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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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흥향교는 세종 23년(1441)에 건립되었으며,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숙종 21년(1695)에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대성전, 명륜당 등 여러 건물이 남아 있으며, 경사진 지형에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교육 기능을 수행했으나 갑오개혁 이후에는 제사 기능만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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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흥향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고흥향교 |
| 한자 표기 | 高興鄕校 |
| 위치 |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흥양길 90-29 (행정리) |
| 지정 종류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
| 지정 번호 | 108 |
| 지정일 | 1985년 2월 25일 |
| 상세 정보 | |
| 참고 사항 | 문화재 정보 참고 |
2. 역사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고흥향교는 조선 시대에 처음 세워졌고, 정유재란을 겪으며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등이 있다. 경사진 곳에 위치하여 앞쪽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뒤쪽 높은 곳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제사 공간을 두어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을 따른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내고 있다.
2. 1. 건립과 소실
고흥향교는 세종 23년(1441) 고흥현 서문 밖에 처음 세워졌으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 없어졌다. 이후 숙종 21년(1695)에 현재의 위치에 새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2. 2. 중건과 보수
세종 23년(1441) 고흥현 서문 밖에 처음 세워졌으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이후 숙종 21년(169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지었으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3. 구조
고흥향교는 경사진 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공간은 크게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3. 1. 전학후묘 배치
고흥향교는 경사진 지형을 활용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향교의 앞쪽, 즉 비교적 낮은 곳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여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학 공간을 두었다. 반면 뒤쪽의 높은 곳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배움의 공간을 앞에 두고 제사 공간을 뒤에 두는 배치를 전학후묘(前學後廟)라고 한다.3. 2. 주요 건물
고흥향교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고흥현 서문 밖에 처음 지어졌으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이후 숙종 21년(1695)에 현재 위치에 새로 지었으며,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 남아있는 주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등이 있다. 경사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앞쪽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제사 공간을 두어, 앞쪽에 배움의 공간을, 뒤쪽에 제사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현재는 봄과 가을에 제사만 지내고 있다.
4. 기능 변화
향교는 본래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국가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갑오개혁 (1894년)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졌으며, 현재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 남아 있다.
5.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Cultural Properties Administration
http://www.ocp.go.kr[...]
2012-01-07
[2]
웹사이트
See Goheung Hyanggyo
http://blogs.transpa[...]
201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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