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 6호분
1. 개요
공주 송산리 6호분은 1932년에 발견된 백제 시대의 벽돌 무덤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한다. 묘실은 지하에 구축되었으며,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사용되었다. 무령왕릉과 유사한 구조로 미루어 보아, 무덤의 피장자는 무령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추정된다. 1938년 일본인 가루베 지온에 의해 도굴되었으며, 현재는 훼손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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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 -
서동요
서동요는 백제 무왕의 아명인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노래를 지어 퍼뜨린 설화로, 미륵사 창건, 익산 천도 등과 연결되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다. -
백제의 왕릉 -
익산 쌍릉
익산 쌍릉은 백제 무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익산시 왕궁면 소재의 백제 후기 왕릉으로, 대왕릉에서 발견된 유골 분석 결과가 무왕의 기록과 일부 일치하나, 무왕릉 확정 여부 및 소왕릉 주인공에 대한 추가 연구와 익산 천도설 관련 논쟁이 남아있다. -
백제의 왕릉 -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지석을 통해 주인공이 확인되었고 2906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 장례 문화와 사회상을 보여주며, 남조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굴식 벽돌무덤이자 백제 고유의 건축 기술과 미적 감각이 융합된 건축물이다. -
공주시의 문화유산 -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지석을 통해 주인공이 확인되었고 2906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 장례 문화와 사회상을 보여주며, 남조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굴식 벽돌무덤이자 백제 고유의 건축 기술과 미적 감각이 융합된 건축물이다. -
공주시의 문화유산 -
공주 석장리 유적
공주 석장리 유적은 남한 최초의 대규모 선사 유적으로, 다양한 시대의 문화층과 석기 유물을 통해 선사문화 연구에 기여하며, 특히 배밑바닥 모양 석기는 석장리 지명의 유래가 되었고, 박물관과 축제를 통해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있다.
2.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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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송산리 고분군 6호분은 무령왕릉과 함께 벽돌로 축조된 벽돌무덤이다. 동쪽에는 5호분, 서쪽에는 29호분이 자리하고 있다.
1938년 공주고보 한문교사였던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무단 도굴하였다. 가루베 지온은 무덤 발견 후 총독부에 이미 도굴된 무덤이라 보고했지만, 이는 거짓이었다. 실제로는 제자에게 6호분 내부 사진을 보냈는데, 그중 하나에 유물로 추정되는 물체가 찍혀 있었다. 또한, 10번 사진은 보내지 않아 중요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조사 결과 무덤 안은 빗자루로 쓴 듯 깨끗했는데, 이전 도굴된 무덤에서 토기나 금제 조각 등이 발견된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가루베 지온의 치밀한 도굴을 입증한다. 일제강점기 최초 발견 당시 처녀분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가루베 지온이 도굴로 당시 논 한 마지기 값(70~80원)의 2500배에 달하는 20만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도굴로 인해 진실은 알 수 없다.
2.1. 묘실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과 현실의 구조가 중국 화남(華南) 지방의 남조시대 전축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특이한 묘제라는 점이 주목된다. 석실분과 마찬가지로 남면한 구릉의 경사지대에 있으며 평면은 장방형이고 남쪽 벽의 중앙에 연문이 뚫렸으며 연도 바닥에는 배수구가 있다. 벽과 천장은 모두 크기 32cm×14cm×15cm 정도의 무늬벽돌(文樣塼)을 5-6열(列)씩 가로로 퇴적하고 그 위에 한 열을 세로로 쌓고 다시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여 퇴적하는 축법(築法)을 써서 쌓았는데 천장궁륭의 축성을 위해 미리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벽돌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남북의 짧은 양벽은 수직으로 되었으나 동서의 긴 벽은 천장 부근에서 기차 터널처럼 안으로 좁혀져 아치형 천장을 이룬다. 네 벽의 일부는 토벽으로 하여 그 위에 사신(四神)의 벽화를 장식했고 따로 광배형(光背形)의 감(龕)을 두고 있다.
지하로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벽돌로 묘실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남북 길이 370cm, 동서 너비 224cm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이 마련되어 있으며, 등감 위쪽에는 마치 창문처럼 꾸민 시설물도 있다. 동서남북의 네 벽면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와 같은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벽돌 중에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 중국 양나라의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대가 하나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무령왕릉과 매우 똑같은 벽돌무덤이어서 무령왕과 매우 밀접한 인물이 피장자였을것으로 추측한다.
