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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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덕정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에 있는 조선 시대의 건축물이다. 1448년(세종 30년) 제주 목사 신숙청에 의해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창건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역사적으로는 3·1절 발포사건, 4·19 혁명 기념식 등 다양한 사건과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었다가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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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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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제주 관덕정 |
영문 이름 | Gwandeokjeong Hall, Jeju |
지정 번호 | 보물 제322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 19 (삼도2동) |
소유 | 국유 |
시대 | 조선 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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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세종 30년(1448년)에 처음 지어진 관덕정은 조선시대 동안 여러 차례 중수와 개축을 거쳤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7세기 전후에 수리된 건축 형태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도로 건설을 이유로 처마 끝부분이 잘려나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여 있고, 처마를 받치기 위한 익공이 기둥마다 두 개씩 설치되어 있다. 해방 이후 1959년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관덕정 앞 광장은 이재수의 난(1901년) 등 제주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다. 이재수는 관덕정 앞에서 징세관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자들을 처형했다.
관덕정에는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진 현판이 있었으나, 1601년에 불타 없어져 이산해가 쓴 현판을 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관덕정 내부에는 '탐라형승', '호남제일루' 등의 현판과 여러 그림들이 걸려있다.
1922년 제주기독청년회 주최 자선음악연주회가 열렸고, 1925년에는 보천교 성토강연회가 열렸다. 1930년에는 결핵예방강연회가, 1947년에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양과자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1964년에는 일본 어선과 경비정의 영해 침범을 규탄하는 제주 대학생 성토대회가 열렸다. 1972년에는 태풍으로 지붕 일부가 붕괴되고 현판이 날아가기도 했다. 1985년에는 한라문화제의 행사 중 하나인 한라산신제가 열렸다. 1994년에는 우루과이라운드 비준을 반대하는 결의대회가, 1995년에는 5.18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하는 대회가 열렸다. 1997년에는 관덕정 뒤편에서 변사체가 발견되기도 했다.[3] 1999년에는 국가보안법 철폐 도민대회가 개최되었고, 제주목 관아 복원 공사로 분수대가 헐렸다. 2001년에는 '2001 지역문화의 해' 출범식이 개최되었고,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1702년 관덕정 앞에서 열린 행사들은 탐라순력도에 기록되어 있다.
날짜 | 내용 |
---|---|
6월 7일 | 조정에 바칠 공마 433필 점검 |
6월 17일 | 승보시 개최 |
11월 17일 | 제주목사가 관하 각 관리의 치적 심사 |
11월 20일 | 제주의 신당과 사찰을 불사르고, 관리들이 모여 조정을 향해 배례 |
11월 28일 | 제주의 토관이 모여 활쏘기 |
2. 1. 창건과 중수
세종 30년(1448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 훈련을 위해 관덕정을 지었다.[1] 관덕(觀德)이란 이름은 유교 경전 《예기》 사의 편에 나오는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이후 조선 중·후기에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쳤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었다. 1969년에 제10차 중수를 거친 후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고 일반에게 공개되었다.[1]관덕정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기록에 남아있는 중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시기 | 내용 |
---|---|
성종 11년(1480년) | 목사 양찬이 중수 |
명종 14년(1559년) | 목사 이영이 중수 |
숙종 16년(1690년) | 목사 이우항이 중수 |
영조 29년(1753년) | 목사 김몽규가 중수 |
정조 2년(1778년) | 목사 황최언이 중수 |
순조 33년(1833년) | 목사 한응활이 중수 |
철종 2년(1851년) | 목사 이현공이 중수 |
고종 19년(1882년) | 목사 박선양이 중수 |
1969년 | 제10차 중수 |
2003년 ~ 2006년 | 대대적인 보수 |
2. 2. 일제강점기
1924년(당시 도사: 마에다 요시지)에 관덕정 옆으로 도로를 내면서, 도로에 처마가 걸린다는 이유로 15척(454.5cm)이나 되던 긴 처마의 끝부분 2척(60.6cm)을 잘라내는 피해를 입었다.[1]2. 3. 해방 이후
해방 이후 관덕정은 한동안 미국공보원과 국민회가 사용하였다.[1] 1959년 3월 9일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면서 내부를 비웠으나,[1]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었다. 1969년 제10차 중수를 거친 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고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관덕정 앞 광장은 3·1절 발포사건(1946년)과 4.3 사건 등 제주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였다. 4.3 사건 당시 제주 남로당 소속 재산(在山)유격대의 대장이었던 이덕구의 시체가 이곳 관덕정 앞에 전시되기도 하였다.[1]
1949년 4월 9일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환영대회가 열렸고, 6월 8일에는 군경과의 교전 중에 사망한 이덕구의 시체가 내걸렸다. 1961년 2월 14일에는 조병옥 박사 1주기 추도식이, 4월 19일에는 4.19 혁명 1주기 기념식이 열렸다. 1962년 4월 29일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주도지부(제주예총) 창립총회가 열렸다. 1963년 10월 9일에는 민정당의 선거연설회가 열려 군정을 종식시켜야 함을 성토했다.
