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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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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혜공주묘는 지린성 둔화시 육정산 고분군에 위치한 발해의 공주 정혜공주의 무덤이다. 1949년 발굴되었으며, 묘실은 석조 구조로 용암석과 현무암을 다듬어 쌓은 벽면과 모줄임 천장을 갖추고 있다. 묘비명에는 문왕의 둘째 딸이자 정효공주의 언니인 정혜공주의 정보가 담겨 있으며, 777년에 사망하여 780년에 매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건축 양식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발해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반론도 존재한다.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관리 소홀로 훼손된 상태이며, 중국이 발해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의 증거로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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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공주묘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적 이름정혜공주묘
한자 표기貞惠公主墓
위치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돈화시
국가발해
유적 정보
유적 유형
문화재 유형해당사항 없음
문명해당사항 없음
건립 연대해당사항 없음
건립자해당사항 없음
발굴 시기해당사항 없음
발굴자해당사항 없음

2. 위치 및 발굴 경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둔화시(발해 전기의 도성 옛 국가인 오동성으로 비정되는 지역)[2] 남쪽의 육정산 고분군에 정혜공주묘가 위치한다.[1] 1949년 조사에 의해 발견되었다.[1]

묘실은 석조로 된 3미터 남짓의 사방 거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2.68m이다.[1] 삼각 굄돌식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1] 묘도의 길이는 11m이고,[1] 봉토는 폭 2.45m, 높이 1.5m의 원형 형태를 하고 있다.[1]

묘비, 石狮子|석사자중국어, 마노 구슬, 삼채기의 그릇 밑바닥, 금동제 못, 철제 못 등이 출토되었다.[1] 도굴되었지만 석조 묘지가 출토되어 정혜공주임이 밝혀졌다.[3] 묘지는 병려문이 해서체 한자로 새겨져 있다.[1] 1980년부터 1981년에 걸쳐 정효공주묘 묘지와 비교 연구를 통해 777년에 사망, 780년에 매장된 것으로 밝혀져 발해 유적・유물 연구에 있어 연대 기준이 되었다.[3]

고구려에서 선호되던 삼각 굄돌식 천장으로 구축되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졌으나,[3] 발해 고고학자 다무라 고이치는 묘지에 따르면 공주는 결혼하여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이를 키웠으므로, 이 무덤은 남편의 무덤이었을 것이며 남편이 고구려계 인물이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라고 추정했다.[3]

왕승례(Jilin Provincial Museum|지린성 박물관영어 관장)는 발해 문화가 독립적인 발해 고유의 민족 문화라는 주장은 잘못된 견해이며, 정혜공주묘는 고구려, 정효공주묘는 당 문화의 영향을 나타내므로 에 대한 발해의 예속화가 진행되었다고 주장했다.[4][5] 정혜공주묘 및 정효공주묘 묘지명 문구는 『시경』, 『예기』를 비롯한 고전에 나오는 어구로 구성되어 있다.[6]

2. 1.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둔화시(발해 전기의 도성 옛 국가인 오동성으로 비정되는 지역)[2] 남쪽의 육정산 고분군에 있다.[1] 1949년 조사에서 발견되었다.[1]

2. 2. 발굴

1949년 조사에서 발견되었다.[1] 묘주는 정혜공주로 밝혀졌다.[3] 1980년부터 1981년까지 발굴 조사된 정효공주묘 묘지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정혜공주는 777년에 사망, 780년에 매장되었다고 하며, 발해의 유적・유물 연구에 있어서 실년대의 기준이 처음으로 얻어졌다.[3] 고구려에서 선호되던 삼각 굄돌식 천장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받았으며,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되어 고구려와 발해를 연결하는 증거로 여겨졌다.[3]

3. 무덤 구조

묘실은 석조로 된 3미터 남짓의 거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2.68m이다.[1][2] 삼각 굄돌식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2] 묘도의 길이는 11m이고,[2] 봉토는 폭 2.45m, 높이 1.5m의 원형이다.[2]

고구려에서 선호되던 삼각 굄돌식 천장 구조는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3] 그러나 발해 고고학자 다무라 고이치는 묘지에 따르면 공주가 결혼 후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어린아이를 키웠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무덤이 남편의 무덤이었을 가능성과 남편이 고구려계 인물이며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3]

왕승례 지린성 박물관 관장은 정혜공주묘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정효공주묘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발해가 당에 예속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4][5]

3. 1. 형태

정혜공주묘는 대형의 돌방 봉토 무덤(석실봉토분)으로, 널방(현실)과 널길(선도) 및 묘도로 구성되어 있다. 묘실은 석조로 된 3미터 남짓한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높이는 2.68m이다. 묘도의 길이는 11m이고, 봉토는 폭 2.45m, 높이 1.5m의 원형이다.[1] 천장은 삼각 굄돌식(모줄임(말각조정) 천장)이다.[3]