2.2. 축조 방식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과 현실의 구조가 중국 화남(華南) 지방의 남조시대 전축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특이한 묘제라는 점이 주목된다. 석실분과 마찬가지로 남면한 구릉의 경사지대에 있으며 평면은 장방형이고 남쪽 벽의 중앙에 연문이 뚫렸으며 연도 바닥에는 배수구가 있다. 벽과 천장은 모두 32cm×14cm×15cm 정도의 무늬벽돌(文樣塼)을 5-6열(列)씩 가로로 퇴적하고 그 위에 한 열을 세로로 쌓고 다시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여 퇴적하는 축법(築法)을 써서 쌓았는데 천장궁륭의 축성을 위해 미리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벽돌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남북의 짧은 양벽은 수직으로 되었으나 동서의 긴 벽은 천장 부근에서 기차 터널처럼 안으로 좁혀져 아치형 천장을 이룬다. 네 벽의 일부는 토벽으로 하여 그 위에 사신(四神)의 벽화를 장식했고 따로 광배형(光背形)의 감(龕)을 두고 있다.
2.3. 벽화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과 현실의 구조가 중국 화남(華南) 지방의 남조시대 전축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특이한 묘제라는 점이 주목된다. 석실분과 마찬가지로 남면한 구릉의 경사지대에 있으며 평면은 장방형이고 남쪽 벽의 중앙에 연문이 뚫렸으며 연도 바닥에는 배수구가 있다. 벽과 천장은 모두 크기 32cm × 14cm × 15cm 정도의 무늬벽돌(文樣塼)을 5-6열(列)씩 가로로 퇴적하고 그 위에 한 열을 세로로 쌓고 다시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여 퇴적하는 축법(築法)을 써서 쌓았는데 천장궁륭의 축성을 위해 미리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벽돌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남북의 짧은 양벽은 수직으로 되었으나 동서의 긴 벽은 천장 부근에서 기차 터널처럼 안으로 좁혀져 아치형 천장을 이룬다. 네 벽의 일부는 토벽으로 하여 그 위에 사신(四神)의 벽화를 장식했고 따로 광배형(光背形)의 감(龕)을 두고 있다.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무령왕릉과 더불어 벽돌로 축조된 벽돌무덤이다. 동쪽에는 5호분, 서쪽에는 29호분이 자리하고 있다. 지하에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벽돌로 묘실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남북 길이 370cm, 동서 너비 224cm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이 마련되어 있으며, 등감 위쪽에는 마치 창문처럼 꾸민 시설물도 있다. 동서남북의 네 벽면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와 같은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벽돌 중에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 중국 양나라의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특징
공주 송산리 6호분은 벽돌을 사용한 무덤으로, 그 구조가 중국 화남 지방의 남조시대 벽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주목된다. 벽과 천장은 가로 32cm, 세로 14cm, 높이 15cm 크기의 무늬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가로로 5-6열씩 쌓고 그 위에 한 열을 세로로 쌓는 방식을 반복했다. 천장 궁륭(아치형 천장)을 만들기 위해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벽돌을 사용했다. 남북의 짧은 벽은 수직이지만, 동서의 긴 벽은 천장 부근에서 안으로 좁아져 아치형 천장을 이룬다. 네 벽의 일부는 흙벽으로 만들어 그 위에 사신 벽화를 그렸고, 광배(光背) 모양의 감실(龕室)을 설치했다.
무덤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벽돌로 묘실을 만들었는데, 남북 길이 370cm, 동서 너비 224c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놓았던 등감과 창문처럼 꾸민 시설이 있다. 동서남북 네 벽면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벽돌 중에는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 중국 양나라의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32년에 발견된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과 같이 벽돌로 만들어진 벽돌무덤이다. 무덤 안에는 목관을 올려놓았던 관대가 하나만 남아 있어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3.1. 중국 남조 양식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과 현실의 구조가 중국 화남(華南) 지방의 남조시대 전축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특이한 묘제라는 점이 주목된다. 벽과 천장은 모두 크기 32cm×14cm×15cm 정도의 무늬벽돌(文樣塼)을 5-6열(列)씩 가로로 퇴적하고 그 위에 한 열을 세로로 쌓고 다시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여 퇴적하는 축법(築法)을 써서 쌓았는데, 천장궁륭의 축성을 위해 미리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벽돌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남북의 짧은 양벽은 수직으로 되었으나 동서의 긴 벽은 천장 부근에서 기차 터널처럼 안으로 좁혀져 아치형 천장을 이룬다. 네 벽의 일부는 토벽으로 하여 그 위에 사신(四神)의 벽화를 장식했고 따로 광배형(光背形)의 감(龕)을 두고 있다.
