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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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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객주는 고려 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객상주인(客商主人)을 의미한다. 보행객주와 물상객주 두 종류가 있었으며, 물상객주는 상업 및 금융 기능을 수행하며 상품 매매, 창고업, 위탁 판매, 운송, 금융 업무 등을 취급했다. 객주는 화물 보관, 대금 입체, 자금 융통, 어음 발행 등의 업무를 수행했고, 하주, 왕실, 양반 등을 위한 예금도 취급했다. 개항기에는 외국 상품 중개 및 길드적인 동업 조합 기능을 수행했으나, 조청상민수륙장정 체결 이후 몰락하여 1930년에 제도가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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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

2. 연원

객주제도란 14세기 중엽 영국의 양모업(羊毛業) 부문에서 발달했던 푸팅 아웃 시스템과 같은 형태로서 조선시대에 발달된 한국의 중요한 상업·금융기관의 하나이다. 이것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이르는 상품의 유통과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즉 상품시장의 확대와 수요량 측정이 곤란해짐에 따라 발생하는 일종의 중개업(仲介業)이라 하겠다.

독일에서 발달한 페를라크 시스템(Verlages system), 프랑스의 객주업(commandite industrielle)과 비슷하다. 객주의 기원이나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객주란 객상주인(客商主人)이라는 뜻이며, 주인이란 주선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3. 종류

객주에는 보행객주와 물상객주의 두 종류가 있다. 보행객주는 주막보다 객실과 대우 등이 좋아 중류 이상의 양반 계급이 주로 숙박하던 고급 시설이었다. 물상객주는 상품 매매를 주 업무로 하였으나, 창고업, 위탁판매업, 운송업도 취급하고 오늘날의 은행과 비슷한 금융 업무 및 하주(荷主)를 위한 숙박업도 겸하는 등 일종의 상업·금융기관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3. 1. 보행객주

객주에는 보행객주(步行客主)와 물상객주(物商客主)의 2종류가 있다. 보행객주는 주막보다 여러모로 고급이며 객실, 대우 등도 좋아서 중류 이상의 양반 계급이 숙박하던 곳이다.

3. 2. 물상객주

객주제도는 14세기 중엽 영국의 양모업(羊毛業) 부문에서 발달했던 푸팅 아웃 시스템(putting out system:先貸制度)과 같은 형태로서 조선시대에 발달된 한국의 중요한 상업·금융기관의 하나이다. 이것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이르는 상품의 유통과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즉 상품시장의 확대와 수요량 측정이 곤란해짐에 따라 발생하는 일종의 중개업(仲介業)이라 하겠다. 객주의 업무는 상품의 매매가 주가 되지만, 창고업·위탁판매업·운수업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은행 업무와 비슷한 일도 하였고, 하주(荷主)에 대한 숙박업도 겸하였다. 다시 말해서 객주는 생산자나 상인들의 화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위탁에 따라 매매를 알선, 그 구전(口錢)을 받았으며, 화물 위탁자나 이것을 살 사람에게 화물을 담보로 대금(代金)의 체당(替當)이나 자금융통을 해주었다. 이때 토지·가옥 등의 부동산을 담보로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신용대부(信用貸付)가 일반적이었다. 객주에는 보행객주(步行客主)와 물상객주(物商客主)의 2종류가 있는데, 물상객주는 일종의 상업·금융기관으로서 상품의 매매, 창고업·위탁판매업·운송업을 취급하였으며, 오늘날의 은행 업무와 비슷한 일 및 하주(荷主)의 편의를 위하여 여숙업(旅宿業)도 겸하였다.

4. 운영

객주는 14세기 중엽 영국의 양모업 부문에서 발달했던 푸팅 아웃 시스템과 유사한 형태로, 조선시대에 발달한 중요한 상업·금융기관 중 하나였다. 상품 유통 과정이 복잡해지고 상품 시장이 확대되면서 등장한 일종의 중개업이었다.

객주는 상품 매매를 주로 했지만, 창고업, 위탁판매업, 운수업, 하주(荷主)에게 숙박 시설 제공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생산자나 상인의 화물을 받아 위탁에 따라 매매를 주선하고 수수료(구전)를 받았는데, 구전은 대략 대가의 1%에서 5% 정도였다. 화물 보관은 특별한 창고세가 없었으나, 장기간 보관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길 경우에는 창고세를 받기도 했다.

