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박트리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트리아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 지역으로,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인도-이란인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번성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아케메네스 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쿠샨 제국을 거쳐 에프탈, 사산 제국 등의 영향을 받았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동서 교류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지역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 지역 - 토카리스탄
    토카리스탄은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알라이 산맥 사이 옥수스강 상류 계곡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2세기부터 9세기까지 동이란 박트리아어를 사용하고 에프탈 제국과 서돌궐의 영향을 받았으며 간다라 미술과 이슬람 미술이 발전했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 지역 - 아라코시아
    아라코시아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파키스탄 서부에 걸쳐 있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로,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크로아티아인의 기원과 관련된 가설도 있다.
  • 파키스탄 - 파키스탄의 날
    파키스탄의 날은 1940년 라호르 결의안 통과와 1956년 헌법 발효를 기념하며, 무슬림 독립 국가 건설을 주장한 라호르 결의안은 파키스탄 건국의 초석이 되었고,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포함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 파키스탄 - 파키스탄 자치령
    파키스탄 자치령은 1947년 인도 분할로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독립하여 탄생한 영연방 왕국이었으나, 국경 분할로 인한 혼란, 정치적 불안정, 외교적 갈등을 겪다가 1956년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며 공화제로 이행했다.
박트리아
지도
박트리아의 고대 도시
박트리아의 고대 도시
박트리아의 대략적인 위치
박트리아 지역의 대략적인 위치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Bakhlo
다른 표기
시대고대
수도박트라
시작 년도기원전 2500/2000년
종료 년도서기 900/1000년
현재 국가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역사적 맥락
소속 제국아케메네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언어
추가 정보
참고 자료이란 백과사전

2. 어원

박트리아라는 명칭은 박트리아어의 자칭 지명 가 그리스어식으로 음차된 Βακτριανή|박트리아니grc에서 유래한 영어식 명칭(Bactria)이다.[6]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아베스타어에서 ''Bakhdi''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다. 이후 중세 페르시아어에서는 ''Bāxtriš''로, 신페르시아어에서는 ''Baxl''로 발전했다.[6] 현대 명칭은 Βακτριανή|Baktrianēgrc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박트리아어 자칭이다. 다른 관련어로는 βαχλο|Bakhloxbc, بلخ (''Balx''), 중국어 大夏 (병음: ''Dàxià''), 라틴어 Bactriana가 있다. 이 지역은 고대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 बाह्लीक 또는 ''Bāhlīka''로 언급되었다.

빌헬름 아이러스는 이 지역의 이름이 발흐 강(그리스어 음역: ''Βάκτρος'')에서 유래했으며, 그 어원은 ''Bāxtri-''이고, 그 뜻은 '가르는 자'이며, 원인도유럽어 어근 *''bhag-'' '가르다'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따라서 아베스타어 bag-ae고대 인도어 bháj-vsn도 포함된다).[7]

박트리아는 박트리아 낙타의 이름이 유래한 지리적 위치이다.

3. 지리

박트리아 평원은 북쪽의 아무다리야 강(고대 옥서스 강)과 남동쪽의 힌두쿠시 산맥 사이에 위치했다.[8] 서쪽으로는 광대한 카르마니아 사막과 마르기아나 평원과 접하고 있었다.

아무다리야 강과 시린타갑 강, 사리풀 강, 발흐 강, 쿤두즈 강 등(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작은 강들은 수천 년 동안 관개에 이용되어 왔다.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유명했으며, 올리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9]

피에르 레리슈에 따르면, 박트리아는 원래 아무다리야 강 남쪽 지역으로, 발흐(박트라), 타슈쿠르간, 쿤두즈, 사레폴, 시린타가오 강에서 취수한 물에 의존하는 일련의 농업 오아시스들이 있었다.[10]

4. 역사

박트리아가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케메네스 제국 다리우스 1세가 세운 베히스툰 비문에 '바크트리슈'로 언급된 것이다. 박트리아는 헤라트, 메르브, 사마르칸트 등과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이란계 민족이 건설한 가장 오래된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였으며, 수도는 현재의 발흐로 비정되는 박트라였다. 발흐 근처에는 고대 조로아스터교 제단 유적이 있고, 박트리아 화폐도 많이 출토되었다.[45]

