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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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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661년부터 681년까지 재위하며 삼국 통일을 완성하고 나당 전쟁에서 신라의 독립을 지켜낸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고, 아버지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워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일했으며, 681년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동해의 대왕암에 수중릉으로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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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기본 정보
이름문무왕 (文武王)
김법민 (金法敏)
재위 기간661년 ~ 681년
즉위661년
출생일626년
사망일681년 7월 24일
출생지신라
사망지신라
아버지무열왕
어머니문명왕후
왕후자의왕후
후계자신문왕
능묘경주 문무대왕릉
시호문무대왕 (文武大王)
존호문무왕 (文武王)
정치
국가신라
왕위 계승 순서제30대 신라 국왕
전임자무열왕
후임자신문왕
추가 정보
병부령
참전나당 전쟁
백제멸망전
이미지
문무왕 어진 (중앙)

2. 생애

문무왕은 661년 아버지 태종 무열왕이 승하하자 신라의 왕위에 올랐다. 문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백제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을 이어갔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당나라의 지원에 힘입어 전쟁을 수행했다.[2]

문무왕은 661년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667년 다시 고구려 공격을 명령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고구려 멸망 후, 문무왕은 한반도 전체를 통일한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문무왕은 검모잠, 안승 등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과 연합하고, 백제 지역을 점령한 당군을 공격하며 당나라에 맞서 싸웠다. 이러한 저항은 67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2]

674년, 당나라와 신라는 전면전을 벌였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당나라로부터 되찾고, 당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을 지원했다. 분노한 당 고종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왕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문무왕이 사과하고 조공을 바치자 군대를 철수시키고 김인문을 소환했다.[2]

675년,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배했다. 이후 당 고종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이로써 신라는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승리와 독립 유지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2]

663년에는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와 연합한 백제군과 백강 전투를 벌여 왜 수군을 격파하고 백제 부흥을 꺾었다.

666년에는 당나라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여 이적이 이끄는 당군과 함께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이라는 새로운 벼슬을 주고, 귀족들의 관직을 승진시키는 등 왕권 강화에 힘썼다.

678년 북원소경을 설치하고, 680년 금관소경을 설치하는 등 지방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667년 이법부를 좌우로 증설하고, 678년 선박 관리를 담당하는 선부를 독립시키는 등 중앙 관청도 정비했다.

2. 1. 출생에서 즉위까지

문무왕은 아버지 김춘추가 당·신라의 동맹을 맺고 귀국한 후, 650년 6월 진덕여왕이 지은 오언시 태평송을 고종에게 바치고 백제와의 국지전 승전 보고를 하였다. 고종은 김법민에게 태부경 벼슬을 내렸다.[30][31] 654년 아버지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파진찬 벼슬로 병부령이 되었고,[32] 655년 태자에 책봉되었다.[33]

660년 7월 백제 원정에서 김유신 등과 5만 군사를 이끌고 소정방이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백제 잔존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10월 김법민 등이 이례성(청마산성[12])을 함락시키자, 나머지 20여 성도 모두 항복하였다.

2. 1. 1. 출생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681년 음력 7월 1일에 승하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출생 시기나 사망 당시 나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신라 당대의 금석문인 『문무대왕비』에는 문무왕이 승하할 당시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추산하면 문무왕의 생년은 진평왕 건복 43년(626년)에 해당한다.

2. 1. 2. 출생 설화

김유신의 맏누이 보희가 서형산[29] 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온 나라 안에 퍼지는 꿈을 꾸었다. 보희는 동생 문명왕후에게 꿈 이야기를 했고, 문명왕후는 비단치마를 주고 언니의 꿈을 샀다. 며칠 뒤 김유신은 김춘추(뒷날 태종 무열왕이 됨)와 축국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맏누이 보희에게 옷고름을 달게 했으나,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 문명왕후가 대신 바느질을 했다. 김춘추는 문명왕후에게 반하여 청혼하여 결혼했고, 문명왕후는 곧바로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뒷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이다.[29]

2. 1. 3. 즉위까지

650년 진덕여왕의 명으로 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종에게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바쳤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이라는 벼슬을 내렸다.[30][31]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으로써 병부령직에 임명되었다.[32]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33]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사비성을 점령하였다.[34] 661년 태종무열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2. 2. 치세