3. 2. 크기

1949년 9월에 발굴된 무덤의 깊이는 2m이고 너비는 2.8m, 남북 길이는 2.9m이다. 무덤 벽면은 용암석과 현무암을 다듬어 8~9층으로 쌓아 올려져 있다. 묘도의 길이는 11m이고, 봉토는 폭 2.45m, 높이 1.5m의 원형 형태를 하고 있다.[1]

3. 3. 건축 양식

돌방봉토무덤(돌방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무덤)으로, 널방(현실)과 널길(연도) 및 묘도로 구성되었으며, 모줄임 천장이다. 묘실은 석조로 된 3미터 남짓의 거의 정사각형이며, 높이는 2.68m이다.[2] 삼각 굄돌식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2] 묘도의 길이는 11m이고,[2] 봉토는 폭 2.45m, 높이 1.5m의 원형 형태를 하고 있다.[2]

고구려에서 선호되던 삼각 굄돌식 천장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받았으며,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되어 고구려와 발해를 연결하는 증거로 여겨졌다.[3]

4. 출토 유물

묘비, 石狮子|석사자중국어, 마노 구슬, 당삼채기의 그릇 밑바닥, 금동제 못, 철제 못 등이 출토되었다. 이미 도굴되었지만 석조 묘지가 출토되어 묘주가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임이 밝혀졌다.[3] 묘지는 병려문 형식의 해서체 한자로 새겨져 있다.[1] 정효공주묘 묘지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정혜공주는 777년에 사망하여 780년에 매장되었으며, 이는 발해 유물 연구에 있어 연대 기준을 제공했다.[2][3]

4. 1. 주요 유물

묘비, 石狮子|석사자중국어, 마노 구슬, 당삼채 그릇 밑바닥, 금동제 못, 철제 못 등이 출토되었다.

4. 2. 묘비명

묘비명에는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에 대한 설명이 있다.[1] 정혜공주는 정효공주의 언니이기도 하다. 779년 공주가 죽어 여름에 매장하였다. 석조 묘지가 출토되어 묘주의 한 사람이 정혜공주임이 밝혀졌고,[3] 묘지는 병려문 형식의 해서체 한자로 새겨져 있다.[1] 1980년부터 1981년에 발굴 조사된 정효공주묘 묘지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정혜공주가 777년에 사망, 780년에 매장되었다고 한다.[2]

5. 역사적 의미와 논쟁

정혜공주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둔화시 남쪽 육정산 고분군에서 발견되었다.[1] 묘실은 석조로 된 정방형에 가까운 구조이며, 삼각 굄돌식 천장을 가지고 있다.[3] 묘비, 石狮子|석사자중국어, 마노 구슬, 삼채기 등이 출토되었다.[3] 묘지는 해서체 한자로 쓰여진 병려문이며,[1] 묘지명 문구는 『시경』, 『예기』 등 고전의 어구로 구성되어 있다.[6]

5. 1. 발해사 연구의 기준점

정혜공주묘는 발해 유적 및 유물 연구에 있어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3] 정효공주묘 묘지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정혜공주는 777년에 사망, 780년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3]

5. 2. 고구려 계승 논란

정혜공주묘는 고구려에서 선호되던 삼각 굄돌식 천장으로 구축되어 있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되며 고구려와 발해를 연결하는 증거로 여겨졌다.[3] 그러나 다무라 고이치는 묘지에 따르면, 공주는 결혼하였고,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어린아이를 키웠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 무덤은 남편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남편이 고구려계 인물이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3]

왕승례(Jilin Provincial Museum영어 관장)는 발해 문화가 독립적인 발해 고유의 민족 문화라는 주장은 잘못된 견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를 비교하며 정혜공주묘는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보이며, 에 대한 발해의 예속화가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4][5]

5. 3. 중국의 역사 왜곡 시도

중국은 발해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정혜공주묘를 방치하고 한국인에게 공개를 금지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1] 정혜공주묘는 고구려 고분 양식으로 지어졌으므로 중국은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위해 정혜공주묘를 방치하고 한국인에게 공개를 금지하고 있다.[1] 현재 정혜공주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무관심으로 정문은 녹슨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안내 비석의 글씨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뭉개져 있다.[1]

6. 현재 상태

현재 정혜공주묘는 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6. 1. 관리 실태

현재 정혜공주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관리가 소홀하며, 정문은 녹슨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안내 비석의 글씨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뭉개져 있다.[1]

정혜공주묘는 고구려 고분 양식으로 지어졌으므로, 중국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위해 정혜공주묘를 방치하고 한국인에게 공개를 금지하고 있다.[1]

참조

[1] 간행물 2020-12-04
[2] 간행물 2020-12-04
[3] 서적 "海東の盛国"渤海の文化 http://id.nii.ac.jp/[...] 東洋文庫 2005-09
[4] 서적 唐代渤海‘貞惠公主墓志’和‘貞孝公主墓志’的比較硏究 吉林省社会科学院 1982
[5] 서적 동아시아의 발해사 쟁점 비교 연구 http://contents.nahf[...] 東北アジア歴史財団 2009-09
[6]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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