기원전 6세기, 박트리아 인구의 다수, 적어도 지배 계급은 페르시아인과 스키타이인으로 구성되었지만, 사카인이 페르시아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사카인과 기타 원주민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수가 많지 않아 요충지에 성과 요새를 쌓고 거주하며 군사력과 조직력으로 원주민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로마 제국 시대 자료에 따르면 박트리아는 7000명의 귀족이 지배했다고 하며, 헤로도토스는 "박트리아인과 사카인"을 함께 언급하여 페르시아인과 토착 사카인이 공동 지배 계급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47]

4. 1. 초기 역사와 조로아스터교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인도이란인들은 기원전 2500년~2000년경 이란과 남아시아 아대륙 북서부로 남서쪽으로 이동하기 전 아이라야네 바예자(인도이란인들의 고향)가 박트리아였다고 주장한다.[14] 이후 박트리아는 중앙아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북부 주가 되었다.[14] 산악 지대의 비옥한 토양이 투란 분지로 둘러싸인 이 지역에서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태어나 최초의 추종자들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아베스타의 가장 오래된 부분의 언어인 아베스타어는 고대 이란어 중 하나였으며, 동이란어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문명에 큰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는 예로부터 박트리아 출신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는 박트라가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조로아스터의 연대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옛 페르시아의 전설에서는 조로아스터는 알렉산드로스의 침입보다 258년 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70세에 죽었다고 전해지므로, 이 전설을 따른다면 기원전 6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며, 이 시대는 아케메네스 왕조 초기와 일치한다.[46]

4. 2. 아케메네스 제국

키루스 대왕이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박트리아를 아케메네스 제국에 병합한 후, 박트리아는 제국의 중요한 속주가 되었다.[15] 다리우스 1세는 박트리아를 제12번째 사트라피(주)로 편제하고, 연공으로 360탈렌트를 징수했다.[48] 이는 아시리아의 연공 1000탈렌트에 비하면 적지만, 당시 개발 수준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박트리아 속주 위치(오른쪽 위)


크세르크세스 1세 묘, 기원전 470년경 박트리아 병사


기원전 512년, 다리우스 1세는 박트리아를 거점으로 인도 원정을 통해 인더스 강 하구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무역로를 개척했다.[48] 또한, 아람 문자가 북서 인도에 전해졌고, 카로슈티 문자는 박트리아를 통한 페르시아와 인도의 교류로 인해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48]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그리스 원정에 박트리아 군이 참전했으며, 여기에는 박트리아의 페르시아인과 사카인 기병대가 포함되었다.[49]

다리우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배한 후,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베수스는 저항을 조직하려 했지만, 다른 군벌들에게 사로잡혀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져 고문받고 살해되었다.[17]

4. 3.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셀레우코스 제국

기원전 334년부터 기원전 331년까지 4년 동안,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드로스 3세는 지중해 동부 해안에서 페르세폴리스 점령까지 맹렬한 원정을 감행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고대 수도 파사르가다이를 파괴하고 다리우스 3세(재위: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30년)를 추격했다. 그 무렵, 다리우스 3세의 군대에 있던 박트리아 총독 베소스는 귀족 계급의 지지를 받아 다리우스 3세를 사로잡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카스피해 동쪽 끝 부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베소스는 다리우스 3세를 살해하고 도주했다.[50] 곧 알렉산드로스는 버려진 다리우스 3세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정중하게 장사 지냈다. 베소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을 따돌리고 박트라로 돌아와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라 칭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박트리아·소그디아나 정복을 계획하고 기원전 329년에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박트라로 향했다. 마케도니아 군대의 접근 소식을 들은 박트리아 군대의 대부분은 베소스를 버리고 도망쳤고, 베소스는 옥수스 강을 건너 소그디아나로 들어가 강변에 있던 배를 불태웠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군대는 양과 소의 가죽 부대, 수제 뗏목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 소그디아나에 침입, 베소스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때 베소스를 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긴 것은 베소스의 측근인 스피타메네스였지만, 그는 그 후 알렉산드로스의 부재를 이용하여 사마르칸트에 주둔한 2개 부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무렵 알렉산드로스는 야크사르테스 강 남안에 마케도니아 군인의 식민 도시(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북쪽의 사카족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사카족 군대를 철수시킨 후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피타메네스는 옥수스 강을 건너 박트리아로 도망쳤다. 스피타메네스는 그 후 소그디아나·박트리아를 여러 번 습격했지만, 어느 날 유목민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머리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쳐졌다. 이렇게 기원전 327년까지 투란 정복을 완료한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에서 이스칸다르 또는 이스칸다르 즈르칼나인(두 뿔의 알렉산드로스)으로 불리게 된다.[50][51]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최대 영역


