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르제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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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타르제스 2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왕으로, 아르타바누스 2세 사후 왕위를 찬탈했으나 바르다네스 1세에게 패배하여 히르카니아로 도망쳤다. 이후 다하에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회복하고 파르티아 동부에 세력을 확장했으며, 바르다네스 1세가 암살된 후 단독으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으로 메헤르다테스와 대립하였고,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동생 보노네스 2세가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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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르제스 2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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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왕중왕 |
로마자 표기 | Gotarzes II |
통치 | |
국가 | 파르티아 제국 |
직위 | 왕 |
재위 기간 | 40년 – 51년 |
선임자 | 바르다네스 1세 |
후임자 | 보노네스 2세 |
가문 | |
왕조 | 아르사케스 왕조 |
아버지 | 생부: 게우 양부: 아르타바누스 2세 |
어머니 | 알려지지 않음 |
개인 정보 | |
출생 | 알려지지 않음 |
사망 년도 | 51년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2. 생애
고타르제스 2세는 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르타바누스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파르티아 왕을 칭했다. 그러나 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 중 한 명인 바르다네스 1세는 도망에 성공하여, 40년에 고타르제스 2세에 반대하는 군사 활동을 일으켰다. 고타르제스 2세는 패배하여 동쪽으로 도망쳐 히르카니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다하에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회복하고, 파르티아 동부에 세력을 확장했다. 이에 바르다네스 1세도 동방 원정을 했지만, 뚜렷한 결말을 맺지 못한 채 일시적인 강화가 맺어졌다. 43년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고타르제스 2세는 바르다네스 1세에게 패배하여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47년 바르다네스 1세가 암살되면서 고타르제스 2세가 단독 파르티아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반란이 발생했다. 고타르제스 2세에 반대하는 카렌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이 로마로 보내졌던 전 파르티아 왕 보노네스 1세의 아들 메헤르다테스를 옹립한 것이다. 메헤르다테스는 로마의 지원도 받아 파르티아 영토를 침공했다. 고타르제스 2세는 이를 요격하여 메헤르다테스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메헤르다테스는 양쪽 귀가 잘렸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타르제스 2세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사후, 종속 왕국 중 하나인 메디아의 왕이었던 동생 보노네스 2세가 즉위했다.
2. 1. 초기 생애와 출신 배경
고타르제스 2세가 파르티아의 왕이 되기 전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고타르제스 2세는 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이었지만, 그가 친아들인지 입양된 아들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 요세푸스는 고타르제스 2세를 볼로가세스 1세의 형제라고 불렀다.[1] 반면에 타키투스는 고타르제스 2세를 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이라고 명시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고타르제스를 파르티아의 찬탈자이며, 그의 형제 아르타바누스와 그의 가족을 살해한 인물로 언급했다.[2]로마 자료는 그의 배경에 대해 불분명하지만, 다른 현존하는 증거는 고타르제스 2세의 출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밝혀준다. 이란 쿠르디스탄의 주요 도로에 있는 사르풀-이-조하브에서 로울린슨에 의해 발견된 암각 부조에 새겨진 비문은 그를 "게브의 아들 고타르제스"로 소개한다.[3] 이 비문을 통해 고타르제스 2세는 그 지역의 히르카니아 총독으로 활동한 게브라는 귀족의 아들로 추정된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의 아르타바누스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아르타바누스 2세가 망명했을 때 그에게 입양되었다.[4] 고타르제스 2세가 나중에 왕위를 차지했을 때, 그는 "아르사케스, 왕 중의 왕, 고타르제스, 아르타바노스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현존하는 동전을 통해 자신을 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로 언급했다.
