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타바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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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타바누스 2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군주로, 그리스어 'Artábanos'에서 유래된 라틴어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아르사케스 왕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다하족 사이에서 성장하여 아트로파테네 메디아의 통치자가 되었고, 보노네스 1세와의 왕위 다툼에서 승리하여 파르티아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동안 로마와의 외교적 갈등이 있었으며, 아르메니아 왕위 문제로 로마와 대립하기도 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귀족들의 반발로 폐위되었다가 이자테스 2세의 도움으로 복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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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바누스 2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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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제왕 |
왕조 | 아르사케스 왕조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출생 | 30–25 BC |
출생지 | 다히스탄 |
사망 | 38/41 AD |
통치 정보 | |
아트로파테네 왕 즉위 | ???–12 AD |
선임자 (아트로파테네) | 아르타바스데스 2세 |
후임자 (아트로파테네) | 보노네스 2세 |
파르티아 왕 즉위 | 12–38/41 AD |
선임자 (파르티아) | 보노네스 1세 티리다테스 3세 (경쟁 왕) |
후임자 (파르티아) | 바르다네스 1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다해 또는 아트로파테네 왕자 |
어머니 | 프라아테스 4세의 이름 없는 딸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음 |
자녀 | 아르사케스 1세 오로데스 바르다네스 1세 아르타바누스 고타르제스 2세 (입양) |
2. 명칭
Artabanusla(아르타바누스)는 라틴어 형태이며, 이는 다시 그리스어 ''Artábanos'' (Ἁρτάβανοςgrc)에서 유래되었고, 고대 페르시아어 ''*Arta-bānu''("아르타의 영광")에서 파생되었다.[1] 파르티아어와 중세 페르시아어 변형은 ''Ardawān''(𐭍𐭐𐭕𐭓xpr)이었다.[2][1]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연대기''에서 경쟁자였던 티리다테스 3세의 지지자들이 아르타바누스를 "어머니 쪽으로는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지만, 그 외 모든 면에서는 타락한 자"로 여겼다고 기록했다.[1] 그러나 역사학자 마레크 올브리히트는 타키투스뿐만 아니라 요세푸스와 카시우스 디오도 아르타바누스와 그의 아들들을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으로 언급한다고 지적한다.[1] 올브리히트는 아르타바누스가 부계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며, 아마도 미트리다테스 2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고, 다하에 사람들(아르타바누스가 그들과 함께 자랐음) 사이에서 살았던 가문의 지파를 통해 이어진다고 보았다.[1] 올브리히트는 아르타바누스의 어머니가 파르티아의 왕중왕 프라아테스 4세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 이러한 관계로 인해 프라아테스 4세의 부계 손자인 티리다테스 3세의 가문은 아르타바누스의 모계 아르사케스 가문 혈통은 인정했지만, 그의 부계는 인정하지 않았고, 가문의 다른 모든 지파를 사생아로 간주했을 것이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아르사케스 왕가의 직계 출신은 아니었다. 타키투스는 저서 ''연대기''에서 경쟁자였던 티리다테스 3세 (재위 35년 - 36년)의 지지자들이 아르타바누스를 "어머니 쪽으로는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지만, 그 외 모든 면에서는 타락한 자"로 여겼다고 기록했다.[1] 그러나 역사가 마레크 올브리히트는 타키투스뿐만 아니라 요세푸스와 카시우스 디오도 아르타바누스와 그의 아들들을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으로 언급한다고 지적한다.[1] 올브리히트는 아르타바누스가 부계로는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며, 아마도 미트리다테스 2세 (재위 기원전 124년 - 기원전 88년)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고, 다하에 사람들(아르타바누스가 그들과 함께 자랐음) 사이에서 살았던 가문의 지파를 통해 이어진다고 보았다.[1]