문무왕은 660년 김유신 장군이 사비(泗沘)에서 계백 장군과 백제를 패퇴시킨 직후, 백제와 고구려와의 오랜 분쟁 중에 즉위하였다. 이러한 투쟁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큰 도움을 받았다.[2]

그의 통치 초기 몇 년은 661년의 실패한 시도 이후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노력에 보냈다. 마침내 667년 그는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고, 이는 668년 고구려의 패배로 이어졌다. 작은 고립된 저항 세력들이 제거된 후, 문무왕은 한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

문무왕은 신라를 당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문무왕은 검모잠안승과 같은 고구려 저항 세력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고 백제 옛 영토를 점령한 당군에 대한 정면 공격을 시작했다. 이러한 투쟁은 6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2]

674년, 당나라와 이전 동맹국이었던 신라는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 대부분을 당나라로부터 빼앗고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격려했기 때문이다.[2] 당 고종은 분노하여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임의로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조공을 바쳤고, 고종은 군대 철수를 명령하고 김인문을 소환했다.[2]

675년, 이근행(李謹行)은 당나라에 복속한 말갈 군대를 이끌고 신라 영토에 도달했다. 그러나 당군은 매소성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했다(당나라 기록은 당군이 이 전투와 신라에서의 다른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2]

고종한반도에서 당군의 완전 철수를 명령하고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이로써 신라는 결국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축출하고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승리와 신라의 독립 유지는 한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 661년 고구려와의 전쟁 중 아버지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663년 5월에는 백제의 옛 장수인 귀실복신 등이 왕족인 부여풍을 옹립하여 백제 부흥을 위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백제와 (倭国)의 연합군과 당(唐)·신라 연합군 사이에 백강(白村江)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왜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백제 부흥의 꿈을 짓밟았다.

666년 4월에는 당에 고구려 토벌 출병을 요청하였고, 당은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고구려 공격을 개시했다. 668년 신라도 당군에 합류하여 평양의 장안성을 공격, 같은 해 9월 21일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전투들을 통해 전공이 뛰어났던 김유신을 등용하기 위해, 기존 최고 관직인 대각간(大角干) 위에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새로 만들어 수여하고 모든 귀족에게 관직을 한 단계씩 승진시켜 주었다. 그러나 개별적인 상은 신라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중앙 귀족의 사병층에는 주어지지 않았고, 활약한 지방 호족과 백제·고구려에서 투항한 관리와 장수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왕의 직접적인 지배가 미치는 군사력을 육성하는 데 힘썼다. 이는 무열왕의 공신상을 본받은 것이었으며, 신라 왕권 확대에 기여하게 되었다.

678년 1월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고 대아찬 오기(吳起)에게 지키게 하였다.[77]

680년 5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78]

중앙 관청 정비에 관해서는, 667년에 입법을 담당하는 이법부(理法府)를 증설[17]하여 좌우 이법부로 하였다. 678년에는 좌우 이법부에 각각 1명의 경(卿, 차관)을 증원 배치하였고, 같은 해에 병부(兵部)의 관할하에 있던 선박 관리를 선부(船府)로 독립시켜 영(令, 장관)을 배치하였다.

백제·고구려의 옛 땅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백제의 옛 도읍 사비에 소부리주(所夫里州, 주치는 현재 충청남도부여군)를 설치하고, 백제의 남서부에는 발라주(發羅州, 주치는 현재 전라남도나주시)를 설치하였다. 678년에는 고구려 평원성 터에 북원소경(北原小京, 강원도원주시)을, 680년에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 경상남도김해시)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고, 왕도 금성(金城)의 문화를 보급하는 데 힘썼다. 6세기에 이미 설치되었던 주(州)·소경(小京)과 함께, 신라의 지방 통치 기구인 구주오소경(九州五小京)의 완성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2. 2. 1. 백제 부흥운동 진압

661년 당은 상중(喪中)이던 문무왕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군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에게 백제 부흥군을 진압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문무왕은 8월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32]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10월 29일서라벌로 돌아왔다.

662년 2월, 탐라국 임금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36] 7월, 문무왕은 왕제(王弟) 인문(仁門)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는 한편,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대산(大山)과 사정(沙井)의 백제 목책을 격파하고 신라군과 합세해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해 함락시켜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열었다. 8월[37]에는 흠순 등 19명의 장수를 시켜 내사지성(內斯只城)의 백제 부흥군을 격파했다.