소그디아나 시대의 박트리아에서 발행된 아테네 올빼미 주화 모방품(아마도 소피테스 시대)


알렉산드로스는 소그디아나를 정복했다. 남쪽, 옥수스 강 너머에서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결국 군사력과 외교를 통해 지역을 정복하고, 박트리아의 패배한 사트라프 옥시아르테스의 딸인 록사나와 결혼했다. 그는 박트리아에 두 개의 그리스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알렉산드리아 최동단)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에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각지에서 후계자들이 독립 세력을 일으켰고, 항쟁을 통해 여러 차례 박트리아의 지배자가 바뀐 후, 기원전 312년에 장군 셀레우코스 니카토르가 장악했다. 그러나 기원전 280년에 셀레우코스 1세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52]

셀레우코스 왕조의 최대 영토(황색).


마케도니아인들, 특히 셀레우코스 1세와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설하고 이란 동부에 많은 그리스인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어가 주로 쓰였다.[22]

4. 4.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이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공격을 받자,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토스 1세는 기원전 255년경 독립을 선언하고 소그디아나를 정복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건국하였다.[23]

기원전 180년경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최대 영토


디오도토스 1세와 그 후계자들은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코스 3세의 공격을 막아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결국 기원전 190년 로마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매우 강성하여 영토를 남아시아까지 확장하였다.[23]

박트리아는 대부분 아리아나의 동쪽과 윗쪽에 위치했지만, 일부분은 아리아나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박트리아는 기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산하였다. 박트리아를 반란케 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주인이 된 아리아나의 비옥함 때문에 매우 강력해져서 아리아나뿐만 아니라 인도와 더 많은 종족을 지배하게 되었다.[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박트리아에 진입했을 때, 그들은 여러 세기 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인 공동체들을 발견했다.[22]

마지막 그리스-박트리아 왕 헬리오클레스 1세기원전 2세기 말 유목민의 침략으로 박트리아의 지배권을 잃었고, 이 시점에서 박트리아에서 그리스의 정치적 지배력은 사라졌지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24]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행정 목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그리스 알파벳과 그리스어 차용어의 채택으로 알 수 있듯이 지역 박트리아어도 헬레니즘화되었다.[25]

4. 5. 인도-그리스 왕국과 멸망

데메트리오스 1세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북부 아프가니스탄인더스강 유역 일대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제국은 내부 불화와 계속된 왕위 찬탈로 분열되었다. 데메트리오스가 인도로 진격할 때, 그의 장군 에우크라티데스는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이라 칭했으며, 이에 많은 지역에서 찬탈자가 나타나 스스로 왕을 칭하고 서로 싸웠다.[26] 이러한 전쟁으로 그리스인들의 우위는 점차 줄어들었다. 데메트리오스와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아테나이의 표준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 표준을 도입했는데, 이는 소수 민족에게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도-그리스 왕국을 건설한 데메트리오스 1세(기원전 205~171년)


인도에서 매난드로스 1세(인도에서는 밀린다 왕으로도 불린다.)는 불교에 귀의하기까지 하였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원전 10년경에 스키타이인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토하라인들이 세운 월지국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멸망하였다.[63] 월지는 본래 현재의 간쑤 지역에 존재했으나, 흉노의 공격을 받아 서쪽의 박트리아로 쫓겨난 후 그리스-박트리아를 멸망시켰다.