아르타바누스 2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군주가 된 후, 아르메니아 왕좌에서 보노네스 1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임명하려 했다.[1] 그러나 이는 로마 제국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의붓아들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여 이를 막도록 하였으나, 게르마니쿠스는 파르티아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대신, 게르마니쿠스는 아르타바누스 2세와 협정을 맺어 아르탁시아스 3세를 아르메니아의 새 왕으로 임명하고 보노네스 1세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이로써 로마는 아르타바누스 2세를 파르티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 서기 18년, 아르타바누스 2세와 게르마니쿠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확인했다.[1]
3. 배경 및 가계
그러나 역사학자 요제프 마르크바르트와 마르틴 쇼트키는 아르타바누스가 과거 미디아-아트로파테네를 다스렸던 아트로파테스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아르타바누스는 파르티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지역을 통치했다. 역사학자 리처드 D. 설리번은 이 시기에 글을 쓴 스트라보가 왕조의 창시자 아트로파테스의 계승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했으며, 이는 아르타바누스가 미디아-아트로파테네를 점령한 것이 아트로파테스 왕조의 연속으로 간주되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스트라보는 또한 아르사케스 가문과 아트로파테스 가문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언급했다. 설리번은 아르타바누스가 아트로파테스 왕자와 아르사케스 공주의 결혼으로 태어났으며, 이것이 타키투스의 조상에 대한 언급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설리번은 더 나아가 이것이 아르타바누스(그리고 나중에 그의 형제 보노네스 2세)의 파르티아와 미디아-아트로파테네 모두에 대한 통치가 받아들여진 이유를 설명한다고 말한다. 쇼트키는 이 왕실 부부를 미디아 아트로파테네의 다리우스 1세의 아들(쇼트키는 또한 다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추론함)과 프라아테스 4세의 딸이라고 식별한다. 또는 역사학자 크리스티앙 세티파니는 아트로파테스 왕자가 미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아르타바스데스 1세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4. 초기 생애와 아트로파테네 통치
올브리히트는 아르타바누스의 어머니가 파르티아의 왕중왕 프라아테스 4세 (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2년)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2] 프라아테스 4세의 부계 손자인 티리다테스 3세의 가문은 아르타바누스의 모계 아르사케스 가문 혈통은 인정했지만, 그의 부계는 인정하지 않았고, 가문의 다른 모든 지파를 사생아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요제프 마르크바르트와 마르틴 쇼트키는 아르타바누스가 과거 미디아-아트로파테네를 다스렸던 아트로파테스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아르타바누스는 파르티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지역을 통치했다. 역사가 리처드 D. 설리번은 스트라보가 왕조의 창시자 아트로파테스의 계승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했으며, 이는 아르타바누스가 미디아-아트로파테네를 점령한 것이 아트로파테스 왕조의 연속으로 간주되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한다. 스트라보는 아르사케스 가문과 아트로파테스 가문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언급했다. 설리번은 아르타바누스가 기원전 31년경 아트로파테스 왕자와 아르사케스 공주의 결혼으로 태어났으며, 이것이 타키투스의 조상에 대한 언급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아르타바누스(그리고 나중에 그의 형제 보노네스 2세)의 파르티아와 미디아-아트로파테네 모두에 대한 통치가 받아들여진 이유를 설명한다고 덧붙였다.
쇼트키는 이 왕실 부부를 미디아 아트로파테네의 다리우스 1세 (재위 기원전 66년 - 기원전 65년)의 아들(쇼트키는 또한 다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추론함)과 프라아테스 4세의 딸이라고 식별한다. 역사가 크리스티앙 세티파니는 아트로파테스 왕자가 미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아르타바스데스 1세 (재위 기원전 56년 - 기원전 31년)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기원전 30년에서 25년 사이에 태어난 아르타바누스 2세는 중앙 아시아의 다하족 사이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자 아트로파테네 메디아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이는 파라테스 4세의 말년이나 그의 아들인 파라테스 5세 (재위 기원전 4년 - 서기 2년) 치세 중에 일어났다. 아르타바누스가 아트로파테네 메디아의 왕이 된 배경은 불분명하다. 이 왕국은 그가 파르티아 왕 보노네스 1세 (재위 서기 8년 - 12년)을 공격하는 본부 역할을 했는데, 그는 왕위를 두고 보노네스 1세와 싸웠다. 원래 로마에 거주했던 보노네스 1세는 카렌 가문과 수렌 가문 씨족이 이끄는 파벌에 의해 파르티아 왕위에 앉혀졌다. 그의 통치는 로마인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파르티아 귀족들은 로마에 머무는 동안 로마화된 보노네스 1세에게 빠르게 소외되었다. 수년간의 싸움 끝에 아르타바누스가 보노네스 1세를 물리칠 수 있었고, 보노네스 1세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쳐 그곳의 왕이 되었다.
