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괄은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장수로, 아버지 조사의 명성을 이어받아 병법에 능통했으나, 실전 경험 부족과 자만심으로 인해 장평대전에서 대패를 초래했다. 그는 병법 지식에만 의존하고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진나라의 계략에 빠져 조나라 군대를 궤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지상담병"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경험과 실전 능력을 중시하는 교훈을 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나라 사람 (전국) - 공손룡
공손룡은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변론가이자 철학자로, 명가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며, '백마비마설'과 '견백론' 등의 독특한 논리를 통해 이름과 실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논리학과 변론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조나라 사람 (전국) - 조희 (진 장양왕)
조희는 조나라 출신으로 진 장양왕의 왕후이자 진시황의 어머니이며, 여불위와 노애 등과 관계를 맺었고 노애의 반란 실패 후 유폐되었다가 제태후로 추존되었다. - 전국 시대의 군인 - 오기
오기는 중국 전국 시대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며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초나라 재상으로 법가 개혁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며, 《오자병법》을 저술했다. - 전국 시대의 군인 - 손빈
손빈은 중국 전국 시대 제나라의 군사 전략가로, 손무의 후손이며, 방연의 모함으로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으나 제나라로 망명하여 계릉 전투와 마릉 전투에서 뛰어난 지략을 발휘,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고 그의 군사 사상은 《손빈병법》에 담겨 중국 병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조괄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조괄 |
| 한자 표기 | 趙括 |
| 생몰년도 | 미상 |
| 시대 | 전국시대 |
| 국적 | 조나라 |
| 직업 | 군인 |
| 주요 활동 | 장평대전 참전 |
| 가계 | |
| 아버지 | 조사 |
| 장평대전 | |
| 배경 | 진나라와의 대립 |
| 임명 | 염파의 후임으로 장군 임명 |
| 전투 방식 | 이론에 치중, 실전 경험 부족 |
| 결과 | 조나라 군대 전멸, 조괄 전사 |
2. 생애
조괄은 명장 조사의 아들로, 조 효성왕의 명으로 염파를 대신해 장군이 되었다. 효성왕은 인상여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염파의 방어적인 전략에 불만을 품고 조괄을 기용했다.[11]
사기에 따르면,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이 장군으로 임명되자 왕에게 조사의 말을 전하며 반대했다. 조사는 조괄이 병법은 뛰어나나 실제 전쟁을 모른다며, "전투를 체스 게임처럼 여기고, 병사들을 마음대로 희생될 수 있는 단순한 졸로 생각한다"고 걱정했다. (이는 중국어 관용구 紙上談兵, 즉 "앉아서 하는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진나라의 선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조괄의 어머니는 효성왕에게 조괄을 기용하면 일족에게 죄를 묻지 말아달라고 청했고, 효성왕은 이를 수락했다.[12] 한편, 진나라의 백기는 조괄이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에 승리를 확신했다. 진나라 왕은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를 징발하여 65만 명의 군대를 조직했다.
조괄은 4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이는 백기의 함정이었다. 장평 전투는 역사상 가장 큰 전투 중 하나로, 양측 합쳐 11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된 총력전이었다. 조괄은 백기의 계략에 빠져 포위되었고, 식량과 물 부족으로 고전했다. 조괄은 수많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진나라 군의 "화살비"에 막혔다.
40일 후, 조괄은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으나 전사했고, 조나라 군은 항복했다. 백기는 40만 명의 조나라 포로를 생매장했는데, 이는 과장된 수치라는 주장도 있다.