4. 6. 월지와 쿠샨 제국

월지는 본래 현재의 간쑤 지역에 존재했으나, 흉노의 공격을 받아 서쪽의 박트리아로 쫓겨난 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기원전 128년 장건한나라의 사절로서 월지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이 소그디아나(옥서스의 북쪽)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63] 이후 박트리아에 자리잡은 월지국 세력의 일부가 인도로 들어가서 쿠샨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장건이 기원전 138년부터 126년까지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나기 위해 한 무제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 막고굴 벽화, 618-712년.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 따르면, 장건의 보고를 바탕으로 대하는 약 백만 명의 인구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면서 소규모 도시의 왕이나 관리자의 통치를 받는 중요한 도시 문명으로 묘사된다. 다샤는 중국 남부에서 온 다양한 물건을 거래하는 부유한 시장을 가진 부유한 나라였다. 장건이 방문했을 무렵에는 더 이상 주요 왕이 없었고 박트리아인들은 월지의 종주권 아래 있었다. 장건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다소 세련되었지만 사기가 저하된 사람들을 묘사했다. 이러한 보고서에 따라 중국 황제 한 무제는 페르가나, 박트리아, 파르티아의 도시 문명의 세련된 수준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무역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31] 이러한 접촉은 즉시 중국에서 여러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는 실크로드를 따라 무역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월지의 '시후'(왕자)였던 쿠줄라 카드피세스는 1세기 초에 이 지역을 통일하고 쿠샨 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대월지는 대하를 정복하고 그 땅에 화묵성의 휴밀흡후(休密翕侯), 쌍미성의 쌍미흡후(雙靡翕侯), 호조성의 귀상흡후(貴霜翕侯), 박모성의 기둔흡후(肸頓翕侯), 고부성의 고부장후(高附臓侯)의 5흡후[57]를 두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 귀상흡후 구주각(丘就却)이 다른 네 흡후를 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귀상왕(貴霜王)이라 칭했다. 구주각은 안식(파르티아)에 침입하여 고부(카불)의 땅을 차지했다. 또한 푸타국과 카시미르국을 멸하고 지배하에 두었다. 그의 아들 연고진(閻膏珍)이 왕위를 계승했다. 연고진은 인도를 정복하였다. 여기서 귀상흡후는 쿠샨을 가리키고, 구주각은 쿠줄라 카드피세스로 비정된다. 즉, 다음으로 토하리스탄을 지배한 것은 쿠샨 제국이었다. 쿠샨 제국은 토하리스탄에서 인도 북서부까지를 지배하에 두었고, 더욱 광대한 간접 지배 지역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쿠샨 제국은 카니슈카 1세 이후 점차 쇠퇴하여 3세기 중엽 무렵에는 사산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 부용국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쿠샤노사산 제국).

4. 7. 사산 제국과 에프탈

3세기, 쿠샨 제국사산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5세기 초, 키다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키다라 왕조를 건국하였다.[58]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 유목민 에프탈의 침략으로 5세기 중엽 에프탈에게 멸망하였다.[58]

키다라 왕조의 영역


에프탈은 키다라 왕조를 침략하는 동시에 카스피 해 남동쪽의 사산 왕조를 공격했다. 이때 사산 왕조의 군주 바흐람 5세(재위: 420년 - 438년)는 즉시 에프탈 토벌에 나섰고, 기습을 당한 에프탈은 패주하여 옥수스 강 북쪽으로 도망쳤다. 페로즈 1세(재위: 459년 - 484년) 시대에 에프탈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사산 왕조의 페로즈 1세는 카스피 해 북동쪽에 원정을 가서 에프탈과 싸웠으나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었다. 페로즈 1세는 484년에도 에프탈과 싸웠으나 전사하고 만다. 에프탈의 전성기에는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고, 서투르키스탄과 인도 북서부를 그 영토로 삼았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면서 강력한 사산 왕조의 잇따른 공세에 의해 에프탈은 점차 쇠퇴했고, 558년돌궐과 사산 왕조의 협공을 받아 10년 후 멸망했다.[59]

에프탈의 영역

4. 8. 이슬람 시대

7세기 중반, 라쉬둔 칼리파 아래 이슬람 세력이 중동과 중앙아시아 서부 지역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33]

663년, 우마이야 칼리파는 토하리스탄을 지배하던 불교 국가 샤히 왕조를 공격했다. 우마이야 군대는 발크 주변 지역과 나바 비하라의 불교 사원을 점령하여 샤히 왕조가 카불 계곡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33]

8세기, 발크 출신의 페르시아인 사만 후다(Saman Khuda)는 우마이야 지배하에서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의 자손들은 사마니드 왕조(875~999년)를 건설했다. 페르시아어는 이슬람 통치자들의 언어였기 때문에 박트리아어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공식 언어가 되었다. 결국 페르시아어는 차별적 대우와 식민지화로 인해 박트리아어를 대체하여 일반 언어가 되었다.[34]

654년바스라 총독 압드 알라 이븐 아미르 휘하 아흐나프 이븐 카이스가 이끄는 아랍 군이 호라산 정복을 위해 토하리스탄 주변에 침공했다. 이때 발흐는 아흐나프와 평화 조약을 맺고 이슬람 측에 귀순했다.

