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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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종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에서 근무하고,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경찰 요직과 평안남도 성천군수, 순천군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 조흥은행 취체역과 행장을 지냈으며,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으로 동계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 록펠러 재단 초청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고, 사단법인 법시사를 운영했다. 1977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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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형은 1959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 전문가,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세계은행 컨설턴트,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고 더불어민주당, 열린민주당에서 활동했다. - 대한민국의 금융인 - 조순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인 조순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민선 1기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 일제강점기의 관료 -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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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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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종원 |
출생일 | 1896년 5월 22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시 남일동 |
사망일 | 1977년 3월 12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
사망 원인 | 노환 |
국적 | 대한민국 |
배우자 | 신양정 |
자녀 | 정운철 (장남) 정운익 (차남) |
부모 | 정재학 |
친척 | 정은정 (손녀) 정운용(조카) |
학력 | |
학교 | 일본 니혼대학교 법학과 전문부 |
직업 | |
직업 | 은행장 금융인 관료 |
주요 경력 | |
주요 경력 | 조흥은행 5대 행장 평안남도 성천군수 평안남도 순천 군수 |
2. 생애
정종원은 1918년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은행에 잠시 근무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22년부터 19년간 경상도와 평안남도에서 경찰 간부, 성천군수, 순천군수 등을 역임하며 관료 생활을 했다.
해방 후 1947년 조흥은행 이사로 선임되었고, 1956년부터 1961년 4월까지 조흥은행장을 지냈다. 그는 조흥은행 대주주였으며, 국내 아이스하키 발전을 후원하여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제4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역임했다.
행장 퇴임 후에는 록펠러 재단 초청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했고,[1] 귀국 후에는 사단법인 법시사 운영에 힘썼다. 1977년 3월 12일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정종원은 1918년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식민지 시절 중앙은행 역할을 했던 조선은행에 잠시 근무하였다. 당시 그는 가업인 은행업을 염두에 두고 성실히 근무했으며, 훗날 조흥은행 임원을 거쳐 행장에 오르게 된다.[1]2. 2. 언론 활동
1918년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은행에 잠시 몸담았던 정종원은, 일본 유학 시절 지인들이었던 동아일보 핵심 경영진들과의 인연으로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지령 1호에 창간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지면에는 그의 개명 전 이름인 정충원으로 기록됐다.[1]정종원은 1914~1918년 일본 유학 시절 송진우(동아일보 3대 사장), 최두선 (8대 국무총리), 장덕수 (보성전문 교수, 동아일보 이사), 신익희(독립운동가), 김연수(경성방직 삼양사 사장), 이광수 (소설가) 등과 교류했다.[5] 이러한 인맥을 바탕으로 정종원은 동아일보 경상북도 지역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는 정충원이란 이름을 쓰고 있어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 13면 창간 특집 기사 '동아일보 발기인 명단'에 대구 지역 발기인 정충원으로 기록됐다.[6][7]
2. 3. 관료 생활
1922년부터 1941년까지 19년간 경상도 일대와 평안남도에서 경찰 요직을 거쳤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는 평안남도 성천군수와 순천군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 좌익 세력의 처단 위협을 피해 월남했으나, 부인과 2남 4녀는 북에 남겨졌다. 부인 신양정은 대동강에서 나룻배를 이용, 서해를 거쳐 6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가족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긴 그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경북경찰국장 제의를 받았으나, 부인의 반대로 공직에 복귀하지 않았다.[8]2. 4. 조흥은행 경영
1947년 조흥은행 취체역(이사)으로 선임된 뒤, 1949년 상무, 1950년 전무를 거쳐 1956년 10월 23일 조흥은행 5대 행장에 선임되었다.[9] 윤호병 전 재무부장관이 그를 조흥은행 취체역(이사) 겸 특수업무부장으로 추천한 결과였다. 그의 조카 정운용은 1945년 11월 조흥은행 2대 행장이자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으로 이미 선임된 바 있었다. 1956년 3월 3일 개장된 증권거래소에서 조흥은행은 종목번호 '00001'을 부여받으며 대한민국 최고령 기업이자 최초의 상장사가 되었다.[9]정재학은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서 27년간 은행장을 역임하였고, 3남 정종원과 장손 정운용을 조흥은행장으로 배출하였다. 3대에 걸쳐 은행장을 낸 사례는 정재학 가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대한 정씨 가문의 지분은 조흥은행 출범 당시 조흥은행 주식으로 변경되었다. 정종원과 정운용은 조흥은행 대주주로 남게 되었다.[10][11][12][13][14]
2. 5. 조흥은행 경영권 분쟁
1950년대 중반 정재학 가문과 민영휘 가문의 조흥은행 최대주주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급부상했다. 이병철은 장내외에서 조흥은행 주식을 대량 매수하여 50%를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한일은행 80%, 상업은행 30% 등 주요 시중은행 주식까지 대거 차지했다. 금융계를 독점하려는 재벌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17] 이병철은 기타 은행 지분까지 사들이며 전체 시중은행 주식의 50%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정종원 행장은 행장 자리를 유지했다.정종원은 이병철마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정계, 관계에 인맥이 두터웠다. 게다가 지역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이병철과 달리 정종원은 일제 강점기 내내 최고층 재벌 2세로 성장한 초상류층이었다. 정종원은 1920년 동아일보 창간발기인(총 79명)으로 참여, 언론계와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18]
이병철은 정재학의 3남이자 조흥은행장인 정종원과 다각도로 교류하고 있었고 언론을 통해 정씨 가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19][20] 1956~1957년 진행된 은행 귀속주 불하과정에서 민 씨가문과 정씨가문 간 지분경쟁에서 정씨 측에 힘을 실어줬다.
