–6), 리체르카르와 칸초나(1615), 카프리치오(1624), 두 번째 토카타 책(1627), 그리고 하나에서 네 개의 악기와 콘티누오를 위한 칸초나 책(1628)이 있다.[1]

1628년 11월 22일, 성 베드로 대성당은 프레스코발디가 로마를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지롤라모는 피렌체로 이주하여 토스카나 대공, 즉 메디치 가문의 봉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높은 급여를 받는 음악가였으며, 1년 동안 피렌체 세례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1] 1634년까지 피렌체에 머물렀으며, 그 기간 동안 두 권의 아리아(1630)를 출판했다.[1]

2. 4. 로마 복귀와 말년 (1634-1643)

1634년, 프레스코발디는 우르바노 8세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바르베리니 가문에 고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음악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계속 일하는 한편,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에게도 고용되어 유명한 루트 연주자인 요하네스 히에로니무스 카프스베르거를 고용하기도 했다.

1635년, 프레스코발디는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집 중 하나인 ''피오리 무지칼리''(Fiori musicali, Fiori musicali|피오리 무지칼리it)를 출판했다. 1637년에는 이전 작품집을 재판하기도 했다. 이후 다른 출판물은 없었지만, 1645년에 이전에 출판되지 않은 작품집이 나왔고, 1664년 그의 아들 도메니코 프레스코발디는 여전히 출판되지 않은 아버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프레스코발디는 10일간의 투병 끝에 1643년 3월 1일에 사망했다. 그는 산티 아포스톨리 교회에 묻혔으나, 18세기 후반 교회 재건축 과정에서 무덤이 사라졌다. 오늘날 교회에는 그의 이름을 새기고 그를 이탈리아 음악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기리는 무덤이 있다.

3. 주요 작품 및 음악적 특징

최초로 알려진 독창적인 주제에 대한 변주곡 모음인 ''Aria detta la Frescobalda''(1627) 악보 사본


프레스코발디는 나폴리 출신의 아스카니오 마요네와 조반니 마리아 트라바치, 베네치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메룰로와 같은 많은 초기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음악은 그 영향의 요약 이상을 나타낸다. 특히 템포 분야에서 많은 혁신을 이룬 중요한 인물이다.

프레스코발디의 작곡 목록은 방대하며, 크게 건반 악기 음악, 성악 음악, 기악 합주 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오르간과 쳄발로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토카타, 카프리치오, 판타지아, 칸초나, 리체르카레, 무곡, 변주곡 등이 있다.

프레스코발디의 작곡 시기별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1615년: ''Ricercari, et canzone''(리체르카레와 칸초나) 출판. 리체르카르의 구식 순수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 1615년: ''Toccate e partite''(토카테 에 파르티테) 출판. 표현력 있는 건반 스타일을 확립했다.
  • 1627년: 성악과 세속 장르 모두에서 악기 및 성악 합주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다.
  • 1628년: 악기 합주 칸초나 작품집인 ''Il Primo Libro delle Canzoni'' 출판.
  • 1635년: ''Fiori musicali''(음악의 꽃다발) 출판. 교회 음악에 전념한 그의 유일한 작품이자 완전히 새로운 곡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집이다.

3. 1. 건반 악기 음악

얀 피터스존 스벨링크 이후 프레스코발디는 창작 에너지를 악기 작곡에 집중하기로 선택한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는 비교적 덜 알려진 악기 음악에 광범위한 감정을 불어넣었다. 건반 악기 음악은 프레스코발디의 기존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생전에 8개의 건반 악기 음악집을 출판했으며, 그중 몇몇은 그의 감독하에 재판되었고, 더 많은 곡들이 사후에 출판되거나 악보로 전해졌다.