5. 파르티아 왕위 계승 분쟁
아르타바누스 2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군주가 된 후, 아르메니아 왕좌에서 보노네스 1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대신 임명하려 했다.[1] 이 시도는 로마의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혔는데, 로마는 이를 자국의 이익에 위험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했다.[1] 그 결과,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그의 의붓아들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여 이를 막도록 했다.[1] 그러나 로마 장군은 파르티아 군대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았다. 대신, 게르마니쿠스는 아르타바누스와 협정을 맺어 아르탁시아스 3세를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왕으로 임명하고 보노네스 1세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1]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아르타바누스를 합법적인 파르티아 통치자로 인정했다.[1] 두 제국 간의 우호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아르타바누스와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8년에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났다.[1]
로마인들은 보노네스 1세를 킬리키아로 이주시켰고,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이듬해 살해당했다.[1] 그의 죽음과 아르타바누스의 확고한 지배는 파르티아 귀족들을 분열시켰는데, 그들 모두가 아르사케스 왕조의 새로운 분파가 제국을 차지하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1] 서기 19/20년에 사카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의 파르티아 사트라프(총독)인 곤도파레스는 아르타바누스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1] 그는 "대왕 중의 대왕"과 "''아우토크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새롭게 얻은 독립성을 과시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타바누스와 곤도파레스는 인도-파르티아가 아르사케스 왕조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1]
아르타바누스는 이후 수년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1]
서기 35년에 아르타바누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자신의 아들 아르사케스 1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우려 했다. 로마와의 전쟁은 불가피해 보였다. 파르티아 유력자들 중 아르타바누스 2세에게 적대적인 세력은 티베리우스에게 프라아테스 4세의 후손인 왕을 요청했다. 티베리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손자인 티리다테스 3세를 파견하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에게 동방에서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도록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매우 능숙한 군사적, 외교적 작전을 통해 임무를 완수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추종자들에게 버림받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왕으로 선포된 티리다테스 3세는 파르티아 왕좌를 유지할 수 없었는데, 그가 자신의 백성들에게 로마의 속국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르타바누스 2세는 히르카니아에서 스키타이 용병 부대를 이끌고 돌아와 다시 파르티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티리다테스 3세는 셀레우키아를 떠나 시리아로 도망쳤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벌일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는 37년에 비텔리우스와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타바누스 2세는 다시 폐위되었고, 신나무스가 왕으로 선포되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자신의 봉신인 이자테스 바르 모노바즈 왕에게 의탁했다. 이자테스는 협상과 완전한 사면을 약속하여 파르티아인들이 아르타바누스 2세를 다시 왕좌에 복귀하도록 설득했다.
6. 치세
로마는 보노네스 1세를 킬리키아로 이주시켰고, 보노네스 1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이듬해 살해당했다. 아르타바누스 2세의 확고한 지배는 파르티아 귀족들을 분열시켰다. 기원전 19/20년에는 사카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의 파르티아 사트라프(총독)인 곤도파레스가 독립하여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곤도파레스는 "대왕 중의 대왕"과 "''아우토크라토르(Autokrator)''"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독립을 과시했지만, 아르타바누스 2세와 곤도파레스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1]
아르타바누스 2세는 이후 수년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힘썼으며, 북동쪽 호라즘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또한, 수세기 동안 파르티아 영토였던 서부 박트리아에서도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1]
서기 35년, 아르타바누스 2세는 다시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자신의 아들 아르사케스 1세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이는 로마와의 전쟁 위기를 불러왔다. 파르티아 내 아르타바누스 2세에 적대적인 세력은 티베리우스에게 프라아테스 4세의 후손을 왕으로 요청했고, 티베리우스는 티리다테스 3세를 파견하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비텔리우스의 아버지)에게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도록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군사적, 외교적 작전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고, 아르타바누스 2세는 추종자들에게 버림받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티리다테스 3세는 왕으로 선포되었으나, 로마의 속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파르티아 왕좌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히르카니아에서 스키타이 용병 부대를 이끌고 돌아와 다시 파르티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티리다테스 3세는 셀레우키아를 떠나 시리아로 도망쳤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37년에 비텔리우스와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타바누스 2세는 다시 폐위되었고, 신나무스가 왕으로 선포되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자신의 봉신인 아디아베네 왕국의 이자테스 2세 왕에게 의탁했다. 이자테스는 협상과 완전한 사면을 약속하여 파르티아인들이 아르타바누스 2세를 다시 왕좌에 복귀하도록 설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타바누스 2세는 죽었고, 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의 통치는 아버지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아르사케스 1세, 오로데스, 아르타바누스, 바르다네스 1세, 그리고 고타르제스 2세라는 이름의 양자, 이렇게 네 아들을 두었다.
