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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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지영은 대한민국의 소설가로, 1988년 단편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했다. 여성, 노동자, 빈민 등 사회적 약자의 문제와 여성의 삶을 주로 다루며, 페미니스트 작가로 평가받는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가니》 등이 있으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도가니》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하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과 활동을 해왔으며, 2011년에는 소설 《도가니》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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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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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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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공지영 |
한자 | 孔枝泳 |
로마자 표기 | Gong Jiyeong |
출생일 | 1963년 1월 31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
직업 | 소설가, 인플루언서 |
국적 | 대한민국 |
모국어 | 한국어 |
학력 | 연세대학교 |
활동 | |
활동 기간 | 1988년 - 현재 |
장르 | 소설 |
대표 작품 | 도가니 봉순이 언니 |
데뷔 작품 | 동트는 새벽 |
수상 | |
수상 내역 | 21세기 문학상 (2001년) 오영수 문학상 (2004년) 이상문학상 (2011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위기철 (이혼) 오병철 (이혼) 이해영 (이혼) |
자녀 | 3명 |
기타 |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
2. 생애
공지영은 서울특별시 마포구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에 참여하며 삶의 목표를 세웠고, 1988년 소설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했다. 이 작품은 노동운동 투신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3] 초기 작품들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작가 자신처럼 격렬한 시위와 정치적 격변을 겪은 학생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4]
1988년 등단과 동시에 결혼하여 딸을 낳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발표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동시에 혹평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여성, 노동자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빈민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삶으로 창작 영역을 넓혔다.[6] 1993년 소설 《코끼리》는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되었고,[2] 1998년 소설 《봉순이 언니》에서는 1960년대 여성의 삶을 그렸다.[6]
세 번의 이혼 경험과 세 자녀를 둔 공지영은[3] 7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2000년대에 복귀했다. 복귀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사형수와의 만남을 통해 얻은 인간에 대한 신뢰 회복을 바탕으로 집필되었으며, 2006년 영화화되기도 했다. 같은 해 츠지 린세이(辻仁成)와의 협업 작품인 『사랑 후에 오는 것』을 발표했다.
도가니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발언을 활발히 이어갔으며, 20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을 지지했다.[14]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등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이어가고 있다.[15]
2. 1. 유년기 및 청소년기 (1963년 ~ 1980년)
공지영은 자전적 소설 《봉순이 언니》의 배경이 된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공석붕은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차와 기사가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21] 1969년 아버지가 일본으로 출장을 가게 되자 시골 친척들까지 김포국제공항으로 와 환송하며 단체 사진을 찍고 잔치를 벌였다. 아버지는 유학 선물로 공지영에게 핑크색 바바리, 키티 필통, 롤러스케이트 등 고가 선물을 사주어 친구들 사이에서 주목받았다.[22] 공지영은 공부를 잘해 선생님에게 사랑받았지만, 부모는 검소한 편이라 용돈을 많이 주지는 않았다. 부유한 친구들은 초등학생임에도 지갑에 지폐가 가득했고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탔지만, 다른 친구들은 풀빵조차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공지영은 부유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돈이 부족했고, 가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수 없는 왕따였다.[23]공지영은 초등학교 3학년 때 MBC 주최 '어머니' 주제 글쓰기 대회에서 차상을 받아 상금 30000KRW을 받으며 실력을 드러냈다. 수상작은 어머니가 오빠를 편애한다는 어린이다운 투정을 담은 내용이었다.[24]
공지영은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가장 큰 일탈로 "언니 코트를 입고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집에 온 것"을 꼽았는데, 당시 고등학생이 커피숍에 가면 정학을 당했기 때문이다.[25] 중학교 시절에는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활약하던 최동원 선수를 좋아했다. 하지만 같은 학생에게 사인을 받는 것이 자존심 상했던 공지영은 "나중에 내가 사인을 해주겠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25]