1993년 5월 15일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이 주도하여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광주 담화를 비난하고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회가 열렸다. 1999년 1월 2일에는 중단되었던 제주입춘굿놀이가 복원되어 매년 입춘일에 거행되고 있다.
3. 건축
세종 30년(1448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 훈련을 위해 관덕정을 지었다. 관덕(觀德)이란 이름은 유교 경전 《예기》 사의 편에 나오는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1]
일제 강점기인 1924년(당시 도사: 마에다 요시지)에 도로를 내면서 처마가 걸린다는 이유로 15척(454.5cm)이나 되던 긴 처마의 끝부분 2척(60.6cm)이 잘려 나갔다.
해방 이후 한동안 미국공보원, 국민회가 사용하였으나 1959년 3월 9일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면서 내부를 비웠고,[1]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었다. 1969년에 제10차 중수를 거친 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고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관덕정 앞 광장은 이재수의 난(1901년), 3·1절 발포사건(1946년) 등 제주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재수는 민군을 이끌고 제주성에 입성하여 관덕정 앞에서 징세관의 하수인이나 프랑스 선교사의 위세를 업고 제주 도민을 업신여기던 자들을 색출해 3백여 명이나 처형하였다. 4.3사건 당시 제주 남로당 소속 재산(在山)유격대 대장이었던 이덕구의 시체가 이곳 관덕정 앞에 내걸려 대중들 앞에 전시되었다.
3. 1. 구조
관덕정은 세종 30년(1448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 훈련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조선 중·후기에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쳤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17세기 전후에 수리된 건축 형태로, 정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다. 처마가 길고 건물 높이가 낮은 제주도 건축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1]일제 강점기인 1924년에는 도로 건설로 인해 처마 끝부분이 잘려나가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여 있고, 처마를 받치기 위한 익공이 기둥마다 두 개씩 설치되어 있다.
관덕정 내부 서쪽 들보에는 정조 4년(1780) 제주목사 김영수가 쓴 '탐라형승', 고종 19년(1882년) 제주방어사 박선양이 쓴 '호남제일루' 현판이 걸려 있다. 남쪽과 북쪽 들보에는 상산사호(商山四皓),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3. 2. 현판과 벽화
신석조의 《관덕정기》(觀德亭記)에는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는 선조 34년(1601년)에 그 현판이 불타 없어져서 이산해가 쓴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관덕정 내부 서쪽 들보에는 정조 4년(1780) 제주목사 김영수가 쓴 '탐라형승', 고종 19년(1882년) 제주방어사 박선양이 쓴 '호남제일루'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남쪽과 북쪽 들보에는 상산사호(商山四皓),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1]4. 역사적 사건
관덕정 앞 광장은 이재수의 난(1901년), 3·1절 발포사건(1946년) 등 제주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장소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다양한 행사들이 관덕정에서 열렸다. 1922년 7월 18일에는 제주기독청년회 주최 자선음악연주회가, 1925년 2월 8일에는 보천교성토회를 중심으로 보천교 성토강연회가, 1930년 7월 16일에는 경성세의전학생결핵예방회 주최로 결핵예방강연회가 열렸다.
해방 이후에도 관덕정은 여러 사건과 행사의 중심지였다. 1947년 2월 10일에는 제주의 중학생들이 미군정에 반대하여 양과자를 먹지 말자는 시위를 벌였고(양과자 반대시위), 1949년 4월 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대회가 열렸다. 1961년 2월 14일에는 조병옥 박사 1주기 추도식이, 1962년 4월 29일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주도지부(제주예총) 창립총회가 열렸다.
1972년 7월 26일에는 태풍으로 관덕정의 지붕 일부가 붕괴되고 현판이 날아가는 피해를 입었다. 1985년 10월 4일에는 제24회 한라문화제(1985.10.4~10.7)의 행사 중 하나인 한라산신제가 열렸다.
1995년 12월 1일에는 학생과 시민 2백여 명이 관덕정 앞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특별검사제 도입과 대선자금 공개를 요구하였다.
1997년 8월 14일에는 관덕정 뒤편에서 고 모씨(당시 32세, 여)의 변사체가 발견되는 관덕정 살인사건이 발생했다.[3] 1999년 1월 2일에는 중단되었던 제주입춘굿놀이가 74년 만에 복원되어 매년 입춘일에 열리고 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제주목 관아 복원 공사로 관덕정 앞 분수대가 철거되었다.
