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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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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기(禮記)》는 예에 관한 다양한 텍스트를 모아 엮은 책으로, 예에 대한 주석서의 의미를 지닌다. 전국 시대 이전부터 전한 시대에 걸쳐 다양한 내용이 추가되었으며,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재구성되었다. 대덕, 대성, 마융 등을 거쳐 정현에 의해 49편으로 정리되었고, 정현의 주석은 예기정의의 기초가 되었다. 1993년 곽점 묘에서 발견된 사본은 예기의 편찬 시기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49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기》는 중국에서 예(Li)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회 질서와 인간 본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대학》과 《중용》이 발췌되어 사서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후 중국 사회와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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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
서지 정보
제목예기 (禮記)
다른 이름예경 (禮經)
의미예의 기록
개요
종류유교 경전
내용예에 대한 기록 및 설명
역사
편찬 시기기원전 2세기 ~ 기원 1세기
편찬자여러 유학자들에 의해 편찬됨
기원예기는 원래 의례(儀禮)의 주석서였음
중요 사건당나라공영달 등이 주석을 달아 오경정의에 포함됨
송나라주희사서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김
구성
권수49편
주요 내용대학 (大學)
중용 (中庸)
악기 (樂記)
단궁 (檀弓)
왕제 (王制)
월령 (月令)
예운 (禮運)
예기 (禮器)
제의 (祭義)
중니연거 (仲尼燕居)
표기 (表記)
자이 (緇衣)
영향
유교 사상예를 통한 사회 질서 유지 강조
후대 학문사서오경의 하나로 유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
관련 항목
유교 경전오경
사서
관련 인물공자
주희
공영달

2. 발생 및 전개

'''기(記)'''는 원래 '예'에 관한 참고 자료, 즉 예경에 대한 토론이나 주석을 의미하는 일반 명사였다.[1] 시간이 지나면서 고유 명사, 즉 책의 제목으로 굳어졌다.

『예기』는 출처와 연대가 불분명한 다양한 텍스트 모음으로, 『주례』와 『의례』같은 다른 "예"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전반적인 구조가 없다.[1] 어떤 부분은 특히 『의례』에 나오는 의례 용어의 정의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부분은 공자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세부 사항을 담고 있다.[1] 텍스트의 일부는 『순자』와 『여씨춘추』와 같은 전한 시대 이전의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다른 부분은 전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1]

진시황의 통치 기간인 기원전 213년, "분서갱유"로 많은 유교 경전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10년 안에 멸망했고, 경전을 암송했거나 필사본을 숨겨둔 유교 학자들이 전한 초기에 이를 재구성했다.[1] 『예기』는 완전히 재구성되었다고 전해진다.[1]

이후 여러 학자들이 초고들을 수정하려 했다. 대덕은 기원전 1세기에 이 텍스트를 개정하여 원래 214권에서 대대례기 85권으로 줄였고, 그의 조카 대성은 이를 소대례기 46권으로 더 줄였다. 마융은 여기에 세 권을 추가하여 총 49권이 되었다.[2] 현대에는 대덕이나 대성에게 이러한 개정을 돌릴 만한 신뢰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이 설명을 반박하기도 한다.[3]

정현은 마융의 제자였는데, 『예』의 주석서를 저술하면서 예에 대한 모든 전통을 결합하여 오늘날까지 표준이 되는 49권의 고정된 판본을 만들었다. 정현의 『예』 주석본은 서기 653년에 제정된 황실의 인가를 받은 텍스트와 해설인 공영달의 "예기정의"의 기초가 되었다.[4]

현대에 전해지는 『예기』는 주나라에서 한나라에 걸쳐 유학자들이 정리한 예에 관한 기술을, 전한대성이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정치, 학술, 습속, 윤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며, 잡다한 기록이 모여있다.[7] 대성이 편찬한 『예기』 외에, 대성의 백부인 대덕이 만든 『대대례기』가 존재한다.