조선 말기(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에는 외국 무역을 담당하여 외국 상인과 교섭하고 외국 상품 판매의 중개 역할을 하였다. 외국 상품 유입에 따라 객주들은 객주회(客主會) 또는 전물회(傳物會)를 조직하여 서양의 길드와 같은 동업 조합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1890년 인천과 부산에 25개의 객주가 설치되어 도매업, 창고 보관업, 운수업 등을 맡아보다가 1930년대에 사라졌다.

객주는 독일의 페를라크 시스템(Verlages system), 프랑스의 객주업(commandite industrielle)과 비슷하다.

4. 1. 금융 업무

객주는 상품 매매 외에 오늘날의 은행과 비슷한 금융 업무도 수행했다. 생산자나 상인들의 화물을 담보로 자금을 융통해 주었는데, 이때 부동산을 담보로 하기도 했지만 주로 신용대부가 일반적이었다. 화물 거래, 대금 체당, 자금 융통 시에는 어음을 발행하거나 인수하여 원격지 간 금전 및 재화 결제를 대행했다. 객주가 발행한 환표(換票)는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여객이나 지방 상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객주는 하주나 왕실, 양반 등의 자금을 예금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일반 상인에게는 1~2푼의 이자를 지급했지만, 왕실이나 양반에게는 대개 무이자가 원칙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는 왕실 예금에도 월 2푼의 이자가 붙었다. 객주는 지방에서 중앙 관청에 바치는 물품이나 금전도 취급하며 정부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4. 2. 예금 및 기타 업무

객주는 상품 매매를 주로 했지만, 창고업, 위탁판매업, 운수업 외에도 오늘날의 은행과 비슷한 일도 하였고, 하주(荷主)에게 숙박업도 제공하였다. 객주는 생산자나 상인의 화물을 받아 위탁에 따라 매매를 주선하고 수수료(구전)를 받았다. 화물 위탁자나 구매자에게 화물을 담보로 대금을 대신 내주거나 자금을 융통해 주었다. 이때 토지나 가옥 같은 부동산을 담보로 잡기도 했지만, 신용대부가 일반적이었다.

객주 제도의 특징은 화물 거래, 대금 체당, 자금 융통 시 어음을 발행하거나 인수하여 원격지 간의 재화나 금전 결제를 대행했다는 점이다. 객주의 환표(換票) 사용은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 여각이나 지방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객주는 하주의 자금이나 왕실, 양반 등을 위해 예금도 취급하였다. 하주나 상인에게는 1~2푼의 이자를 지급했지만, 왕실이나 양반에게는 대개 이자가 없었다. 그러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는 한 달에 2푼의 이자를 붙였다. 객주는 지방에서 중앙 관청에 바치는 물품, 금전 등도 취급하며 정부의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

5. 개항기의 객주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객주는 외국 무역을 담당하며 외국 상인과 교섭하여 외국 상품 판매를 중개하였다. 이들은 거대한 상업 자본을 축적하여 개항과 동시에 초기 외국 무역의 담당자가 되어 새로운 자본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객주는 관리들의 엽관(獵官) 운동 자금을 대주고, 일이 잘되면 특정한 화물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특권을 얻기도 했다.

5. 1. 외국 상품 중개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외국 상품이 개항지를 통해 들어오자, 객주들은 외국 상인과 교섭하여 외국 상품 판매를 중개하였다. 이들은 객주회(客主會) 또는 전물회(傳物會)를 조직하여 서양의 길드(guild)와 같은 동업 조합의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1890년에는 인천과 부산에 25개의 객주가 설치되어 화물 도매업, 창고 보관업, 운수업 등을 맡아보다가 1930년대에 없어졌다. 그러나 1882년 조청상민수륙장정 체결은 객주 몰락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5. 2. 객주회 조직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외국 상품이 유입되자 객주들은 객주회(客主會) 또는 전물회(傳物會)를 조직하여 서양의 길드와 같은 동업 조합(同業組合)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들은 개항지에서 외국 상인과 교섭하여 외국 상품 판매를 중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은 객주 몰락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90년에는 인천부산에 25개의 객주가 설치되어 화물의 도매업, 창고 보관업, 운수업 등을 맡아보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없어졌다.

5. 3. 몰락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외국 상품이 개항지를 통해 들어오면서, 객주는 길드(Guild)적인 동업 조합 기능을 수행했다. 이들은 개항지에서 외국인과 절충하여 외국 상품 판매를 중개하며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1882년 조청상민수륙장정은 객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 인천·부산항에 객주 25개소를 설치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도매업, 운송업, 창고업 등을 운영하는 상회사를 설립하고 구전(口錢)을 받도록 하였다. 1930년에 이러한 제도는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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