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왕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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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왕은 발해 무왕의 아들로, 조카 성왕의 뒤를 이어 794년에 발해의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정력으로 연호를 정하고,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았다. 그는 당나라에 부왕 무왕을 국왕으로 추존해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으며,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졌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했다. 809년에 사망했으며, 이후 그의 아들들이 왕위를 이었으나, 선왕의 즉위로 고왕의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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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왕 (발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강왕 대숭린 |
| 다른 이름 | 가독부 |
| 왕조 | 발해 |
| 재위 기간 | 794년 - 808년 |
| 시호 | 강왕(康王) |
| 연호 | 정력(正曆) |
| 휘 | 대숭린 |
| 생년 | 미상 |
| 몰년 | 정력 15년 (808년 1월) |
| 부친 | 문왕 |
| 모친 | 미상 |
| 왕후 | 미상 |
| 자녀 | 대원유, 대언의, 대명충 |
| 능묘 | 미상 |
2. 생애
무왕의 아들인 대숭린(大嵩璘)은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연호를 정력으로 정하고, 당나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다.
발해는 강왕의 치세 하에서 안정을 회복하고 국력이 발전하였다. 이는 2대 연속으로 왕의 재위 기간이 짧았던 혼란을 극복하고 이룬 성과였다.
2. 1. 즉위 과정
무왕의 아들 대숭린(大嵩璘)은 794년, 조카인 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성왕에게 자녀가 있었는지, 숭린이 정변을 일으켰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대숭린은 즉위 후 연호를 정력으로 고쳤다.당나라는 795년 2월 내시 은지첨(殷志瞻)을 보내 대숭린을 우효위대장군 흘한주도독(右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에 임명하고, 발해 국왕보다 낮은 작위인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다. 797년 발해는 당나라에 사절을 보냈고, 당나라는 대숭린을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 흘한주도독(銀青光祿大夫 檢校司空 忽汗州都督)과 발해국왕(渤海國王)에 봉했다. 그러나 《신당서》에는 762년 당 숙종이 발해를 국으로 봉하고 흠무를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어, 강왕이 군왕직을 승습했다는 《구당서》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대숭린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아버지 무왕을 국왕으로 추존해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2. 2. 당나라와의 관계
795년 2월 당나라는 내시 은지첨(殷志瞻)을 파견해 강왕을 우효위대장군 흘한주도독(右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에 제수하고 발해 국왕보다 낮은 작위인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다. 797년 발해 측은 당에 사절을 보냈고 당나라는 그에게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 흘한주도독(銀青光祿大夫 檢校司空 忽汗州都督)과 발해국왕(渤海國王)에 봉했다.강왕은 당나라에 요구하여 부왕 무왕을 국왕직에 추증받았다. 강왕은 발해의 국왕직을 계승할 당시에는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직을 받았다. 구당서 199권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개원 연간에 부왕의 직을 승습해 군왕에 임명됐다 한다. 이후 좌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에 봉해지고, 현종 천보 연간에 특진하여 태자첨사, 빈객(太子詹事 賓客)에 임명됐다. 대종 대력 연간에 사공(司空), 태위(太尉)에 임명됐다. 강왕이 승습할 때는 군왕, 장군직이었다. 강왕은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 부왕을 국왕으로 추존할 것을 요청하여 책봉받았다.[1]
이후 당나라에 여러 번 사신을 보냈다. 797년 11월 조카 대능신(大能信) 등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당나라에서는 대능신에게 특별히 좌효위중랑장 우후 누번장(左驍衛中郎將 虞候 婁蕃長)에 제수하고 도독 여부구(茹富仇)에게는 우무대장군(爲右武衛將軍)을 특별히 제수했으며 이후 귀국했다. 804년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당나라는 그에게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金紫光祿大夫 檢校司空)에 임명했다. 806년 10월 당 헌종이 즉위하자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당 헌종은 그를 검교태위(檢校太尉)에 봉했다. 그해 12월 다시 당나라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2]
정책 면에서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있는 바와 같이 '''조유'''(국가의 강기)'''는 구법을 따른다'''는 방침을 관철하여, 재위 기간 동안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절을 파견하여 교류하였다.[3]
2. 3. 일본과의 관계
일본에 보낸 국서에 있는 바와 같이 '''조유'''(국가의 강기)'''는 구법을 따른다'''는 방침을 관철하여, 재위 기간 동안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절을 파견하여 교류하고, 일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했다.2. 4. 사망
809년 1월에 사망하였다. 강왕 사후 세 아들인 대원유, 대언의, 대명충이 각각 정왕, 희왕, 간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간왕 사후 선왕이 즉위함으로써 발해의 왕통은 대야발의 후손으로 이어져 고왕으로부터의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3. 가족 관계
4. 평가
강왕의 치세는 발해가 2대 연속 짧은 재위 기간으로 인한 국내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회복하여 국력 발전을 이룬 시기로 평가된다. 강왕은 당나라와 일본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이러한 안정을 이루었다.
참조
[1]
웹사이트
강왕
https://archive.toda[...]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Nate
2013-10-26
[2]
문서
효의황후
[3]
문서
효의황후
[4]
문서
당(唐)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위장군동정(右衛將軍同正)을 받았다
794
[5]
문서
당(唐)에 사신으로 가 좌효위중랑장을 받았다. 동행한 우후루번장도독 여부구는 우무위장군을 받았다
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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