1993년, "흑의" 편의 사본이 호북성 형문시의 곽점 묘 1호 묘에서 발견되었다. 묘가 기원전 300년경에 봉인되었기 때문에, 이 발견은 다른 『예기』 편의 연대를 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학술적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5]

『예기』에 대한 주석서로는 후한의 정현 주석, 그리고 정현 주석을 바탕으로 소(疏)를 더한 당나라 공영달의 『예기정의』(『오경정의』 중 하나), 원나라 진호의 『예기집설』, 주빈의 『예기훈찬』 등이 있다.

2. 1. 예기의 성립

예기의 성립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 제1학설: 전한의 궁정 도서 목록인 한서 예문지에는 "기(記)" 131편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간헌왕이 얻은 예기이며, 여기서 먼저 대덕이 85편을 골라 대대례기를 만들었고, 다음에 대덕이 그것을 삭정하여 다시 46편을 골라 소대례기를 만들었다. 이후, 후한마융이 소대례기에 3편을 더하여 현재의 전체 49편이 되었다고 한다.[8] 이 학설에 따르면, '기'에서 대대례기, 대대례기에서 소대례기가 생겨난 셈이 된다.

  • 제2학설: 고증학자인 전대흔은 대대례기 85편과 소대례기 46편(상하로 나뉜 편을 통합하면 46편이 된다)을 합하면 정확히 131편이 되는 것과, 정현의 육예론에 "대덕이 전한 기(記) 85편, 대성이 전한 기(記) 49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성이 삭정했다는 기재가 없는 것을 근거로, 대덕과 대성은 각자 따로따로 선택하여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9]


현재는 전대흔의 설을 모두 따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수서 경적지의 삭정설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여겨지고 있다.[7]

  • 기타 학설: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는 기(記)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스승이었던 후창의 곡대기(후씨곡대기)를 계승한 것으로, 원래 49편이었다는 학설도 존재한다.(황회신 등 대대례기휘교집주)

3. 예기의 구성

『예기』는 여러 내용을 모아놓은 책으로, 각 편마다 성립 시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지었고, 「월령」은 진 여불위의 『여씨춘추』에 근거하며, 「왕제」는 『사기』 봉선서를 바탕으로 전한 문제 때 편찬되었다고 한다.[1]

1993년 곽점 1호 묘에서 「치의」와 거의 같은 내용을 담은 죽간이 발견되는 등, 출토 문헌에서 『예기』와 공통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1]

전한 궁정 도서 목록인 『한서』 예문지의 '예' 항목에는 「『기』 백 삼십일 편」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현재 전해지는 『예기』의 원형으로 여겨진다.[1]

3. 1. 예기(총 49편) 목록 (생략)

예기(禮記) 49편 목록
번호편명중국어병음번역
01-02곡례 상·하曲禮上下Qūlǐ예의의 요약, 상·하
03-04단궁 상·하檀弓上下Tángōng단궁, 상·하
05왕제王制Wángzhì왕제
06월령月令Yuèlìng다른 달의 정부 절차
07증자문曾子問Zēngzǐ Wèn증자문
08문왕세자文王世子Wénwáng Shìzǐ문왕세자
09예운禮運Lǐyùn예운
10예기禮器Lǐqì예기
11교특생郊特牲Jiāotèshēng교특생
12내칙內則Nèizé내칙
13옥조玉藻Yùzǎo옥조
14명당위明堂位Míngtángwèi명당위
15상복소기喪服小記Sāngfú Xiǎojì상복소기
16대전大傳Dàzhuàn대전
17소의少儀Shǎoyí소의
18학기學記Xuéjì학기
19악기樂記Yuèjì악기
20-21잡기 상·하雜記上下Zájì잡기, 상·하
22상대기喪大記Sàng Dàjì상대기
23제법祭法Jìfǎ제법
24제의祭義Jìyì제의
25제통祭統Jìtǒng제통
26경해經解Jīngjiě경해
27애공문哀公問Āigōng Wèn애공문
28중니연거仲尼燕居Zhòngní Yànjū중니연거
29공자한거孔子閒居Kǒngzǐ Xiánjū공자한거
30방기坊記Fāngjì방기
31중용中庸Zhōngyōng중용
32표기表記Biǎojì표기
33치의緇衣Zīyī치의
34분상奔喪Běnsàng분상
35문상問喪Wènsāng문상
36복문服問Fúwèn복문
37간전間傳Jiānzhuàn간전
38삼년문三年問Sānnián Wèn삼년문
39심의深衣Shēnyī심의
40투호投壺Tóuhú투호
41유행儒行Rúxíng유행
42대학大學Dàxué대학
43관의冠義Guānyì관의
44혼의昏義Hūnyì혼의
45향음주의鄉飲酒義Xiāngyǐn Jiǔyì향음주의
46사의射義Shèyì사의
47연의燕義Yànyì연의
48빙의聘義Pìnyì聘의
49상복사제喪服四制Sàngfú Sìzhì상복사제