2. 1. 어린 시절
조괄은 조나라의 명장 조사의 아들이었다.[4]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웠는데, 군대의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천하에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인 조사와 군대의 일을 논하였는데, 조사조차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는 조괄을 칭찬하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전쟁이란 사람이 죽는 곳이오. 그러나 괄은 이를 너무 쉽게 말하고 있소. 조나라가 괄을 장수로 삼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만약 기어이 그를 장수로 삼는다면 조나라의 군대를 무너지게 할 것이오."라 하였다.[5]
사기에 따르면,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전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왕을 찾아가 조사가 아들을 전투에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느 날, 조사와 조괄이 군사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장기를 둘 때, 조괄이 매번 아버지를 이기는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조사는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자 조사는 "이 아이는 전투를 체스 게임처럼 여기고, 그의 병사들은 마음대로 희생될 수 있는 단순한 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모든 전술은 그가 읽은 책에 기반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실제 전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그는 결코 군대를 지휘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진나라의 선전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조사는 병법 논의에서 아들 조괄을 논파하기도 했지만, 결코 조괄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내가 그 이유를 묻자 "전쟁은 생사가 걸린 것인데, 괄은 아무렇지도 않게 논하고 있다. 임용되지 않고 끝나면 좋겠지만,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 군대는 괄 때문에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 2. 장수가 되다
조괄은 조 효성왕의 명령에 따라 이전 장군이자 유명한 지휘관 염파를 대신하여 전장으로 파견되었다. 왕은 몇몇 신하들의 영향 아래 있었고, 가장 중요한 대신 인상여의 조언을 무시했다. 그는 염파의 방어 전략에 불만을 품었다.[11] 염파는 진지를 구축하고 요새를 건설한 후 그 안에 머물면서, 적의 도발이나 유인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왕은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인상여는 "왕께서 명성만으로 조괄을 쓰려고 하시는데, 이는 아교로 슬(瑟, 거문고)의 발을 붙이고 슬을 연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그 부친이 전한 책만 읽었을 뿐 합변(合変, 임기응변)을 모릅니다."라 말하며 반대하였다.[12]
사기에 따르면,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전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왕을 찾아가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근거로 반대하였으나 왕에게 무시되었다. 한편, 염파가 설계한 요새 방어선을 포위하기 위해 장평에서 진나라 군대를 이끄는 것을 거부했던 백기는 조괄이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웃으며 그의 병사들에게 전투에서 이겼다고 말했다. 진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자 즉시 인근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모든 시민에게 하나의 귀족 칭호를 하사했고,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진나라를 돕도록 명령했으며, 65만 명의 강한 군대를 조직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남편 조사의 유언을 근거로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는 괄은, 장군의 명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효성왕에게 직접 호소했다. 효성왕이 아들의 영달을 막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며 조괄의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묻자, 조괄의 어머니는 조사가 했던 행동과 조괄의 행동을 비교하며 조괄은 장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효성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괄 어머니는 "그렇다면, 어떻게든 괄을 쓰시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일족 등에게 죄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고 효성왕은 이를 인정했다.[12]
전선에 도착한 조괄은 염파의 전법을 지지하는 장수들을 해임하고, 병법서대로 병력을 재배치했다. 그리고 지구전법에서 일전하여 진나라 군에게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진나라도 조나라의 총대장이 조괄로 바뀐 것을 듣고, 몰래 총대장을 왕흘에서 역전의 용장인 백기 장군으로 바꾸고 기다리고 있었다.
2. 3. 장평대전의 참패
염파를 대신하여 장수가 된 조괄은 규정을 모두 바꾸고 군리들까지 교체했다.[13] 한편 진나라 측에서는 조나라 측의 장수가 조괄로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몰래 명장인 백기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고, 왕흘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군중에 무안군이 상장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자는 목을 자르겠다는 명령을 내렸다.[14]전장에 도착한 조괄은 곧바로 출병하여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자 백기는 기병을 풀어서 패하여 달아나는 척 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측의 보루까지 추격하였으나 보루가 견고하여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진나라 측은 기병 으로 조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었고, 또한 기병 으로 조나라의 보루 사이를 끊으니 조나라 군대는 둘로 나누어지고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 전세가 불리해진 조나라 측은 보루를 쌓고 수비하면서 구원병을 기다렸다. 조나라의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진 소양왕은 몸소 하내(河內)까지 와서 백성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리며 격려하는 한편 15세 이상을 모두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의 구원병과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15]
결국 9월이 되자 46일 동안 포위당한 조나라 군사들은 굶주리게 되어 몰래 서로를 죽여서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진나라의 보루를 공격하여 탈출하려고 부대를 넷으로 나누어 4, 5차례 공격했지만 탈출하지 못했다.[16] 조괄은 정예 부대를 내세워 직접 전투에 나섰으나 진나라 군사가 조괄을 활로 쏘아 죽였다. 조괄의 군대는 패하여 수십 만이 드디어 진나라에 항복했고, 진나라는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이때 죽은 조나라 군사는 45만 명에 달하였다.[17] 이 싸움을 장평대전이라 한다.
전선에 도착한 조괄은 염파의 전법을 지지하는 장수들을 해임하고, 병법서대로 병력을 재배치했다. 그리고 지구전에서 벗어나 진나라 군에게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진나라도 조나라의 총대장이 조괄로 바뀐 것을 듣고, 몰래 총대장을 왕흘에서 역전의 용장인 백기 장군으로 바꾸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나라 군대는 백기의 위장 철수 전술에 걸려, 깊이 추격하여 군세가 늘어진 곳을 복병으로 분단당하고, 지휘 계통을 잃고 혼란에 빠져 대패를 겪었다. 더욱이 진나라 군의 포위로 인해 식량을 조달하는 길이 끊긴 조나라 군 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아군을 죽여 인육을 빼앗는 궁지에 몰렸다. 조괄은 간신히 남은 건강한 병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에 돌격을 감행했지만, 허무하게 화살에 맞아 죽고, 피폐함의 극에 달한 데다 통솔력을 잃은 조나라 군은 항복했다.