지하에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벽돌로 묘실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남북 길이 370cm, 동서 너비 224c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이 마련되어 있으며, 등감 위쪽에는 마치 창문처럼 꾸민 시설물도 있다. 동서남북의 네 벽면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벽돌 중에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 중국 양나라의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2. 무령왕릉과의 유사성
송산리 6호분은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무령왕릉과 같이 벽돌로 만들어진 벽돌무덤이다. 동쪽에는 5호분, 서쪽에는 29호분이 있다.
무덤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벽돌로 묘실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남북 길이 370cm, 동서 너비 224c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등감이 있고, 등감 위에는 창문처럼 꾸민 시설도 있다. 동서남북 네 벽면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벽돌 중에는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 중국 양나라의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목관을 올려놓았던 관대가 하나만 남아 있어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과 매우 유사한 벽돌무덤이므로, 무령왕과 매우 가까운 인물이 묻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3.3. 피장자
목관을 올려놓았던 관대가 하나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과 매우 똑같은 벽돌무덤이어서 무령왕과 매우 밀접한 인물이 피장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4. 도굴 및 훼손
1938년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재직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무단 도굴하였다. 가루베 지온은 이 무덤을 발견 후 도굴하고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된 무덤이라 아무것도 출토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이는 거짓말이었다.
4.1. 가루베 지온의 도굴
1938년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재직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무단 도굴하였다. 가루베 지온은 이 무덤을 발견 후 도굴하고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된 무덤이라 아무것도 출토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이는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가루베 지온이 자기의 공주고보 부임 시절 제자에게 6호분 내부를 찍은 사진을 보냈는데 그 중 하나의 사진에 유물로 보이는 물체가 찍혀있다. 그리고 10번 사진은 아예 보내지도 않았는데 그 사진에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 찍혔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나중에 송산리 6호분을 재조사 할 때 무덤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무덤을 도굴하고 빗자루로 깨끗이 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에 도굴된 무덤들이 토기 조각이나 금제 조각, 금동제 파편이라던가 소량의 부장품이라도 남아있던 것에 비하면 너무 깨끗했다. 이는 그가 무덤을 매우 치밀하게 도굴했음을 입증한다. 이 무덤이 일제강점기 때 처음 발견되었을 때 처녀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가루베 지온이 6호분을 도굴하여 200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당시 논 한 마지기 값이 70JPY~80JPY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6호분은 최초 발견 시 처녀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가루베 지온이 도굴하여 그 사실은 알 수 없다.
4.2. 도굴 피해
1938년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재직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무단 도굴하였다.
가루베 지온은 이 무덤을 발견 후 도굴하고,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된 무덤이라 아무것도 출토되지 않았다고 보고했으나 이는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가루베 지온은 공주고보 부임 시절 제자에게 6호분 내부 사진을 보냈는데, 그 중 한 사진에는 유물로 보이는 물체가 찍혀 있었다. 10번 사진은 아예 보내지 않았는데, 이 사진에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 찍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호분을 나중에 재조사했을 때 무덤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가루베 지온이 무덤을 도굴하고 빗자루로 깨끗이 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의 도굴된 무덤들에서 토기 조각, 금제 조각, 금동제 파편 등 소량의 부장품이라도 남아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깨끗한 상태였다. 이는 가루베 지온이 매우 치밀하게 도굴했음을 보여준다.
이 무덤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발견되었을 때 처녀분(도굴되지 않은 무덤)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루베 지온이 6호분 도굴로 200000JPY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당시 논 한 마지기 값이 70JPY~80JPY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6호분은 최초 발견 시 처녀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이 역시 가루베 지온의 도굴로 인해 진실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