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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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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동요는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을 그린 설화이다. 무왕의 아명인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노래를 부르게 했고, 이 노래가 퍼져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 백제로 오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설화는 미륵사 창건과 무왕의 권력 장악, 익산 천도 등과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적 사실과 혼재되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으로 인해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 이야기가 허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의 존재 등으로 인해 섣부른 결론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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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 - [음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서동요 그림
서동요
곡명서동요
한자 표기薯童謠
제작 시기신라 진평왕 (眞平王) 시대 (599년 이전)
장르동요
작사/작곡백제 무왕(武王)
내용
배경삼국유사의 무왕 설화에 등장하는 동요
특징아이들이 부른 동요 형태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 이야기 반영
영향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
민중 사이에서 널리 퍼짐
후대 드라마 등 문화 콘텐츠의 모티브가 됨
관련 문화 콘텐츠
드라마서동요 (드라마)

2. 줄거리

백제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서라벌)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무왕을 낳았다고 한다. 무왕의 아명(兒名)은 서동(薯童)인데, 항상 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善花) 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그러고 나서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서동요(薯童謠)이다.

원문중세 한국어 해석현대어 해석



이 노래는 도성 안에 소문이 퍼져 궁중에까지 알려졌고, 결국 선화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났다. 서동은 이 소식을 듣고 선화 공주와 함께 백제로 갔다. 서동은 그곳에서 많은 금을 캐냈고, 한 승려의 신통력으로 그 금을 신라 궁궐로 옮겼다. 서동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왕이 되었다.[2]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해지는 설화를 모아 놓은 것으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2]

3. 의미

미륵사 창건설화에 따르면, "무왕과 왕비(선화공주)가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도중 연못 속에서 솟아오른 미륵삼존상(彌勒三尊像)을 만나 이를 모시기 위해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는 것이다. 미륵불국토(彌勒佛國土)를 이룰 수 있는 땅이라 여겨, 이를 실현시킬 인물로서 장이 추대되었다. 미륵불국토의 실현은 관산성 전투 패배로 지친 백성에게 앞으로의 전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과, 미륵불국토 실현을 위해 희생된 자신이 다시 미륵에게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악화된 왕권이 무왕 때 다소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은 무왕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동설화는 동성왕 관련 혼인설화,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擔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이야기 등이 혼재되어 생긴 설화라는 가설도 있다.

어릴 적 고구마를 팔던 서동(薯童,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삼국 제일의 미인으로 불렸던 선화공주를 알게 되어 동요(서동요)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원문중세 한국어 해석현대어 해석



이 소문이 도성 안에 퍼져 궁중에까지 알려지자, 선화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났다. 서동은 이를 알고 선화 공주와 함께 백제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서동은 많은 금을 캐어내고, 한 승려가 신통력으로 그것을 신라 궁궐로 옮겼다. 서동은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 설화는 전해지는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며, 역사적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4. 전개

백제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는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서라벌)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으로, 항상 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善花) 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그러고 나서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원문양주동 역홍기문 역김완진조성훈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夘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니믄
ᄂᆞᆷ 그ᅀᅳ지 얼어 두고
맛둥바ᄋᆞᆯ
바ᄆᆡ 몰 안고 가다
선화공주니ᄆᆞᆫ
ᄂᆞᆷ 그ᅀᅳ기 얼어 두고
셔동 지블
바므란 안고 가다
선화공주니리믄
ᄂᆞᆷ 그ᅀᅳᆨ 어러 두고
서동 방ᄋᆞᆯ
바매 알ᄒᆞᆯ 안고 가다
선화공주님은
ᄂᆞᆷ 그ᅀᅳᆨ 어라 두고
맛둥 방ᄋᆞᆯ
새배ᄋᆡ 돌보고 가에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통정해 두고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 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두고
맛둥 서방을
새벽에 돌보고 갑니다.



일연의 《삼국유사》 2권 무왕조(武王條)에 따르면 서동요가 서울(서라벌)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는 그 딸에게 순금 두른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1]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서라벌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1]

서동은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금 수송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神力)으로 금을 신라로 옮기리라." 하니, 선화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았다. 곧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진평왕은 그의 신이(神異)함을 존경하고, 자주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신라의 도움으로 민심을 얻고 백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1]

5. 서동요와 익산 미륵사 창건 논란

기존에는 일연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면서, 이 명문이 기존 학설에 큰 의문을 제기하였다.[2]

5. 1. 역사학계의 반론

2009년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면서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2]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2]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대부분의 설화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것을 감안할 때,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추측되는 쌍릉의 존재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섣부른 결론은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3]

6. 서동요를 소재로 하는 작품

서동요는 서동요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이다.

6. 1. 드라마

서동요

참조

[1] 백과사전 서동요 http://encykorea.aks[...]
[2] 뉴스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서동요와 괴담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5-06-15
[3] 뉴스 역사 미스터리의 주인공 ‘선화공주’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9-03-00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00으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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