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항
1. 개요
공진항은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런던 대학교, 파리 대학교에서 유학한 인물이다.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만주에 농장 건설을 추진했으며, 한성도서 주식회사 전무, 신한공사 이사, 한성일보 부사장을 역임했다. 1949년 주프랑스 한국 대리공사로 임명되어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1950년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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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천도교 교역자 -
강계대
강계대는 대한제국 말기 관료이자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했으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광복 후 한국독립당과 자유당에서 활동하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
대한민국의 천도교 교역자 -
백철
백철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문학평론가이자 수필가, 번역가, 교육자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 참여와 해방 후 대학 교수 재직으로 국문학계에 공헌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으며 친일 명단에 포함되었다. -
곡부 공씨 -
공옥진
공옥진은 1931년 출생하여 판소리와 춤을 결합한 1인 창무극을 개척하고,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80세에 사망했다. -
곡부 공씨 -
공지영
1988년 등단한 소설가 공지영은 민주화 운동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를 조명하는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사회적 논의를 활발하게 이끌어왔으나, 작품과 사회 활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
조봉암 -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관련자 변호와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건준위 부위원장, 민전 공동의장 등을 지내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
조봉암 -
강원용
강원용은 함경남도 출신의 개신교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경동교회 설립과 대화문화 아카데미 창설을 통해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으며, 언론, 사회,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2. 생애
1923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1934년 파리 대학 사회학과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만주에 농장 건설을 구상하였다. 이후 한성도서 주식회사 전무, 신한공사 이사, 한성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주프랑스 한국 공사로 임명되어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50년 11월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귀국하였다.
2.1. 학력 및 초기 경력
1923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와세다 대학교 학사) 영국으로 건너가 1924년 런던 대학 경제과 석사 과정에서 수업한 뒤 다시 프랑스로 가서 8년간 유학하여, 1934년 파리 대학 사회학과 석사(사회과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귀국하면서 만주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재만 한국인의 노동력을 활용할 구상을 하여 만몽산업주식회사(滿蒙産業株式會社)를 창립하였다. 이 회사의 불입자금은 500000KRW이었다. 이 가운데 반은 공진항이 내고 나머지는 같은 고향 사람인 이선근이 끌어들인 이진교, 이홍근 등이 냈다. 1934년 한성도서 주식회사 전무를 역임하였다.
2.2. 외교관 활동
1949년 5월 30일,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 앙리 코스티에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대한민국 외무부 임병직 장관을 방문, 프랑스 정부가 주프랑스 한국 대리공사로 요청한 공진항의 아그레망 수락이 5월 30일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했다.
6월 3일 오후 5시, 국제문화협회는 종로 YMCA에서 초대 주프랑스 공사로 부임하는 공진항의 환송회를 개최했다. 6월 14일, 공진항은 이등서기관 수행원 손병식, 비서 안병무와 함께 서북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출발 전날인 6월 13일 기자들에게 "날로 급변하는 유럽의 중심지에 부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산적한 당면 문제들을 국가의 기본 방침에 따라 성실하게 해결해 나가겠다. 워싱턴에 들러 장면 대사와 업무 협의 후 파리로 향할 것이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파리에 부임한 공진항은 1949년 7월 6일 프랑스 외무상에게 주프랑스 한국 공사 신임장을 제출했다. 같은 날, 주프랑스 공사관이 설치되었다. 1950년 11월 공진항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귀국하였다.
2.4. 기타 활동
1934년 한성도서 주식회사 전무, 1945년 신한공사 이사, 1946년 한성일보 부사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