663년,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에 험준한 주류성(周留城)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避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38] 663년 2월에 흠순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점령하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참수하는 등 백제 부흥군을 더욱 압박했다.[40] 결국 부흥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39] 문무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렸다. 6월, 백제 부흥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부흥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다.[39] 문무왕 역시 김유신, 김인문, 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42]을 함락했다. 문무왕은 왜인들에게 훈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43] 8월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했다(백강구 전투).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하여 9월 7일[44]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39][45] 문무왕은 웅진도독부의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왔다. 664년 3월, 사비산성(泗沘山城)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46] 백제 부흥은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

2. 2. 2. 고구려 정복

문무왕이 처음으로 고구려 정복에 나선 것은 664년 가을 7월이었다. 왕제 김인문과 김품일,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 김군관,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 김문영 등에게 일선(一善)·한산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과 함께 돌사성(突沙城)을 쳐서 멸망시켰다.[46]

666년 4월, 대신 김천존의 아들인 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인 나마 삼광(三光)을 당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49] 그해 12월부터 당은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49] 이때 고구려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들 사이에 형제 다툼이 벌어졌다. 남생이 아우 남건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의 성을 거느리고 당에 항복하면서 고구려 지배층은 내분 상태였다.[50] 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 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왔다.[49]

667년 가을 8월,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9월에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이적(李勣)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51]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한 단독 작전수행 대신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배를 계속 띄워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아직 평양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알고 먼저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먼저 고구려로 갈 길을 뚫기로 했다.[58] 하지만 칠중성을 치기 전, 그해 겨울 10월 2일에 평양성 북쪽 2백리 지점에 도착한 이적은 신라측에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와서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신라군은 칠중성 공격을 포기하고 수곡성(水谷城)으로 향했지만,[58]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이적은 어느새 돌아가버렸고, 신라군도 그냥 돌아왔다.[51]

668년 2월 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남건이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했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53] 6월 12일에 당의 우상(右相)[55]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54] 6월 21일에 문무왕 역시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54]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대각간 김유신
대당총관(大幢摠管)각간 김인문·김흠순·김천존·문충(文忠), 잡찬 진복(眞福), 파진찬 김지경(金智鏡), 대아찬 김양도(金良圖)·김개원(金愷元)·김흠돌(金欽突)
경정총관(京停摠管)이찬 진순(陳純)[56], 화랑 죽지
귀당총관(貴幢摠管)이찬 김품일, 잡찬 문훈(文訓), 대아찬 천품(天品)
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이찬 김인태(金仁泰)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잡찬 김군관(金軍官), 대아찬 박도유(朴都儒), 아찬 용장(龍長)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김문영(金文穎), 아찬 복세(福世)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
서당총관(誓幢摠管)파진찬 의복(宜福), 아찬 천광(天光)
계금당총관(罽衿幢摠管)아찬 일원(日原)·흥원(興元)



이때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된 대각간 김유신은 풍병(風病)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다.[57] 6월 22일에 유인원이 신라의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고, 신라군 장수인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54] 6월 27일에는 드디어 문무왕 자신이 서라벌을 출발했고, 이틀 뒤에는 여러 도의 총관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당군 총사령관 이적을 만난 신라의 김인문은 고구려의 평양 북쪽 20리 되는 지점인 영류산(嬰留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54]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군과 회합할 것을 명했다. 한편 비열성주행군총관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의 벌판에서[54]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남건이 거느리고 온 군사와 충돌했는데, 함께 있던 당의 번병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와중에 김문영의 신라군은 앞으로 나서서 고구려군과 맞서 크게 이겼고, 신라군이 이기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당병은 겨우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한다.