프레스코발디는 토카타, 칸초나, 리체르카레, 판타지아, 카프리치오, 변주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의 건반 악기 작품은 즉흥 연주 스타일, 화려한 기교, 대담한 화성, 템포 변화 등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템포 분야에서 많은 혁신을 했는데, 그의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곡에 대조적인 템포의 부분을 포함했고, 그의 일부 출판물에는 템포 관련 연주 측면에 대한 장황한 서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엄격한 ''탁투스''를 가진 고대 흰 측음표와 현대적인 템포 개념 사이에서 타협을 이루었다.

1630년에 출판된 ''Arie musicali''는 프레스코발디가 로마에 있을 때 이전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권은 성악 모드 내에서 로마네스카/루제로와 치아코나/파사칼리아 건반 쌍을 사용한다.

3. 1. 1. 토카타

프레스코발디의 ''토카타''와 ''파르티타''(1615년과 1627년)는 ''Fiori musicali''를 제외하고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집이다. ''토카타''는 미사와 전례 행사에 사용될 수 있었으며, 더 큰 곡의 전주곡 역할을 하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당한 길이의 곡이었다. 1627년에 쓰여진 ''세컨도 리브로''는 첫 번째 ''토카타'' 책에 포함된 장르의 개념을 확장하며, 다양한 리듬 기법과 네 개의 오르간 곡으로 더욱 다양성을 보여준다. 두 권 모두 화려한 즉흥 연주 스타일로 쓰여진 12개의 ''토카타'' 세트로 시작하며, 빠른 음표 연주(''파사지'')와 더 친밀하고 명상적인 부분(''아페티'')을 번갈아 가며 대위법 모방의 짧은 폭발을 더한다.

화려한 기교는 음악에 스며들어 일부 곡을 현대 연주자들에게도 어렵게 만든다. ''세컨도 리브로 디 토카타''의 ''토카타 IX''에는 작곡가가 쓴 "Non senza fatiga si giunge al fine"(노력 없이는 끝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비문이 있다. 이러한 짧은 발언은 ''Fiori musicali''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이 중 하나는 ''리체르카르'' 동안 중요한 순간에 연주자가 노래해야 하는 다섯 번째 목소리를 언급하며, 중요한 순간은 연주자가 찾도록 남겨둔다. 이 곡에 대한 프레스코발디의 유명한 메모는 "Intendami chi puo che m'intend' io"(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를 이해하는 한 이해해라)이다. 이는 프레스코발디의 혁신적이고 대담한 작곡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3. 1. 2. 칸초나

프레스코발디의 칸초나는 푸가적인 모방 대위법을 기반으로 한 다성 음악으로, 다양한 주제와 리듬을 사용하여 다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1628년에 출판된 《어떤 악기로도 연주 가능한 칸초나집 제1권》(Il Primo Libro delle Canzoni)은 그의 대표적인 칸초나 작품집이다.

''Il Primo Libro delle Canzoni''는 1628년 로마에서 두 번, 1634년 베네치아에서 한 번 출판되었는데, 베네치아 판은 로마 판에서 상당히 개정되었다. 작품집에 있는 40곡 중 10곡이 교체되었고 모든 곡이 다양한 정도로 개정되었으며, 그중 16곡은 급진적으로 개정되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편집은 프레스코발디가 자신의 작품과 작품집의 완벽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1]

1627년의 30개 성악 작품과 1628년의 40개 합주 칸초나 모음집은 구조적으로 정반대이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교회 음악에 적합한 더 전통적인 스타일로 쓰여졌다.

3. 1. 3. 리체르카레

프레스코발디는 1615년에 출판된 ''Ricercari, et canzone''에서 리체르카르의 구식 순수한 스타일로 돌아갔다. 빠른 음표 값과 3박자는 스타일의 순수성을 해치지 않았다. 1635년에 출판된 ''Fiori musicali''는 교회 음악에 전념한 그의 유일한 작품이자 완전히 새로운 곡을 포함한 그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Fiori''는 미사의 전례적 한계 내에서 여러 유형의 장르를 실험하는데, 대중적인 스타일을 제외하고 프레스코발디가 사용한 거의 모든 장르가 이 작품집에 포함되어 있다.