6. 1. 로마와의 관계
아르타바누스 2세는 아르메니아 왕좌에서 보노네스 1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임명하려 했으나, 이는 로마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반대에 부딪혔다.[1] 티베리우스는 그의 의붓아들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여 이를 막도록 하였으나, 게르마니쿠스는 파르티아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대신, 게르마니쿠스는 아르타바누스 2세와 협정을 맺어 아르탁시아스 3세를 아르메니아의 새 왕으로 임명하고 보노네스 1세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이로써 로마는 아르타바누스 2세를 파르티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 서기 18년, 아르타바누스 2세와 게르마니쿠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확인했다.[1]
로마는 보노네스 1세를 킬리키아로 이주시켰고, 보노네스 1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이듬해 살해당했다. 아르타바누스 2세의 확고한 지배는 파르티아 귀족들을 분열시켰다. 서기 19/20년에는 사카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의 파르티아 사트라프(총독)인 곤도파레스가 독립하여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서기 35년, 아르타바누스 2세는 다시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자신의 아들 아르사케스 1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는 로마와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파르티아 내 아르타바누스 2세에 적대적인 세력은 티베리우스에게 프라아테스 4세의 후손을 왕으로 요청했고, 티베리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손자인 티리다테스 3세를 파견하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비텔리우스의 아버지)에게 동방에서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도록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군사적, 외교적 작전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고, 아르타바누스 2세는 추종자들에게 버림받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티리다테스 3세는 왕으로 선포되었으나, 로마의 속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파르티아 왕좌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히르카니아에서 스키타이 용병 부대를 이끌고 돌아와 다시 파르티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티리다테스 3세는 셀레우키아를 떠나 시리아로 도망쳤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37년에 비텔리우스와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
6. 2. 내부 갈등과 폐위
아르타바누스 2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군주가 된 후, 아르메니아 왕좌에서 보노네스 1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임명하려 했다.[1] 이 시도는 로마의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혔는데,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이를 자국의 이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의붓아들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여 이를 막도록 했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는 파르티아인들의 저항을 받지 않았고, 대신 아르타바누스와 협정을 맺어 아르탁시아스 3세를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왕으로 임명하고 보노네스 1세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아르타바누스를 합법적인 파르티아 통치자로 인정했다. 서기 18년, 아르타바누스와 게르마니쿠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두 제국 간의 우호 관계를 비준했다.
로마인들은 보노네스 1세를 킬리키아로 이주시켰고,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이듬해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과 아르타바누스의 확고한 지배는 파르티아 귀족들을 분열시켰다. 서기 19/20년에 사카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의 파르티아 사트라프(총독)인 곤도파레스는 아르타바누스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 그는 "대왕 중의 대왕"과 "''아우토크라토르(Autokrator)''"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아르타바누스와 곤도파레스는 인도-파르티아가 아르사케스 왕조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르타바누스는 이후 수년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북동쪽에서는 호라즘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그의 노력이 성공하여 이 지역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아르타바누스는 수세기 동안 파르티아 영토였던 서부 박트리아에서도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기 35년, 아르타바누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자신의 아들 아르사케스 1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는 로마와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파르티아 유력자들 중 아르타바누스 2세에게 적대적인 세력은 티베리우스에게 프라아테스 4세의 후손인 왕을 요청했고, 티베리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손자인 티리다테스 3세를 파견하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에게 동방에서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도록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군사적, 외교적 작전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고, 아르타바누스 2세는 추종자들에게 버림받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왕으로 선포된 티리다테스 3세는 파르티아 왕좌를 유지할 수 없었는데, 그가 로마의 속국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르타바누스 2세는 히르카니아에서 스키타이(Scythians) 용병 부대를 이끌고 돌아와 다시 파르티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티리다테스 3세는 셀레우키아를 떠나 시리아로 도망쳤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벌일 만큼 강하지 않았고, 37년에 비텔리우스와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타바누스 2세는 다시 폐위되었고, 키나무스가 왕으로 선포되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자신의 봉신인 아디아베네 왕국의 이자테스 2세 왕에게 의탁했다. 이자테스는 협상과 완전한 사면을 약속하여 파르티아인들이 아르타바누스 2세를 다시 왕좌에 복귀하도록 설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타바누스 2세는 죽었고, 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의 통치는 아버지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6. 3. 인도-파르티아 왕국과의 관계
기원전 19/20년에 사카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의 파르티아 사트라프(총독)인 곤도파레스(Gondophares)는 아르타바누스 2세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1] 그는 "대왕 중의 대왕"과 "''아우토크라토르(Autokrator)''"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새롭게 얻은 독립성을 과시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타바누스와 곤도파레스는 인도-파르티아가 아르사케스 왕조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1]
7. 만다야교와의 관계
만다야교는 아르타바누스 2세로 추정되는 아르타바누스(만다어: Ardbanmyz)라는 왕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를 피해 미디아에 정착하는 것을 도왔다고 여긴다. 그는 만다야교 문헌인 Haran Gawaitha|하란 가와이타myz에 언급되어 있다.[1]
참조
[1]
간행물
Epigraphy of Later Parthia
https://www.research[...]
Voprosy Epigrafiki: Sbornik statei
2013
[2]
서적
Turning the Tables on Jesus: The Mandaean View
https://books.google[...]
Fortress Press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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