그러나 진나라도 국력을 다 써버렸고, 명이나 되는 투항병을 먹일 식량이 없었으며, 데려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돌려보내면 원한을 품고 덤벼들 것이라고 백기의 판단에 의해 240명의 소년병을 남기고 모두 생매장되었다. 이 때문에 조나라는 국력이 대폭 저하되어, 그 멸망을 앞당기게 된다.
2. 4. 장평대전 이후
조괄이 장평 전투에서 패사한 후, 이듬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은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는 위급한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초나라와 위나라의 구원으로 한단의 포위를 풀었다. 한편, 조 효성왕은 이전의 약속 때문에 조괄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1]3. 평가
조괄은 "암기만 하고, 그 응용을 알지 못한다"는 예로 인용되며,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紙上談兵)"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 되었다.[6]
많은 학자들은 조괄이 경험은 부족했지만 재능 있는 장수였으며, 실무 능력을 개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최고의 장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조괄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전투는 중국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장군 중 한 명인 백기와의 싸움이었다. 백기는 전장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며, 기병 전술과 공격 시점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장평 전투 당시 조나라 왕의 압박 속에서 정면 대결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던 조괄은, 2년 넘게 조나라의 젊은 남성들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개활지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의 정예 부대 중 다수는 방어에 미숙한 기마 궁수와 경무장 기병이었다.
3. 1. 부정적 평가
조괄은 어릴 때부터 병법에 통달하여 아버지 조사와 병법 논쟁을 벌여 이기기도 했지만, 조사는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1] 조사는 전쟁을 '생사가 걸린 일'로 여긴 반면, 조괄은 이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조사는 조괄이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 군대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2]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군은 처음에 염파의 지휘 아래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진나라 군대는 염파보다 조괄을 더 두려워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속은 효성왕은 조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3] 인상여와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의 실전 경험 부족과 경솔함을 들어 효성왕에게 조괄 임명을 반대했지만, 효성왕은 듣지 않았다.[4]
전선에 도착한 조괄은 염파의 지구전 전략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격을 택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백기를 총사령관으로 교체한 뒤였고, 조나라 군대는 백기의 함정에 빠져 대패했다. 조괄은 전사하고, 40만 명의 조나라 군은 항복 후 생매장당했다.[5]
이 사건으로 조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괄은 '이론에만 밝고 실전에는 약한' 사람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紙上談兵)"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 되었다.[6]
3. 2. 긍정적 평가
조괄은 명장 조사의 아들이었다.사기에 따르면,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전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 왕에게 조괄이 군대를 지휘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다. 그 이유는 조괄이 병법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나, 실전 경험이 부족하여 실제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이 아버지 조사와 군사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장기를 둘 때, 매번 이기는 모습에 놀랐지만, 정작 조사는 아들이 전투를 체스 게임처럼 여기고 병사들을 마음대로 희생될 수 있는 졸로 생각한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는 진나라의 선전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1]
4. 현대적 관점
조괄의 이야기는 현대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 '''군사적 교훈:''' 장평 전투는 국가가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하는 총력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괄은 경험은 부족했지만 재능 있는 장수였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훌륭한 장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인 백기와 싸워야 했다. 백기는 기병 전술과 공격 시점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나라 왕의 압박 속에서 정면 대결을 통해 승리해야 했던 조괄은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개활지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조괄은 초기에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백기가 의도적으로 퇴각하는 척하며 조나라 군 전체를 포위하려는 함정을 파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결국 조괄은 경험 부족과 과도한 공격성으로 인해 백기의 함정에 빠져 전사하고, 조나라 군대는 대패했다.[15][16][17]
- '''인재 등용의 중요성:''' 조괄의 아버지 조사와 인상여,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까지도 조괄의 군사적 재능과 인품을 문제 삼아 장수 임명을 반대했다.[12] 특히 조사는 "전쟁은 생사가 걸린 것인데, 괄은 아무렇지도 않게 논하고 있다"라며 아들의 가벼운 태도를 지적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이 부하들에게 위세만 부리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을 비판하며, 장수로서의 자질 부족을 왕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효성왕은 이러한 반대를 모두 무시하고 조괄을 장수로 임명했고, 결국 장평 대전의 참패로 이어졌다.[12]
4. 1. 군사적 교훈
조괄은 염파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면서 기존의 규정을 모두 바꾸고 군 관리들까지 교체했다.[13] 진나라 측에서는 조나라 장수가 조괄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명장 백기를 상장군으로, 왕흘을 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발설하는 자는 처형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14]전장에 도착한 조괄은 즉시 출병하여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백기는 기병을 활용하여 패배하는 척하며 달아났고,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보루까지 추격했지만 견고하여 뚫지 못했다. 진나라 기병 2만 5천은 조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었고, 기병 5천은 조나라 보루 사이를 끊어 조나라 군대는 둘로 나뉘고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 조나라는 보루를 쌓고 수비하며 구원병을 기다렸다. 진 소양왕은 백성들의 작위를 올리고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의 구원병과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15]
46일 동안 포위된 조나라 군사들은 굶주림에 서로를 죽여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나라는 진나라 보루를 공격하여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6] 조괄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직접 전투에 나섰지만, 진나라 군사의 활에 맞아 죽었다. 조괄의 군대는 패배하여 수십 만이 진나라에 항복했고, 진나라는 이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이때 죽은 조나라 군사는 45만 명에 달했다.[17] 이 싸움을 장평대전이라 한다.
