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합동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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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합동은행은 1928년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의 합병으로 출범한 은행이다. 정재학이 대표취체역을 맡았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의 경영 간섭을 받았다. 1941년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되었으며,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은 한성은행 상무취체역을 거쳐 조흥은행의 행장을 역임했다. 경상합동은행은 조흥은행으로 이어지는 정씨 가문의 은행 경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흥은행은 일제강점기 민족자본 은행 통합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상합동은행은 1928년 경북 지역의 대구은행과 경남 지역의 경남은행이 합병하여 설립되었다. 총독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재학이 대표취체역(대표이사) 겸 취체역 회장(이사회장)에 취임했으나,[1] 총독부와 조선은행은 정재학의 퇴진과 조선은행 출신 일본인 임원 선임을 요구하며 경영에 간섭했다.[1]
1936년 말까지 경상합동은행의 주주는 대부분 한국인이었으며, 최대 주주는 정재학에서 민대식 등 민씨 가문으로 변경되었다. 1939년 6월 민씨 가문은 경상합동은행 주식을 대구상공은행 행장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에게 양도하여 최대 주주가 일본인으로 변경되었다. 1940년 4월 정재학이 사망하고, 그의 장손 정운용이 경영을 승계했으나, 일제 말기 전시금융체제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한성은행 합병 직전인 1941년 6월 말 기준 한국인 주주 비율은 54.6%로 일본인보다 많았다.[1]
2. 경상합동은행의 설립과정과 총독부의 견제
2. 1.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의 합병
경상합동은행은 1928년 8월 1일 경북에서 영업해온 대구은행과 경남에서 영업해온 경남은행의 합병으로 출범했다. 표면적으로는 대등한 합병이었으나, 실제로는 경남은행이 대구은행에 흡수되는 형태였다. 경상합동은행의 임원진은 대부분 대구은행 출신으로 구성되었다.[1]
2. 2. 정재학의 경영권 분투와 총독부의 탄압
정재학은 합병 후 경상합동은행의 대표취체역(대표이사) 겸 취체역 회장(이사회장)에 취임했으나, 총독부와 조선은행의 경영 간섭에 직면했다.[1] 총독부와 조선은행은 정재학의 퇴진과 조선은행 출신 일본인 임원 선임을 요구했다. 1929년 1월 정기주총에서 정재학은 대표취체역에서 물러나고, 이병학이 대표취체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취체역(이사)에 선임되었다. 1930년 10월 정재학은 다시 취체역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조선은행은 경영 상태가 악화된 경상합동은행에 대한 자금 지원을 대가로 上田直秀|우에다 나오히데일본어를 경상합동은행 상무취체역(상무이사) 자리에 앉혔다.[2]
3. 한국인 주주 비율과 경영권 변동
3. 1. 민씨 가문의 지분 매입과 일본인 최대주주 등장
민대식은 경상합동은행 주식을 매입하고, 민씨 가문이 운영하는 계성제지와 동일은행을 통해 경상합동은행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이를 통해 총 주식 4만 5000주의 38.7%를 차지하면서, 1936년 말 경상합동은행의 최대 주주는 정재학에서 동일은행 대주주인 민씨 가문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1939년 6월, 민씨 가문은 경상합동은행 주식을 대구상공은행 행장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에게 양도하여 최대 주주가 일본인으로 변경되었다.[1]
3. 2. 정재학 사망과 정운용의 경영 승계
1940년 4월 2일 그동안 경영을 주도해온 취체역 회장 정재학이 사망하였다.[1] 같은 해 4월 27일 정재학의 장손 정운용이 대표취체역 겸 취체역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 말기 전시금융체제에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1] 비록 일본인 오구라가 최대 주주였지만, 한성은행에 합병되기 직전인 1941년 6월 말 기준 한국인 주주의 주식 보유 비율은 54.6%로 일본인 지분율(45.4%)보다 많았다.[1]
3. 3. 한국인 주주 비율 유지
비록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최대 주주였지만 한성은행에 합병되기 직전인 1941년 6월 말 기준 한국인 주주의 보유 주식 비율은 54.6%로 일본인 지분율 45.4% 보다 많았다.[1]
4. 한성은행으로의 흡수 합병과 조흥은행으로의 계승
경상합동은행은 대구상공은행 대신 수도권 소재 한성은행과 합병을 추진, 1941년 8월 10일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되었다.[3]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은 1956년 10월부터 1961년 4월 30일까지 조흥은행 5대 행장을 역임했다. 정씨 가문이 일군 경상합동은행의 지분을 일본인에게 넘긴 민씨 가문은 조흥은행의 지분을 상당 부분 확보했음에도 은행장을 배출하지 못했다.[3] 한편,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신설 합병으로 탄생한 조흥은행은 민족계은행 통폐합의 종지부라는 의미도 지녔다. 이때 국내에 잔존한 은행은 중앙은행 격인 조선은행, 특수은행인 조선식산은행과 저축은행, 그리고 일반은행인 조흥은행과 조선상업은행만 남게 되었다.[3][1]
4. 1. 정운용의 한성은행 및 조흥은행 경영 참여
정운용은 1941년 10월 1일 한성은행 상무취체역에 취임했다.[3] 1945년 11월 미군정의 내정으로 해방 후 조흥은행의 2대 행장이자 첫 한국인 행장이 되었다.[3][1] 1904년생인 정운용은 만 41세로 은행장에 임명되어, 조흥은행 역사상 최연소 행장으로 기록됐다.[5][1]4. 2. 조흥은행, 민족계 은행 통합의 역사
한성은행은 동일은행과의 합병을 통해 조흥은행으로 재탄생했다. 조흥은행은 한성은행 계열(한성, 해동, 구포, 주일, 대구)과 동일은행 계열(한일, 호서, 동래, 호남) 등 9개 민족계 은행의 통합으로 설립된, 민족자본의 최종 집결지였다.[4]한성은행 계열 | 동일은행 계열 |
---|---|
경상합동은행은 대구상공은행 대신 수도권 소재 한성은행과 합병을 추진, 1941년 8월 10일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되었다. 정재학의 맏손자인 정운용은 1941년 10월 1일 한성은행 상무취체역에 취임했다.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신설합병으로 탄생한 조흥은행은 민족계은행 통폐합의 종지부라는 의미도 지녔다.[3]
5. 일제강점기 민족 은행
행명 | 존속 기간 | 비고 |
---|---|---|
대구은행 | 1913년~1928년 | |
구포은행 | 1912년~1915년 | 경남은행으로 행명 변경 |
한성은행 | 1887년~1943년 | |
주일은행 | 1918년 | |
해동은행 | 1920년~1938년 | |
한일은행 | 1906년~1931년 | |
호서은행 | 1913년~1931년 | |
동래은행 | 1918년~1933년 | |
호남은행 | 1920년~1942년 |
참조
[1]
서적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2]
서적
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77
[3]
서적
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77
[4]
서적
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77
[5]
서적
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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