공지영은 반에서 1등을 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지만, 대학교에 입학하며 인생이 바뀌었다. 대학 시절은 독재 정권이 집권하고 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격렬하게 하던 시기였다. 공지영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대학 생활의 방향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고3 대입 시험 직전까지 성당에서 가톨릭 포콜라레 운동(Focolare Movement)에 참가하여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성당과 빈민촌에서 봉사하며 가난한 이들을 만났다. "과거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 막시즘이 이미 그 봉사활동 안에 녹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 활동을 이야기한다"라고 말했다.[26] 공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10대 시절에 자신의 소설과 시를 자가 출판하기도 했다.[2]
2. 2. 대학 시절과 민주화 운동 (1981년 ~ 1987년)
1981년, 공지영은 386 세대의 첫 세대로서 민주화 열기가 가득했던 시대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에서 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하다 문학회에 들어가 기형도, 성석제와 교류했다.[27]당시 학생 식당에서 밥 먹을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친구들이 많았다. 곱게 자란 공지영에게 선배들이 싫은 내색을 하기도 했다.[28] 공지영은 서른 살이 되어서야 기형도의 시집을 보면서 가난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작품에도 동료 대학생들의 신념과 자신의 성향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자신이 돈이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아버지와 이념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 부정 개표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1주일간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30]
1985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3] 대학 시절 학생 운동에 참여하면서 삶의 목표를 세웠으며, 이는 첫 소설인 『밤의 질주』에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참여 경험으로 반영되었다.[2] 초기 작품들은 1980년대, 작가 자신처럼 격렬한 시위와 정치적 격변의 10년을 보낸 학생들을 그리고 있다.[4]
2. 3. 작가 데뷔와 초기 활동 (1988년 ~ 1999년)
1984년 공지영은 시인으로 등장했다. 대학교 졸업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어(자실) 상근 간사로 취직했다.[31] 1987년 부정 개표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경험을 토대로 쓴 《동트는 새벽》을 1988년 창작과 비평에 실으며 소설가로 등단했다.[19][30]1988년, 공지영은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함과 동시에 딸을 낳았다. 결혼 후 딸을 키우며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낮에는 시간이 없어 새벽에 글을 쓰면서 딸이 깰까 봐 스탠드에 수건을 덮어놓고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집필했다.[33]
월셋방에서 혼자 딸을 키우던 시절, 생활비 마련을 위해 출판사로부터 선금 150만원을 받고 글을 쓴 후 추가로 15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공지영은 이 원고료를 생활비로 사용했으며, 가난이 큰 동력이었다고 회고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80~90만 부가 팔렸고, 비슷한 시기 출간된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인지도를 높였다.[35] 그러나 "대중의 지지만을 얻기 위한 글을 쓴다", "얼굴로 책을 판다"는 등의 혹평을 받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봉순이 언니》를 끝으로 7년 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했는데, 공지영은 "힘든 시기에 막내도 태어났고 이혼도 하면서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에 작품을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36]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한 공지영은 노동자, 빈민, 차별받는 사람들의 문제와 가족 내외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젊은 교육받은 여성들의 삶을 주로 다루었다.[5][4]
많은 사람들에게 페미니스트 작가로 여겨지는 공지영은, 작품에서 여성의 투쟁과 노동 운동의 주제를 함께 다루며, 등장인물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과제에 직면하는 모습을 그렸다. 1990년대에는 여성과 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면서 한국 사회의 빈민과 차별받는 구성원들로 창작 영역을 확장했다.[6] 1993년 소설 《코끼리》는 영화(1995년 공지영의 소설 중 최초로 장편 영화화되었다[2])와 연극으로 제작되었다.[6] 1998년 소설 《봉순이 언니》에서는 1960년대 여성의 삶을 그렸다.[6]
2. 4. 공백기와 복귀 (2000년 ~ 2009년)