장평 전투는 국가가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하는 총력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학자들은 조괄이 경험은 부족했지만 재능 있는 장수였으며,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훌륭한 장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조괄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인 백기와 싸워야 했다. 백기는 기병 전술과 공격 시점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나라 왕의 압박 속에서 정면 대결을 통해 승리해야 했던 조괄은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개활지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의 정예 부대는 방어에 미숙한 기마 궁수와 경무장 기병이 다수였다.
조괄은 초기에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백기가 의도적으로 퇴각하는 척하며 조나라 군 전체를 포위하려는 함정을 파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백기는 조나라 군대를 함정에 가두고 굶겨 죽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조괄은 경험 부족과 과도한 공격성으로 인해 백기의 함정에 빠졌다. 백기는 정예 기병대를 보내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공격하고, 조나라 군대를 양쪽 측면에서 포위했다. 또한 기병에게 조괄의 공격적인 기병대와 보병 사단 사이의 틈을 뚫고 들어가 군대를 나누라고 명령했다. 조괄은 함정에 갇혀 대부분의 병력이 작은 구역에 갇히고, 식량과 물 공급마저 끊기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조괄은 수많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진나라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40일 동안 버틴 후, 조괄은 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전사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항복했지만, 백기는 이들을 생매장했다.
''사기''에 따르면, 백기는 약 40만 명의 조나라 병사들을 생매장하라고 명령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숫자가 과장되었다고 본다.
4. 2. 인재 등용의 중요성
조사는 아들 조괄이 병법 논의에서 자신을 논파하기도 했지만, 결코 조괄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내가 그 이유를 묻자 "전쟁은 생사가 걸린 것인데, 괄은 아무렇지도 않게 논하고 있다. 임용되지 않고 끝나면 좋겠지만,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 군대는 괄 때문에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12]인상여는 "왕께서 명성만으로 조괄을 쓰려고 하시는데, 이는 아교로 슬(瑟, 거문고)의 발을 붙이고 슬을 연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그 부친이 전한 책만 읽었을 뿐 합변(合変, 임기응변)을 모릅니다."라 말하며 인재 등용에 대해 반대하였다.[12]
조괄의 어머니 또한 "조괄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반대하였으나 효성왕은 이를 모두 무시하였다. 그러자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이 잘못되더라도 자신을 이 일에 연루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여 효성왕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조괄의 어머니는 효성왕에게 "저는 조사의 아내로서 장수라는 자를 보아 왔습니다. 남편은 조금도 사치하지 않고, 스스로 술과 음식을 권한 부하가 수십 명, 친구로 친하게 지낸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습니다. 받은 은상은 남김없이 부하에게 나눠주고, 출진 명령을 받은 후에는 집안일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한편, 괄은 부하에게 위세만 부릴 뿐, 하사품은 모두 숨겨두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며, 날마다 값어치가 오를 만한 물건만 골랐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아버지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12]
사기에 따르면,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전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 왕에게 조사가 아들에 대해 평한 이야기를 했다. 조사 왈, "이 아이는 전투를 체스 게임처럼 여기고, 그의 병사들은 마음대로 희생될 수 있는 단순한 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모든 전술은 그가 읽은 책에 기반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실제 전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이것은 중국어 관용구 紙上談兵(지상담병), 즉 '앉아서 하는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는 결코 군대를 지휘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진나라의 선전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12]
5. 대중 문화
조괄은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으로, 암기에는 능하지만 실제 응용에는 약한 인물의 예시로 종종 인용된다.
5. 1. 고사성어
조괄은 종종 "암기만 하고, 그 응용을 알지 못한다"는 예로 인용된다. 그리고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라는 고사성어가 되었다.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Columbia University
1993
[2]
Wikisource
史記/卷081#附 趙奢
[3]
Wikisource
史記/卷081#奢子 括
[4]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5]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6]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7]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8]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9]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10]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1]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2]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3]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4]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15]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16]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17]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