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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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아홉 마리 용과 관련된 설화로 인해 구룡사(九龍寺)로 불렸으나, 조선 중기 이후 거북바위와 관련된 이야기로 인해 구룡사(龜龍寺)로 불리기도 했다. 도선, 무학, 휴정 등 고승들이 머물며 영서지방의 중요한 사찰로 자리매김했으며, 조선 숙종 때 중수되었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였던 대웅전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복원되었고, 보광루, 황장금표 등 여러 문화재가 남아있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1]
신라 문무왕 8년(668) 의상대사가 구룡사를 창건했을 당시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지었다 하여 '구룡사'(九龍寺)라 불렀으나, 조선 중엽 거북바위와 얽힌 연유로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숙종 32년(1706)에 중건되었다고 전해지는 구룡사에는 구룡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 삼성각(三聖閣), 심검당(尋劍堂), 설선당(說禪堂), 적묵당(寂默堂), 천왕문(天王門), 종루(鍾樓), 일주문(一柱門), 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1]
2. 역사
조선 중기 이후 사세가 기울자,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어 거북바위의 혈을 끊었지만 오히려 사세는 더욱 쇠퇴하였다. 이에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고쳐 불렀다.[1]
조선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고, 근래에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1]
구룡사 대웅전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나, 2003년 9월 화재로 전소되어 2004년 1월 17일 지정 해제되었다. 이후 실측보고서를 토대로 전통 불교양식에 맞게 원형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1]
2. 1. 창건 설화 및 유래
신라 의상(義湘)이 668년(문무왕 8년)에 구룡사(九龍寺)를 세웠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원래 절터는 깊은 연못으로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뇌성벽력과 비를 내려 방해했다. 의상은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었고, 연못 물이 마르며 용 한 마리는 눈이 멀고, 여덟 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가르고 도망쳤다. 의상은 이러한 연유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아홉 구(九)'자를 '거북 구(龜)'자로 고쳐 써 오늘에 이른다.[2] 구룡사는 신라말·고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중 하나로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1]
2. 2. 조선 시대
조선 숙종 32년인 1706년에 구룡사가 중수되었다. 구룡사는 도선(道詵)·무학·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졌다. 그러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다. 이에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렀고,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1]
2. 3. 근현대
구룡사는 도선, 무학, 휴정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로 불렀고, 이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1]
3. 문화재
이 중 대웅전은 동향(東向) 건물로 조선 초기에 개축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예스러운 무게가 다소 감소되었다. 그러나 내부의 닫집은 당시의 조각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한 것이며,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비록 낡았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1]
대웅전은 기둥 위에 공포(주심포)를 두고 주심포 사이에도 공간포를 2조씩 배치한 다포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공포의 외부 제공은 앙서형이 중첩되었고 앙서 윗몸에는 각각 연꽃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내부 제공은 하나로 연결하여 당초무늬를 초각하였다. 특히 불상 위에 있는 닫집은 중층으로 되어 특이하다.[1]
천장의 중앙부는 우물천장을, 둘레에는 빗천장을 가설하되 연꽃과 봉황, 구름무늬, 비천상 등을 채화하여 금단청과 함께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다. 이 불전은 공포 내·외부의 장식적인 조각 솜씨 및 구조 수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6년에 보수 및 단청을 하였다.[1]
구룡사 대웅전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나, 2003년 9월 30일 화재로 전소되어 2004년 1월 17일 지정 해제되었다.[1]
3. 1. 구룡사 대웅전 (복원)
2003년 9월 화재로 전소되었던 구룡사 대웅전은 강원도가 2004년 11월 5일 건축물 세부 사항에 대해 미리 제작해 놓은 실측보고서를 토대로 전통 불교 양식에 맞게 원형으로 복원되었다.[1]
3. 2. 원주 구룡사 보광루
조선 중엽 거북바위와 얽힌 연유로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하며, 숙종 32년(1706)에 중건되었다고 전하는 구룡사에는 보광루 등이 있다. 보광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누각이며, 이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전한다.[1] 원주 구룡사 보광루는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5호이다.
3. 3. 원주 학곡리 황장금표
현재 구룡사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소나무 숲에 대한 무단 벌채를 금지하는 표시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1]
참조
[1]
간행물
구룡사(龜龍寺)
한국학중앙연구원
[2]
간행물
구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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