7년간의 공백 끝에 공지영은 아이들의 학비 등을 벌기 위해 복귀했다.[37] 7년 만에 펜을 잡자 문장이 잘 떠오르지 않아 고민했지만,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시절이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글을 썼다. 이전에는 단편 소설을 쓰는 데 보름 정도 걸렸지만, 복귀 후에는 6개월이나 걸릴 정도로 힘들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글을 쓴 결과 차츰 이전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공지영은 그 공포가 심해 앞으로는 펜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리하여 나온 작품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사형수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사형수만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여 쓴 것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자신과, 살고 싶어도 죽어야 하는 사형수를 작품에 투영한 것이다. 공지영은 소설을 쓰면서 5개월 정도 사형수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37] 사형수를 처음 만나자마자 눈물을 마구 흘렸고, 그 눈물은 3년간 이어졌다. 그러한 눈물을 본 사형수가 마음을 서서히 열기 시작했다. 밥을 먹었느냐고 묻는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교감으로 인해 사형수들이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이전까지 품어왔던 인간에 대한 불신을 내려놓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싹트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사형수들과의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38]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유력 일간지에 인터뷰가 실렸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가 "국장이 바뀌어서 특집을 하려는데 공지영 인터뷰를 하고 와라"라는 지시를 받고 찾아왔다. 공지영은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라고 고백했다.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다음날 신문 가판대 1면에 '아이 셋, 이혼 셋'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간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통쾌하다'라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는 공지영에게 전화해 "네가 세 번 이혼하는 것은 싫지만, 네가 불행해지는 것은 더 싫다"라며 격려했고, 큰 용기를 얻었다. 소설가의 이미지가 중요했던 시기라 좌절했으나, "소설가 못하면 어떤가, 내 인생이 그것뿐은 아니다"라며 스스로 위안을 얻고 위대한 소설가보단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기사가 나간 후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것을 우려했으나, 아픔을 뚫고 나온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수많은 안티들도 사라졌다. 아이들에게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39]
2006년 츠지 린세이(辻仁成)와의 협업 작품인 『사랑 후에 오는 것』을 발표했다. 같은 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강동원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2008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사와라 미즈(佐原ミズ)에 의해 만화화되어 《주간 코믹 뱅치(週刊コミックバンチ)》에서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이 출판되었다.
2. 5. 사회적 발언과 논란 (2010년 ~ 현재)
도가니가 큰 성공을 거두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정치 활동" 참여를 이유로 공지영에 대한 조사를 촉구했다.[10] 한나라당 의원이자 인권위원회 위원인 김연호는 그녀의 묘사가 시민들을 "과도하게 위협"했다는 이유로 공지영에 대한 조사를 제안했다.[11] 공지영은 이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한나라당 덕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글을 올리며 김연호의 발언을 풍자했다.[12] 공지영은 약 3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영향력 있는 트위터리안이며,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을 통해 사회 문제와 논란이 되는 의견을 논의해 왔다.[13]20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을 지지했다.[14] 전 법무부 장관 조국에 대해 가족의 부정입학 의혹 및 부정투자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옹호했다.[15]
3. 작품 세계
공지영은 이기호, 함민복과 함께 인터넷을 일찍이 활용한 작가 중 한 명이다. 2008년 11월 7일, 한국 인터넷 포털 다음에 《도가니》를 처음으로 공개하여 6개월 동안 연재했다.[8] 이는 한국에서 일반적인 연재 방식이지만, 전통적으로는 신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2009년 소설 《도가니》는 장애인 권리와 관련하여 한국 사회와 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9] 2011년 영화 《도가니》가 큰 성공을 거두자, 한나라당 의원들은 "정치 활동" 참여를 이유로 공지영에 대한 조사를 촉구했다.[10] 한나라당 의원이자 인권위원회 위원인 김연호는 그녀의 묘사가 시민들을 "과도하게 위협"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제안했다.[11] 이에 공지영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한나라당 덕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글을 올리며 김연호의 발언을 풍자했다.[12] 공지영은 약 3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영향력 있는 트위터 사용자이며,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을 통해 사회 문제와 논란이 되는 의견을 논의해왔다.[13]
3. 1. 주요 주제
공지영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노동자, 빈민, 차별받는 사람들 주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5] 또한 가족 내외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젊은 교육받은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4]많은 사람들에게 페미니스트 작가로 여겨지는 공지영은, 특히 많은 작품에서 여성의 투쟁과 노동 운동의 주제가 겹쳐 나타난다. 등장인물들은 노동 운동 이후 자신을 위한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해야 한다. 1980년대의 혼란과 억압이 1990년대의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으로 이어지면서, 필수적인 사회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학생들은 더 이상 그들의 혁명적 열정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한때 자신의 정체성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던 방향 감각 없이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여성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에 평범한 시민으로 재통합되는 과정은 한때 경멸했던 물질적인 목표를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질서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생긴 분노와 혼란이 공지영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6]