''Fiori musicali''의 작품들은 18세기와 19세기에도 엄격한 대위법의 모범으로 사용되었다. 프레스코발디는 ''Fiori muscali''에 가장 잘 나타나는 그레고리오 성가 ''칸투스 피르무스''에 대한 오르간 즉흥 연주의 오래된 형태를 발전시켰다. 오르간은 ''베르세트''에서 합창단과 번갈아 연주되었고 대위법 스타일로 즉흥 연주되었다.

''Fiori musicali''의 ''리체르카르''에는 작곡가가 쓴 짧은 메모가 있는데, ''리체르카르'' 연주 중 중요한 순간에 연주자가 노래해야 하는 다섯 번째 목소리를 언급하며, 그 중요한 순간은 연주자가 찾도록 남겨둔다. 이 곡에 대한 프레스코발디의 유명한 메모는 "Intendami chi puo che m'intend' io|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를 이해하는 한 이해해라it"이다.

3. 1. 4. 변주곡

프레스코발디는 변주곡 분야에 큰 공헌을 한 작곡가이다. 그는 샤콘파사칼리아를 음악 레퍼토리에 도입한 최초의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독창적인 주제에 대한 변주곡을 작곡한 최초의 작곡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모든 변주곡은 민요나 대중적인 선율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프레스코발디는 작곡 후반기에 서로 관련 없는 개별 곡들을 결합하여 복잡한 작품을 만드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그의 관심이 반영된 마지막 작품인 《파사칼리아에 의한 100개의 파르티타》(Cento partite sopra passacagli)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창작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곡은 처음에 독립적으로 쓰여졌던 곡들을 결합하려는 프레스코발디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3. 2. 템포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

프레스코발디는 템포에 대한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혁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엄격한 탁투스에 따른 멘주라 표기법과 작품 속에서의 가속과 감속으로 특징지어지는 템포라는 근대적인 개념의 중간적인 사고방식을 취했다. 그는 전임자들과 달리 자신의 곡에 대조적인 템포의 부분을 포함시켰으며, 그의 일부 출판물에는 템포 관련 연주 측면에 대한 장황한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4. 후대에 미친 영향

당대 비평가들은 프레스코발디를 그 시대 건반 악기 음악의 가장 위대한 선구자로 인정했다. 프레스코발디의 성악곡을 좋게 평가하지 않은 비평가들조차도 그가 건반 악기를 연주하고 작곡하는 데 천재였다는 데 동의했다.[1] 프레스코발디의 음악은 1660년대까지 직접적인 영향력을 잃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은 사후 1세기 이상 건반 악기 음악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베르나르도 파스키니는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를 교육적 권위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1]

프레스코발디의 제자들 중에는 수많은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제자는 1637년부터 1641년까지 그에게서 배운 독일인 요한 야코프 프로베르거였다.[1] 프로베르거의 작품은 프레스코발디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로시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17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고, 프레스코발디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은 18세기에도 여전히 연구되었다. 프레스코발디의 작품은 헨리 퍼셀, 요한 파헬벨,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밖의 많은 주요 작곡가들에게 알려져 영향을 미쳤다.

바흐는 프레스코발디의 여러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는 그가 서명하고 1714년으로 날짜를 적은 프레스코발디의 ''Fiori musicali''(베네치아, 1635) 필사본이 있으며, 같은 해 바이마르에서 연주했다. 바흐에게서 프레스코발디의 영향은 초기 오르간을 위한 합창 전주곡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프레스코발디의 ''토카타''와 ''칸초나''는 갑작스러운 변화와 대조적인 부분으로 유명한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유명한 ''판타지아풍''에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리리폰드 음악 파일을 위한 위지윅 편집기는 작곡가를 기리기 위해 프레스코발디라고 불린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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