2001년 2월 4일에는 관덕정 앞 탐라입춘굿놀이 행사 현장에서 '2001 지역문화의 해' 출범식이 개최되었다. 2005년 12월 29일부터 2006년 8월 8일까지 관덕정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4. 1. 이재수의 난 (1901년)
1901년 민군을 이끌고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는 관덕정 앞에서 평소 징세관의 하수인으로, 또는 프랑스 선교사의 위세를 업고 제주 도민을 업신여기던 자들을 색출해 300여 명이나 처형하였다.[1]4. 2. 3·1절 발포사건 (1947년)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 도중에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당하는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났다.[1]4. 3. 제주 4.3 사건
1949년 6월 8일, 군경과의 교전 중에 사망한 4.3사건 당시 한라산 남로당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체가 관덕정 앞에 내걸려 대중들 앞에 전시되었다.[1]4. 4. 민주화 운동
1947년 3월 1일에는 3.1절 기념식 도중에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당하는 삼일절 발포사건이 발생했다.[2] 1949년 6월 8일에는 군경과의 교전 중에 사망한 한라산 남로당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체가 관덕정 앞에 내걸렸다.[2]1961년 4월 19일에는 4.19 혁명 1주기 기념식이 열렸으며, 이후 매년 개최되었다.[2] 1963년 10월 9일에는 민정당의 선거연설회가 열리고, 군부의 군정을 종식시켜야 함을 성토하였다.[2] 1964년 12월 5일에는 일본 어선과 경비정의 영해 침범을 규탄하는 제주 대학생 성토대회가 열렸다.[2]
1993년 5월 15일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이 주도하여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광주 담화를 비난하고 5.18의 진상규명을 촉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회가 열렸다(광양교차로까지 거리행진).[2] 같은 해 12월 1일에는 제주지역 총학생회협의회 소속 대학생 1천여 명이 관덕정 광장에서 감귤 및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를 위한 제2차 도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2]
1994년 4월 8일에는 제주 지역 대학생 7백여 명이 관덕정에서 우루과이라운드 비준을 반대하는 결의대회를 열고 거리행진을 벌였다.[2] 5월 17일에는 제주도내 4개 대학생 2백여 명이 관덕정 앞 광장에서 '5.18 광주 민중항쟁 정신 계승을 위한 제총협 진군대회'를 갖고,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진압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다.[2]
1995년 10월 7일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제주연합 소속 회원과 대학생이 모인 '5.18 관련 학살자 처벌을 위한 실천대회'를 열어 5.18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제정 등을 촉구하였다.[2] 12월 1일에는 학생과 시민 2백여 명, 관덕정 앞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특별검사제 도입과 대선자금 공개를 요구하였다.[2]
1999년 4월 2일에는 제주대생 150여 명이 '4.3 진상규명과 미국에 의한 전쟁책동 분쇄 및 경제침탈 종식을 위한 총궐기대회'를 개최하였고,[2] 10월 30일에는 제주도내 9개 시민단체 회원 70여 명이 '국가보안법 철폐 도민대회'를 개최하였다.[2]
4. 5. 기타
관덕정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목사들이 관덕정에서 공마를 점검하거나, 승보시를 열고, 관리의 치적을 심사하고, 활쏘기를 하는 등 행정 및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탐라순력도에는 이러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2]1901년에는 이재수가 관덕정 앞에서 징세관의 앞잡이와 징세관을 처형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선음악연주회, 보천교 성토강연회, 결핵예방강연회 등이 열렸으며, 1947년에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양과자 반대시위와 3.1절 기념식 중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한 삼일절 발포사건이 발생했다.[2]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 환영대회, 이덕구 시체 전시, 조병옥 박사 추도식, 4.19 혁명 기념식, 제주예총 창립총회 등 정치, 사회, 문화 행사가 열렸다. 또한, 일본 어선 영해 침범 규탄 대회,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 결의대회, 5.18 관련 집회 등 시위 및 집회 장소로도 활용되었다.[2]
1959년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었다. 1972년에는 태풍으로 지붕 일부가 붕괴되기도 했으며, 1997년에는 관덕정 뒤편에서 변사체가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3] 1999년부터는 제주입춘굿놀이가 복원되어 매년 열리고 있다.[2]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5. 갤러리
참조
[1]
뉴스
觀德亭(관덕정)을 國寶指定(국보지정)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59-03-10
[2]
문서
제주대, 제주교대, 제주전문대, 한라전문대 등 4개 대학으로 이루어진 대학생 협의회.
[3]
뉴스
"[신 미제사건 X파일 <1>] 제주판 ‘살인의 추억’ 관덕정 여인 피살"
http://ilyo.co.kr/?a[...]
일요신문
200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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