사회 운동이 공지영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지만, 여성 문제, 특히 사회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공지영은 법으로 보장된 성평등이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며 지속적으로 성평등을 옹호하고 있다. 여성 문제를 직접 다룬 그녀의 1993년 소설 《코끼리》는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되었다.[6]
1990년대 후반, 공지영은 여성과 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가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빈민과 차별받는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창작 영역을 확장했다. 그녀의 1998년 소설 《봉순이 언니》에서는 1960년대 여성의 삶을 그렸고, 베스트셀러 소설 《즐거운 우리 집》에서는 사형 제도 문제를 다루었으며, 자전적 소설 《행복한 우리 집》에서는 이혼녀의 가정 현실을 묘사했다. 그녀의 최근 작품 《도가니》에서는 한국 사회의 성적 억압과 장애인에 대한 증가하는 학대와 폭력을 폭로했다.[6]
《즐거운 우리 집》은 영화 《성금요일》로 제작되었다.[7]
3. 2. 문학적 특징
공지영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노동자, 빈민, 차별받는 사람들 주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5] 또한 가족 내외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젊은 교육받은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4]많은 사람들은 공지영을 페미니스트 작가로 여긴다. 특히 그녀의 많은 작품에서 여성의 투쟁과 노동 운동의 주제가 겹쳐 나타난다. 등장인물들은 노동 운동 이후 자신을 위한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해야 한다. 1980년대의 혼란과 억압이 지나가고 199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찾아온다. 그러나 학생들은 더 이상 그들의 혁명적 열정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한때 자신의 정체성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던 방향 감각 없이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여성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에 평범한 시민으로 재통합되는 과정은 한때 경멸했던 물질적인 목표를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질서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생긴 분노와 혼란이 공지영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6]
사회 운동이 공지영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지만, 여성 문제, 특히 사회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공지영은 법으로 보장된 성평등이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며 지속적으로 성평등을 옹호하고 있다. 여성 문제를 직접 다룬 그녀의 1993년 소설 《코끼리》는 영화(1995년 공지영의 소설 중 최초로 장편 영화화되었다[2])와 연극으로 제작되었다.[6]
1990년대 후반, 공지영은 여성과 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가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빈민과 차별받는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창작 영역을 확장했다. 1998년 소설 《봉순이 언니》에서는 1960년대 여성의 삶을 그렸고, 베스트셀러 소설 《즐거운 우리 집》에서는 사형 제도 문제를 다루었으며, 자전적 소설 《행복한 우리 집》에서는 이혼녀의 가정 현실을 묘사했다. 그녀의 최근 작품 《도가니》에서는 한국 사회의 성적 억압과 장애인에 대한 증가하는 학대와 폭력을 폭로했다.[6]
《즐거운 우리 집》은 영화 《성금요일》로 제작되었다.[7] 이 영화는 2006년 9월 개봉 당시 4년 만에 베스트셀러 차트 1위에 오르며 8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3]
공지영은 이기호와 함민복과 함께 인터넷을 일찍이 활용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2008년 11월 7일 한국 인터넷 포털 다음에 《도가니》를 처음으로 공개하여 6개월 동안 게재했다.[8] 이러한 형태의 연재는 한국에서 일반적이지만, 전통적으로는 신문에서 이루어졌다.
2009년 소설 《도가니》는 장애인의 권리와 관련하여 한국 사회와 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9] 2011년 영화 《도가니》가 큰 성공을 거두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정치 활동" 참여를 이유로 공지영에 대한 조사를 촉구했다.[10] 한나라당 의원이자 인권위원회 위원인 김연호는 그녀의 장황한 묘사가 시민들을 "과도하게 위협"했다는 이유로 공지영에 대한 조사를 제안했다.[11] 공지영은 이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한나라당 덕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글을 올리며 김연호의 발언을 풍자했다.[12] 공지영은 약 3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영향력 있는 트위터리안이며,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을 통해 사회 문제와 논란이 되는 의견을 논의해왔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