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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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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성은 중국 동북 지역, 내몽골 자치구, 허베이성 등지에 위치한 여러 장소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이 중 지린성 안도현에 위치한 고려성은 발해 시대 촌락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중화민국 시기 사찰지와 우물, 연못 유지가 남아있다. 내몽골 자치구의 고려성은 1940년 몽고 지방지도에 표시되었으며, 성곽 형태를 띠고 있다. 허베이성 고려성은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봉화대가 남아있다. 고려성은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연개소문이 당나라 군대를 추격하며 쌓은 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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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
고려성
고려인의 위치
고려인의 위치
위치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민족고려인
언어
공용어한국어 (고려말)
러시아어
우즈베크어
카자흐어
종교러시아 정교회
개신교
불교
토속 신앙
관련 정보
관련 민족한민족
고려인

2. 위치

고려성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린성, 내몽골 자치구, 허베이성 등에 고려성 유적이 남아있다.[1][2][3]

2. 1. 지린성 고려성

중국 지린성에 있는 고려성


'''고려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길림성) 안도현(安圖縣) 송강진(松江鎭)에서 서북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있다. 송강진은 소사하향(小沙河鄕)과 접경한 산등성이 남쪽 기슭에 있으며, 남쪽으로 이도강과 350m, 서북쪽으로 소사하향 사하둔(沙河屯)과 2km 떨어져 있다. 동쪽은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다. 유지가 자리잡은 곳은 평탄하며 바람이 없고 볕이 잘 드는 지역으로, 면적은 동서 140m, 남북 100m이다. 이미 경작지로 개간되었다. 지면에는 베무늬기와편들이 흩어져 있으며, 언강이 있는 기와·지압문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고려성이라고 부른다.[1]

유지 가운데에는 중화민국 시기 사찰지가 있다. 유지 동쪽에는 건축 기단이 있는데 주변보다 약 1m 정도 높다. 규모는 동서 18m, 남북 12m이다. 위쪽에는 커다란 초석·회색 네모 벽돌·니질홍갈도기편(泥質紅褐陶器片) 등이 흩어져 있는데, 이 유물들은 민국 시기 사찰지와 같은 시기이다. 이 기단에서 동쪽으로 약 16m 떨어진 곳에 이미 무너져 버린 우물이 있으며, 잔존 지름은 2.5m이다. 우물자리에서 서쪽으로 약 6m 떨어진 곳에도 연못 유지가 있는데, 지름은 4m, 깊이는 1.5~2m이다. 유지 규모와 흩어져 있는 유물에 근거하면 발해 시기 비교적 큰 촌락 유지이다.[1]

2. 2. 내몽골 자치구 고려성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 임서현(内蒙古自治区赤峰市林西县) 북쪽 50km 지점 백탑자(白塔子)에 있는 고려성이다. 1940년 10월에 중화민국 정부에서 발행한 몽고 지방지도의 한 부분으로 우측 북위 44도 부근에 고려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대흥안령산맥을 뒤로하여 길게 성을 쌓았음을 볼 수 있다.[2]

2. 3. 허베이성 고려성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무닝현 온천보(河北省秦皇岛市抚宁县温泉堡村중국어) 북쪽 산중 가오쓰촌(高氏村)에 위치한다. 친황다오시(秦皇岛市)에서 자동차로 온천보까지는 20분쯤 걸린다. 고려성터와 우물이 남아 있다. 산 위에 있는 봉화대는 청나라 때까지 사용했다고 한다.[2][3]

3. 역사적 배경 및 전설

고구려645년(보장왕 4년)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둔 역사적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당 태종은 한쪽 눈을 잃는 피해를 입고 후퇴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오골성과 합세하여 요하까지 추격, 당나라 군대를 섬멸했다. 또한, 연개소문은 만리장성을 넘어 당군의 퇴로를 차단했고, 당군은 요택을 건너며 큰 피해를 보았다. 설인귀의 도움으로 겨우 장안으로 돌아간 당 태종은 이후 고구려 원정에 실패했다.[1][2][3]

이후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고 중원 공략의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해 여러 곳에 성을 쌓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 성들은 청나라 말기까지 고려성(高麗城)이라 불렸으며,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가 전해진다. 여기서 고려(高麗)는 고구려를 가리키며,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와는 구별된다.[1][2][3]

3. 1. 안시성 전투와 당 태종의 패퇴

645년(보장왕 4년), 고구려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크게 승리하였다. 당 태종은 한쪽 눈을 잃고 전 병력을 후퇴시켰지만, 고구려군은 오골성까지 합세하여 총공격을 시작하고 요하(遼河)까지 추격하여 당나라 군대를 섬멸하였다.[1][2][3]

