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키부노 나이시
1. 개요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이즈미 시키부와 다치바나노 미치사다의 딸로, 헤이안 시대 중기의 여류 가인이다. 쇼시 천황을 섬겼으며,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후지와라노 사다요리 등과 교제했다. 후지와라노 긴나리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20대 후반에 사망했다. 그녀의 시 4수가 칙찬와카집에 수록되었으며, 특히 오구라 백인일수에 수록된 "오에야마"로 시작하는 시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녀의 일화는 여러 설화집에 수록되었으며, 어머니가 대신 지어줬다는 소문을 재치 있게 받아친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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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고시키부노 나이시 |
|---|---|
| 원어 이름 | 小式部内侍 (일본어) |
| 로마자 표기 | Koshikibu no Naishi |
| 생몰년 | 999년경 - 1025년 11월 |
| 활동 시기 | 헤이안 시대 |
| 직업 | 와카 작가, 시인 |
| 국적 | 일본 |
| 아버지 | 다치바나노 미치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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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이즈미 시키부 |
| 형제자매 | 형제자매 관계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음 |
| 관련 인물 | 오에노 마사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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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 출생 -
포증
포증은 북송 시대의 청렴하고 강직한 정치가이자 관료로, '포청천'이라고도 불리며 부패 척결과 공정한 판결로 명성을 얻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사후에는 청백리의 상징이 되었다. -
999년 출생 -
후지와라노 이시
후지와라노 이시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딸로 고이치조 천황의 황후였으며, 두 딸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38세에 사망했다. -
다치바나씨 (공가) -
다치바나노 가치코
다치바나노 가치코는 헤이안 시대 사가 천황의 황후로서 닌묘 천황을 낳았고, 타치바나 씨 출신 최초이자 마지막 황후였으며,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으로 단린사를 창건하고 조와의 변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
다치바나씨 (공가) -
다치바나노 기미나가
다치바나노 기미나가는 헤이안 시대에 후지와라노 후유츠구와 결혼하여 여러 아들을 두었고, 이 아들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다치바나 가문의 번영에 기여하여 후손들이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1025년 사망 -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폴란드의 공작이자 초대 국왕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용감왕으로도 불리며, 군사적 능력과 외교적 수완으로 폴란드를 강국으로 만들고 기독교를 장려하여 문화 발전에 공헌했다. -
1025년 사망 -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바실리오스 2세는 97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내전과 반란을 진압하고 불가리아를 정복하여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으며,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여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2. 생애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이즈미 시키부와 다치바나노 미치사다의 딸로 태어났다. 1009년경부터 어머니를 따라 쇼시 천황을 섬겼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후지와라노 요리무네, 후지와라노 노리나가, 후지와라노 사다요리 등 많은 귀족 남성들과 교제하였다. 후지와라노 노리미치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세이엔을, 후지와라노 노리나가와의 사이에서는 딸을 낳았다.
후지와라노 긴나리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어머니 이즈미 시키부가 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읊은 시는 애상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3. 작품 활동
고시키부노 나이시의 시 4편은 후습유와카집과 금엽화가집 등 칙찬와카집에 수록되었다. 오구라 백인일수 60번째에 수록된 시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후지와라노 사다요리가 고시키부노 나이시에게 어머니에게 대작을 부탁했는지 놀렸을 때,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즉석에서 시를 읊어 재치 있게 응수했다. 후지와라노 사다요리는 답가도 하지 못하고 망신을 당했고, 이 사건으로 고시키부노 나이시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고 한다.
3.1. 오구라 백인일수
오구라 백인일수 60번째에 수록된 시는 다음과 같다.
| 원문 | 로마자 표기 | 한국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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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어머니가 시를 대신 지어줬다는 소문을 재치 있게 받아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노래 시합(우타아와세)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야스마사와 함께 단고(丹後)에 있었다. 후지와라노 사다요리는 고시키부노 나이시에게 어머니에게 대작을 부탁했는지 놀렸지만,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즉석에서 위 시를 읊어 재치있게 응수하였다. "오에야마(大江山)를 넘어, 가까운 이쿠노(生野)로 향하는 길조차 간 적이 없으니 아직 어머니가 있는 먼 아마노하시다테의 땅을 밟은 적도 없고, 어머니로부터의 편지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의미로, "이쿠노(行く野・生野)"와 "후미(文・踏み)"를 이용한 카케코토바(掛詞)를 사용하였다. 당황한 후지와라노 사다요리는 답가도 하지 못하고 망신을 당했고, 이 사건으로 고시키부노 나이시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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