이병철은 당시 대구에서 서울 장충동 1가 110번지[21]로 거처를 옮겼다. 정종원 자택 인근이었다.[22][23] 이웃이 된 이후 정종원과 이병철의 부인들은 친분이 두터워졌고 그로 인해 자손들은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정종원의 막내사위인 장유상 KDI정책대학원 교수 (전 보스턴대 교수)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자문역을 맡으면서 삼성의 미국 진출에 기여했다.[24]
정종원은 공교롭게도 1961년 5.16 군사정변 발발 보름 전 4년 반 동안 이어온 행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 검찰이 추진한 3.15 부정선거자금에 대한 특검에서 수사 대상에 올랐지만 공소조차 진행되지 못한 채 종결됐다.[25] 그러나 군사정변 발발 직후 이병철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시중 은행 주식을 모두 강제 환수당했다. 이병철은 조흥은행 70%, 한일은행 60%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26]
정부가 조흥은행 등 시중은행의 주식을 모두 거둬들이면서 주요 은행의 지배주주는 정부가 차지하게 됐다. 관치금융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부는 1960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금융산업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자금 공급은 은행 자율보다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정종원 행장이 5.16 쿠데타 직전 은행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부는 은행을 정부 경제성장전략의 들러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은행은 대출심사권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은행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은 철저히 통제됐고, 사실상 제대로 된 경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27][28][29]
2. 6.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활동
정종원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제4대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국내 동계스포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1] 조흥은행장 재임 시절 국내 아이스하키 발전을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2. 7. 사단법인 법시사(法施社) 운영
정종원은 1960년 10월 사단법인 법시사(法施社)를 설립했다.[31] 법시사는 1967년 8월까지 '법시(法施)'를 사보 형식으로 29호까지 계간 형태로 발행했다. 이후 잡지윤리강령에 따라 공보처에 정식 등록하고, 1967년 9월부터 잡지 형태로 전환하여 '법시' 창간호를 발행했다.[31] 창간호에는 미당 서정주 시인이 '무제'라는 시를 특별 기고했다.[31]'법시'는 선종 불교에 심취했던 정종원이 재정 지원을 맡았고, 김세련 전 한국은행 총재, 문종건 전 조흥은행장 등도 후원자로 참여했다.[32] 1960년대 초부터 여러 불교 잡지가 창간되었지만,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폐간된 반면, '법시'는 1960년대 최초로 발간된 불교 잡지로 평가받는다.
정종원 사후에는 부인 신양정 여사가 이사장을 맡았고, 이후 후손들이 운영을 이어받아 1990년 6월까지 '법시'를 발간했다.[31] '법시' 창간 이후 1968년 11월 '법륜', 1974년 '불광', 1979년 '여성불교' 등 다양한 불교 잡지가 창간되었으나, 1990년대 불교계 미디어가 신문으로 이동하면서 대부분 정간되었다.[33][34]
2. 8. 만년
행장 퇴임 직후 6개월 동안 록펠러 재단의 초대를 받아 미국, 유럽 시찰에 나섰다.[1] 1977년 3월 12일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2]3. 가족 관계
부인은 경기여고와 서울사범대 출신의 교사였던 신양정(신양숙)이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전 배우자와의 사이에 자녀들이 있었다. 신양정은 정종원 사후 법시사 이사장과 법시 발행인을 역임했다.[3]
장남 정운철은 하와이 최연소 부영사와 일본 고베 총영사를 역임했다. 정운철은 두산그룹 박용성과 동서 지간이다. 정운철과 박용성의 장인은 삼성물산 대표를 역임한 김선필이다.
막내 정운익은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처음으로 직접 구성했다. 그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집행위원을 겸직했다.[4] 정종원 행장 내외가 생전에 장충동 본가에서 키우며 마지막으로 안아 본 손녀가 정운익의 3녀인 뉴욕퀸이다.
4. 남북 이산가족 위기
1945년 8.15 해방 당시 평안남도 순천군수로 재직 중이던 정종원은 좌익 세력의 처단 협박을 피해 홀로 월남하였다.[8] 그러나 부인 신양정과 2남 4녀는 북에 남겨졌다.
부인 신양정은 감시망을 피해 대동강에서 배를 얻어 타고 서해를 거쳐 6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8] 정종원은 가족을 잃고 이산가족이 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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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창간발기인 정종원 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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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선원 지령 2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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