안시성 전투가 한창일 때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 3만 명은 만리장성을 넘어 적봉진(赤峰鎭)을 따라 남하하여 당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당군은 진흙뻘로 이루어진 요택을 건너며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병력과 소, 말의 십중팔구가 여기서 죽었다고 한다.[1][2][3]

소수의 병력이 간신히 요택을 건넜지만, 연개소문의 대군이 요소요소에서 길목을 막고 당군을 공격하며 당 태종을 사로잡기 위해 추격하였다. 당 태종은 군사 옷으로 변장하였지만 결국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어 포로가 되기 직전에 설인귀가 구출하여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당군이 고구려군과 싸우는 틈에 당 태종은 몇 명의 장수들과 일부 병사들만 이끌고 몰래 빠져나가 겨우 장안에 도착하였다. 당시 연개소문에게 쫓겨가던 당 태종이 지나던 고을마다 설화들이 남아있어 그때의 비참한 상황들을 잘 보여준다.[1][2][3]

요동성 해성(海城) 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에는 당 태종이 진흙뻘인 어니하(淤泥河)에 빠져 사로잡히자 연개소문이 당 태종에게 항복 문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도 나온다. 처음 출정할 때 10만, 그 뒤 지원군까지 합해 50만 정도가 고구려 정벌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안에 도착한 수는 불과 몇 천 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당서》(唐書)에도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베이징 근처까지 추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당군의 재침에 대비하고 장차 중원 공략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도처에 성을 쌓아 요새를 만들고 주민들까지 이주시켰다. 이때 생긴 성들이 청나라 말기까지 남아 고려성(高麗城)이라 불렸다.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고려(高麗)라는 말은 고구려(高句麗)를 가리키는 말로 과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와는 구별된다.[1][2][3]

3. 2. 연개소문의 추격과 고려성 축조

고구려는 645년(보장왕 4년) 안시성에서 당 태종의 당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당 태종은 한쪽 눈을 잃고 전 병력을 후퇴시켰지만, 고구려군은 오골성까지 합세하여 총공격을 개시하고 요하까지 추격하여 당나라 군대를 섬멸하였다.[1][2][3]

안시성 전투 당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 3만은 만리장성을 넘어 적봉진(赤峰鎭)을 따라 남하하여 당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당군은 요택을 건너며 큰 피해를 입었는데, 병력과 소, 말의 십중팔구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1][2][3]

소수의 당군이 요택을 건넜지만,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사로잡기 위해 추격하며 곳곳에서 당군을 공격하였다. 당 태종은 군사 옷으로 변장하고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설인귀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가 장안으로 돌아갔다. 연개소문에게 쫓기던 당 태종이 지나던 곳마다 관련 설화가 남아있다.[1][2][3]

요동성 해성(海城)의 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에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도 묘사된다. 당나라 사서인 당서(唐書)에는 고구려 정벌에 50만 명이 동원되었으나, 장안에 도착한 수는 몇 천 명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2][3]

연개소문은 북경 근처까지 추격하며 당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고, 중원 공략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여러 곳에 성을 쌓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 성들은 청나라 말기까지 고려성(高麗城)이라 불렸으며,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가 전해진다. 여기서 고려(高麗)는 고구려를 가리키며,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와는 구별된다.[1][2][3]

4. 추가 정보

유지 가운데에는 중화민국 시기 사찰지가 있다. 유지 동쪽 편에는 주변보다 약 1m 정도 높은 건축 기단이 있는데, 규모는 동서 길이 18m, 남북 너비 12m이다. 위쪽에는 커다란 초석, 회색을 띤 네모 벽돌, 니질홍갈도기편(泥質紅褐陶器片) 등이 흩어져 있는데, 이 유물들은 민국 시기의 사찰지와 동일한 시기의 것들이다. 이 기단에서 동쪽으로 약 16m 떨어진 곳에는 이미 무너져 버린 우물이 있다. 잔존 지름은 2.5m이다. 우물 자리에서 서쪽으로 약 6m 떨어진 곳에도 연못 유지가 있는데, 그 지름은 4m, 깊이는 1.5m~2m이다. 유지 규모와 흩어져 있는 유물에 근거하면 발해 시기 비교적 큰 촌락 유지이다.[1]

참조

[1] 서적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도서출판 창해 2007
[1] 서적 북국발해탐험 박문사 2012
[2] 서적 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국가안보전략사상사 중 고대편 21세기군사연구소 2007
[3] 서적 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 소명출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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