2. 2. 왕위 계승 분쟁과 바르다네스 1세와의 대립
서기 40년, 파르티아의 왕 아르타바누스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에게 왕국을 맡겼다.[5] 그러나 왕위는 아르타바누스 2세의 양자인 고타르제스 2세에게 넘어갔다.[5] 고타르제스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형제 아르타바누스와 그의 가족을 처형했고, 이로 인해 바르다네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란이 일어났다.[5]바르다네스 1세는 기습 공격으로 고타르제스 2세를 격파하고 파르티아 영토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했다.[5] 그러나 35년부터 반란을 일으켰던 메소포타미아 도시 셀레우키아는 바르다네스 1세를 인정하지 않아 포위 공격을 당했다. 셀레우키아 포위가 길어지면서 고타르제스 2세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중앙 아시아의 박트리아로 도망친 바르다네스 1세를 몰아냈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아르사케스 왕조 출신 왕 오로데스를 폐위시키고 파르나바즈 왕조의 왕자 미트리다테스를 임명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바르다네스 1세와 고타르제스 2세가 전투 직전, 고타르제스 2세가 유력 집단의 음모를 바르다네스 1세에게 알리면서 둘은 합의에 도달했다. 바르다네스 1세는 왕위를 유지하고 고타르제스 2세는 히르카니아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바르다네스 1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려 했으나,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의 전쟁 위협과 고타르제스 2세와의 갈등 재개로 포기했다. 바르다네스 1세는 미디아-히르카니아 국경의 에린데스 강에서 고타르제스 2세를 격파하고 아리아까지 정복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사냥 중 암살당했다.
2. 3. 단독 통치와 메헤르다테스와의 갈등
서기 40년, 파르티아의 왕 아르타바누스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가 왕국을 물려받았다.[5] 그러나 왕좌는 아르타바누스 2세의 양자인 고타르제스 2세에게 빼앗겼다.[5] 고타르제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형제 아르타바누스와 그의 아내, 아이를 처형했고, 이에 바르다네스에게 백성들의 호소가 이어졌다. 바르다네스는 고타르제스를 기습하여 이틀 만에 약 603.50km를 이동하여 그를 격파했다.[5] 이후 바르다네스는 인근 파르티아 지방 총독들의 지지를 받으며 파르티아 왕국의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했다.[5]35년부터 반란을 일으켰던 메소포타미아 도시 셀레우키아는 바르다네스를 인정하지 않아, 바르다네스는 곧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셀레우키아 포위가 길어지면서 고타르제스는 이 분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중앙 아시아의 박트리아로 도망친 바르다네스를 몰아냈다.
한편, 아르메니아는 아르사케스 왕조 출신 왕 오로데스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폐위되고, 파르나바즈 왕조의 왕자 미트리다테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혼란을 겪었다. 바르다네스와 고타르제스가 전투를 벌이기 직전, 고타르제스가 유력 집단에 의해 계획된 음모를 바르다네스에게 알리면서 둘은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 내용은 바르다네스가 왕관을 유지하고 고타르제스가 히르카니아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바르다네스는 아르메니아 침공을 준비했지만, 시리아의 로마 총독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의 전쟁 위협과 고타르제스와의 갈등 재개로 계획을 포기했다. 바르다네스는 미디아-히르카니아 국경의 에린데스 강에서 고타르제스를 격파하고, 아리아까지 파르티아 지방을 정복했다. 그러나 그는 파르티아 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사냥 중에 암살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타르제스 2세가 사망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질병으로, 요세푸스는 그가 살해당했다고 진술했다). 그의 마지막 동전은 서기 51년 6월에 발행되었다.
2. 4. 죽음
고타르제스 2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한 파르티아 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그의 경쟁자였던 바르다네스 1세는 사냥 중에 암살당했다.[5]얼마 지나지 않아 고타르제스 2세가 사망했다. 타키투스는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했지만, 요세푸스는 그가 살해당했다고 기록했다. 그의 마지막 동전은 서기 51년 6월에 발행되었다. 고타르제스 2세의 뒤를 이어 잠시 그의 삼촌 보노네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 다음은 보노네스 2세의 아들인 볼로가세스 1세가 계승했다.
3. 문화적 묘사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신이 된 클라우디우스''에서 고타르제스 2세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소설에서 고타르제스는 잔혹한 폭군으로 그려진다. 클라우디우스가 고타르제스에게 퍼붓는 가장 심한 모욕은 그가 칼리굴라의 숭배를 받았고, 미친 로마 황제의 측근이었다는 것이다.
참조
[1]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2]
서적
Annals
[3]
서적
History of the Parthian Empire (-250 – 227)
[4]
서적
History of the Parthian Empire (-250 – 227)
[5]
서적
11.8
https://www.perseus.[...]
[6]
서적
Relief Sculptures de Iran Ancien
https://archive.org/[...]
[7]
서적
Iran
https://books.google[...]
Gottmer Uitgevers Groep b.v.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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