4. 예기의 전개

전한 선제 감로 3년(기원전 51년)에 대덕(대대)과 대성(소대)이 『예기』를 편찬하여 박사로 임명되었다.[7] 이후 박사관을 유지했고, 후한 시대에는 14경의 하나로 예에 관한 박사관을 독점했다. 그러나 후한 말 정현은 《소대례기》에만 주석을 달고, 《대대례기》에는 주석을 달지 않아 대성의 《예기》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후 《예기》라고 하면 대성의 《예기》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의례》, 《주례》와 함께 삼례의 하나로 꼽히며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높여갔다.[7]

위진 시대에는 왕숙이 정현에 대항하여 독자적으로 『예기』에 주석을 달았다. 진에서는 왕숙의 주석이 학관에 세워졌고, 이후 정현과 왕숙의 주석 양자가 주도권을 다투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의소 형식으로 『예기』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하창, 황간, 침중, 웅안생 등에 의해 의소가 제작되었다.

정관 연간에 태종의 명에 따라 『오경정의』가 선정되었고, 공영달 등은 정현의 『예기』 주에 의거하여 『예기정의』를 편찬, 정현 주석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같은 시기 위징은 『예기』의 배열이 혼란스러워 재배열하여 체계적인 서적으로 만들고자 『예류』를 편찬하였다.

송대에는 예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으며, 송명리학의 주자학에 의해 『대학』과 『중용』 두 편이 『예기』에서 발췌되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원나라에서는 오징의 『예기찬언』이 저명했는데, 이 책은 『예기』의 편목을 자유롭게 고쳐 독자적인 해석을 제공했다. 명나라 초기에는 『예기대전』이 편찬되어 과거 시험의 텍스트로 사용되었다.[1]

청나라에서는 고증학이 발달하면서 송나라 이후의 연구는 배척되었고, 『예기정의』와 정현의 주석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책들은 현재까지도 중요한 해설서로 평가받고 있다.[1]

4. 1. 한대

전한 선제 감로 3년(기원전 51년)에 대덕(대대)과 대성(소대)이 『예기』를 편찬하여 박사로 임명되었다.[7] 이후 박사관을 유지했고, 후한 시대에는 14경의 하나로 예에 관한 박사관을 독점했다. 그러나 후한 말 정현은 《소대례기》에만 주석을 달고, 《대대례기》에는 주석을 달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성의 《예기》가 유행하게 되었고, 이후 《예기》라고 하면 대성의 《예기》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의례》, 《주례》와 함께 삼례의 하나로 꼽히며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높여갔다.[7]

4. 2. 위진남북조

위진 시대에는 왕숙이 정현에 대항하여 독자적으로 『예기』에 주석을 달았다. 진에서는 왕숙의 주석이 학관에 세워졌고, 이후 정현과 왕숙의 주석 양자가 주도권을 다투게 되었다. 남조에서는 한때 왕숙 주석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북조에서는 일관되게 정현 주석이 사용되었다. 특히, 귀족제가 발달하는 가운데, 상복 제도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10]

남북조 시대에는 의소 형식으로 『예기』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하창, 황간, 침중, 웅안생 등에 의해 의소가 제작되었다.

4. 3. 당대

정관 연간에 태종의 명에 따라 『오경정의』가 선정되었다. 이때 공영달 등은 정현의 『예기』 주에 의거하여 『예기정의』를 편찬, 정현 주석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예기정의』는 남조 양나라 황간의 소를 중심으로 북제 웅안생의 학설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같은 시기 위징은 『예류』를 편찬, 『예기』의 배열이 혼란스러워 재배열하여 체계적인 서적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손염이 시도했던 것이다. 현종 개원 연간, 원행충의 주석을 더해 경으로 승격될 예정이었으나 학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4. 4. 송대

송대에도 예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으며, 『예기』 연구도 많이 이루어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송명리학의 주자학에 의해 『대학』과 『중용』 두 편이 『예기』에서 발췌되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주석서로는 위식의 『예기집설』 등이 있다.