661년, 무아위야가 우마이야 칼리파 왕조의 초대 칼리파로 즉위하자, 카이스 븐 알-하이삼 알-아슬라미가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흐, 헤라트, 바드기스 등 호라산 동부의 주요 도시들은 이슬람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카이스는 진압을 위해 먼저 발흐를 공략하고 나우바하르 사원을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발흐 주민들이 카이스와 다시 평화 조약을 맺기를 원했기에, 이에 따라 화약과 안전 보장 협정이 체결되었다. 바스라 총독 이븐-아밀은 카이스의 방침을 무른 태도라고 비판했지만, 헤라트와 바드기스 또한 발흐에 이어 평화 조약과 안전 보장을 다시 체결했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에 정복된 후, 이어지는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사파르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토하리스탄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5. 문화

인도중국을 잇는 여러 무역로( 실크로드 포함)가 박트리아를 통과하면서, 이 지역은 청동기 시대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2천년에 최초의 원시 도시 문명이 나타났지만,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에,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하며 독립을 잃었다. 기원전 304년경부터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기원전 250년경부터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야바나스(Yavanas)라고도 알려진 그레코-박트리아인들은 토착 박트리아 귀족들과 협력하여 인도 북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기원전 135년경 유이지 부족에게 함락되었고, 이는 쿠샨 제국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스트라보의 ''지리학''에는 박트리아인들의 독특한 장례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늙거나 병든 사람들을 살아있는 채로 '장의사'라고 불리는 개들에게 먹이로 던졌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관습을 없앴다고 한다.[36]



박트리아인들은 동이란계 언어인 박트리아어를 사용했다. 이 언어는 현재 멸종되었고, 문지어, 이드가어, 이시카시미어, 파슈토어와 같은 북동부 이란계 언어로 대체되었다. ''이란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박트리아어는 파슈토어와 이드가어-문지어 사이, 그리고 소그드어, 코레즈미아어, 파르티아어 사이의 중간 위치를 차지한다.[38] 이슬람 침략 이전 이 지역의 주요 종교는 조로아스터교불교였다.[39]

현대 타지크인들은 소그드인과 박트리아인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고대 동이란계 주민들의 후손이며, 서이란계 페르시아인과 비이란계 민족들이 혼합되어 있다.[40][41][4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타지크인들은 기원전 1천년 중반부터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이란계 민족의 직계 후손이다.[43]

5. 1. 언어와 문자

술프 코탈에서 발굴된 박트리아어 비문(1957년 발굴). 그리스 문자로 쓰여 있다.


이 지역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지만, 쿠샨 제국 이후에는 이란어파에 속하는 박트리아어가 사용되었다.[62] 1957년 발견된 술프 코탈 비문, 1993년 발견된 라바탁 비문, 화폐와 각종 문서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박트리아어는 그리스 문자로 기록되었다. 7세기,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 중국 대륙(당나라)과 인도를 왕복한 현장의 기록(대당서역기)에 따르면, "토하리스탄의 문자는 25자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이며, 언어 또한 독특하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그리스 문자 24자에 sh 1자를 더한 것으로, 박트리아어의 존재를 보여준다. 8세기 이후에는 아랍-이슬람의 영향으로 문자는 아랍 문자로 대체되었고, 언어는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대체되었다.[62]

5. 2. 종교

기원전 2천년경 인도중국( 실크로드 포함)을 잇는 중요한 여러 무역로가 박트리아를 통과했으며, 이 지역은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대부분 유목민이었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지역 최초의 원시 도시 문명이 나타났다.

이러한 수익성 높은 무역로의 지배권은 외부의 관심을 끌었고, 박트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에 정복당했고,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이러한 정복은 박트리아의 독립의 종말을 의미했다. 기원전 304년경부터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기원전 250년경부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정착한 그리스인들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야바나스(Yavanas)라고도 알려진 그레코-박트리아인들은 토착 박트리아 귀족들과 협력하여 일했다. 기원전 2세기 초, 그레코-박트리아인들은 인도 북서부를 포함하여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인상적인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기원전 135년경 이 왕국은 침입한 유이지 부족에게 함락되었고, 이 침략은 나중에 강력한 쿠샨 제국의 부상을 가져왔다.

이슬람 침략 이전 이 지역의 주요 종교는 조로아스터교불교였다.[39] 8세기, 발크 출신의 페르시아인 사만 후다(Saman Khuda)는 우마이야 지배하에서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참조