4. 5. 원대 이후

원나라에서는 오징의 『예기찬언』이 저명했는데, 이 책은 『예기』의 편목을 자유롭게 고쳐 독자적인 해석을 제공했다. 진호의 『예기집설』은 『예기대전』의 바탕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는 『예기대전』이 편찬되어 과거 시험의 텍스트로 사용되었다.[1]

청나라에서는 고증학이 발달하면서, 송나라 이후의 연구는 배척되었고, 『예기정의』와 정현의 주석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책들은 현재까지도 중요한 해설서로 평가받고 있다.[1]

5. 예(Li)

공자는 예(Li)를 행동의 기준을 제공하는 모든 전통적인 형태로 묘사했다. "예(Li)"는 문자 그대로 "의례"를 의미하지만, "의식" 또는 "행동 규칙"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좋은 형식", "예의" 또는 "공손함"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공자는 "예(li)"가 행동 규칙과 의식을 통해 경건함과 타인에 대한 존중의 정신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기"에 설명된 바와 같이 "예(li)"는 과거의 단순함을 살펴봄으로써 전통적인 형식의 중요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공자는 전통적인 형식에 초점을 맞춘 행동 기준이 붕괴되는 주(Zhou) 왕조의 혼란을 완화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li)"의 절대적인 힘은 "예기"에서 "백성이 생명을 빚지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의례가 가장 중요하다..."와 같이 나타난다. "예(li)"의 개념은 사람들이 "예(li)"를 그들의 삶에 통합함에 따라 인간 본성, 윤리 및 사회 질서와 밀접하게 연관될 것으로 여겨졌다. "예(li)"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이행하도록 안내하기 때문에 사회에 유익하다.

6. 영향

《예기》는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학》과 《중용》은 종합주의적 체계를 사용하여 유교 사상의 핵심 텍스트가 되었다. 주희는 《대학》과 《중용》을 편집하여 사서를 만들었고, 이는 원나라 이후 과거 시험의 표준 교과서가 되어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청나라에서도 이 기조가 이어졌다. 1313년부터 1905년까지 모든 교육받은 사람은 오경과 사서를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예기》와 그 파생된 두 책은 수 세기 동안 중국의 신념과 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6. 1. 비교

한비자의 편집자(W.K. Liao, 1939)는 한비자 제6장을 예기(Li Ki)와 비교하며, 이 장의 내용 중 일부를 "유교 정신"과 "공자의 대동 사회"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묘사했다. 한비자에는 도덕경과 비교될 수 있는 요소도 있다.[6]

7. 한국어 번역

정병섭이 호광의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을 저본으로 번역하여, 학고방에서 출간하였다.

8. 현대 한국 사회와 예기

禮記중국어는 현대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유교적 전통과 예의범절을 중시하며, 이는 禮記중국어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현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예의 형식과 내용이 간소화되거나 변형되기도 한다. 따라서, 禮記중국어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긍정적인 측면은 계승하되 시대에 맞지 않거나 비합리적인 요소는 과감하게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Annotated Edition of "The Book of Rites" http://www.wdl.org/e[...] 2013-09-04
[2] 서적 The Sacred Books of China http://en.wikisource[...] Clarendon Press 2011-05-31
[3] 서적 Early Chinese Texts: A Bibliographical Guide The Society for the Study of Early China and the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4] 학술지 The Life of a Text: A Brief History of the Liji 禮記 (Rites Records) and Its Transmission 2014-11-01
[5] 서적
[6] 서적 The Complete Works of Han Fei Tzu Arthur Probsthain
[7] 서적 中国思想辞典 研文出版
[8] 문서 『隋書』経籍志
[9] 문서 錢大昕『廿二史考異』漢書卷三
[10] 서적 魏晉時代における喪服禮の研究 敬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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