[1] 논문 Ancestral Home of Indo-Aryan Peoples and Migration of Iranian Tribes to Southeastern Europe 2018
[2] 논문 Bactria: the History of a Forgotten Empire. By H. G. Rawlinson, M.A., I.E.S. Probsthain's Oriental Series. 1913-07
[3] 논문 The Emergence Of Religious Views Is Exemplified By The Southern Regions 2020-10-28
[4] 웹사이트 Welcome to Encyclopaedia Iranica https://iranicaonlin[...] 2023-07-31
[5] 웹사이트 Asiatic Papers. Bactra https://fid4sa-repos[...] 2023-03-11
[6] 웹사이트 Aryan Homeland, Airyana Vaeja, in the Avesta. Aryan lands and Zoroastrianism. http://www.heritagei[...] 2017-09-07
[7] 서적 Iranica in the Achaemenid Period (ca. 550–330 B.C.): Lexicon of Old Iranian Proper Names and Loanwords, Attested in Non-Iranian Texts https://books.google[...] Peeters
[8] 서적 Encyclopedia of Ancient Asian Civilizations Facts On File, Inc.
[9] 서적 Bactria: The History of a Forgotten Empire https://archive.org/[...] Probstain & co.
[10] 웹사이트 Bactria, Pre-Islamic period https://iranicaonlin[...]
[11] 서적 Galleries and Works of the MIHO MUSEUM https://www.academia[...] Miho Museum
[12] 논문 Les représentations portraitistes des donateurs laïcs dans l'imagerie bouddhique https://www.persee.f[...] 2009
[13] 서적 Old Persian and Avestan Phonology Eisenbrauns
[14] 서적
[15] 서적 The Persian Empire: Studies in geography and ethnography of the ancient Near East F. Steiner
[16] 웹사이트 BACTRIA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2019-08-07
[17] 서적
[18] 웹사이트 Herodotus, 4.200–204 https://penelope.uch[...]
[19] 웹사이트 Strabo, 11.11.4 https://penelope.uch[...]
[20] 웹사이트 Herodotus 6.9 https://penelope.uch[...]
[21] 웹사이트 Graeco-Bactrian Kingdom https://www.cemml.co[...] 2020-12-12
[22] 서적
[23] 웹사이트 Geography, Book 11, chapter 11, section 1 https://www.perseus.[...]
[24] 논문 The Greeks of Afghanistan Revisited.
[25] 웹사이트 Language Profile: Pashto http://www.lmp.ucla.[...]
[26] 웹사이트 Justin XLI,6 https://web.archive.[...]
[27] 서적
[28] 웹사이트 Silk Road, North China http://www.megalithi[...] 2007-11-19
[29]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30] 웹사이트 Strabo, 1.8.2 https://penelope.uch[...]
[31] 문서 Hanshu
[32] 문서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hibition
[33] 웹사이트 History of Buddhism in Afghanistan http://studybuddhism[...]
[34] 웹사이트 Origin of the Samanids – Kamoliddin – Transoxiana 10 http://www.transoxia[...] 2017-09-07
[35] 논문 The Hellenistic Architecture and Art of the Temple of the Oxus https://www.jstor.or[...] 1994
[36] 웹사이트 LacusCurtius • Strabo's Geography — Book XI Chapter 11 https://penelope.uch[...] 2017-09-07
[37] 웹사이트 The Modern Eastern Iranian languages are even more numerous and varied. Most of them are classified as North-Eastern http://www.iranicaon[...]
[38] 웹사이트 Bactrian language http://www.iranicaon[...] 1988-12-15
[39] 서적 Peoples, nations and cultures
[40] 웹사이트 Kazakhstan, Kyrgyzstan, Tajikistan, Turkmenistan, and Uzbekistan : country studies https://www.loc.gov/[...]
[41] 서적 A History of the Tajiks: Iranians of the East Bloomsbury
[42] 서적 Persien: bis zum Einbruch des Islam Kindler Verlag AG
[43] 웹사이트 Tajikistan: History https://www.britanni[...] 2023-08-28
[44] 웹사이트 David Adams Films https://www.alexande[...]
[45]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6]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7]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8] 문서 당시의 1타렌트는 약 황금 25킬로그램 정도로 추정된다.
[49]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0] 문서 알렉산드로스의 투구 앞장식에 두 개의 뿔이 있었기 때문이다.
[51]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2]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3] 서적 지중해 세계사
[54]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5] 서적 사기 대완전
[56]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7] 문서 “翕侯(흡후)”는 이란계 유목민 사회에서 “제후”를 의미한다. 우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58] 서적 한서 서역전, 후한서 서역전
[59] 서적 (서적 제목 없음)
[60] 서적 수서 서역전, 북사 서역전, 신당서 서역전
[61] 서적 구당서 (본기 제3 태종하, 본기 제4 고종상, 본기 제5 고종하, 본기 제10 숙종, 열전 제148 서융), 신당서 (열전 제146하 서역)
[62] 서적 (서적 제목 없음)
[63] 서적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사계절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