9월 21일에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에워쌌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 98명의 수령(首領)을 이끌고 백기를 들고 항복했고,[53] 신라군의 대당총관 김인문이 보장왕을 이적 앞에 데려가 꿇어앉히고 그 죄를 세었다. 남건은 성문을 닫고 항거하면서, 병력을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9월 26일 승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여니 신라의 5백 기병을 필두로 한 군사들이 평양으로 들어가 평양을 함락시켰다.[53][58] 평양성 내부에서는 임시 군사(軍師)인 비열홀의 세활(世活)이 평양의 소성(小城)에서 전공을 세워 고간(高干) 관등과 벼 500섬을 받았고, 서당당주(誓幢幢主) 김둔산(金遁山)은 평양 군영에서의 전공이 으뜸이라 하여 사찬 관등과 조 700섬을 받았으며,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고구려의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인 공으로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받았다.[54]

평양성이 함락된 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돌아갔고,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이적을 따라 당으로 들어갔다.[54] 신라 측은 긴 전쟁이 끝나고 자신들에게 약속된 은택을 얻을 것이고 공을 세운 장군들도 포상을 받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당나라에 들어갔지만, 당의 총사령관 이적은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며 싸늘한 태도를 보였다.[58]

2. 2. 3. 나당 전쟁과 삼국 통일

664년 문무왕은 왕제 김인문과 김품일, 한산주 도독 김군관, 수약주 총관 김문영 등에게 일선주와 한산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과 함께 돌사성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46]

665년 가을, 문무왕은 당나라 사신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47]에서 맹약을 맺었다. 백마의 피를 마시며 "서로의 경계를 넘어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맹약문을 작성하고, 제물은 취리산 제단 북쪽에 묻고 맹약문은 신라 종묘에 보관했다.[48] 또한, 회맹 지점을 백제와 신라의 국경으로 삼고 푯말을 세웠다.[58] 이는 당초 약속과 달리 당나라가 일방적으로 평양 이남 땅을 신라에 귀속시키지 않은 조치였다. 같은 달, 왕자 정명(훗날의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하고,[48] 겨울에는 일선, 거열주 백성들에게 군수물자를 하서주로 운반하게 하여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48]

666년, 김천존의 아들 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 나마 삼광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하게 하고,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49] 당나라는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했다.[49]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장남 남생남건, 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을 가지고 당에 항복하면서 지배층 내분이 심화되었다.[50] 연개소문의 동생 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오자, 정토와 부하들에게 옷, 양식, 집을 제공하고 서울 및 주·부에 안주시키고, 여덟 성에는 군사를 보내 지키게 했다.[49]

667년, 3일간 큰 잔치를 열었고, 당나라는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대아찬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임명했다. 문무왕은 지경과 개원에게 각각 파진찬과 대아찬 관등을 주고,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임명하는 고종의 칙명을 왕궁 뜰에서 받도록 했다.[51] 같은 달, 고종은 유인원과 김인태에게 비열성[52] 길을 따라 신라 병사를 징발, 다곡·해곡 두 길로 평양에 모이도록 했다.[51] 가을,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 9월에 한성정에 도착해 이적과 합류하려 했다.[51]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하지 않고 정탐을 통해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고 칠중성을 공격해 길을 뚫으려 했다.[58] 하지만 겨울, 이적이 신라군에게 칠중성 공격 대신 평양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신라군은 수곡성으로 향했지만,[58] 11월 11일 장새에서 이적이 돌아가 버려 신라군도 귀환했다.[51] 12월, 당은 유인원을 보내 고구려 정벌을 돕게 하고 문무왕에게 대장군 정절을 주었다.[51]

668년, 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부여성 등 고구려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남건이 5만 군사로 수복하려 했으나 설하수에서 대패했다.[53] 3월, 신라는 비열홀(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삼았다.[54] 6월 12일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맞이하게 했다.[54] 유인궤는 신라 선발군을 이끌고 천강으로 향하고, 문무왕도 6월 21일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주요 장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54]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대각간 김유신
대당총관(大幢摠管)각간 김인문·김흠순·김천존·문충(文忠), 잡찬 진복(眞福), 파진찬 김지경(金智鏡), 대아찬 김양도(金良圖)·김개원(金愷元)·김흠돌(金欽突)
경정총관(京停摠管)이찬 진순(陳純)[56], 화랑 죽지
귀당총관(貴幢摠管)이찬 김품일, 잡찬 문훈(文訓), 대아찬 천품(天品)
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이찬 김인태(金仁泰)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잡찬 김군관(金軍官), 대아찬 박도유(朴都儒), 아찬 용장(龍長)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김문영(金文穎), 아찬 복세(福世)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
서당총관(誓幢摠管)파진찬 의복(宜福), 아찬 천광(天光)
계금당총관(罽衿幢摠管)아찬 일원(日原)·흥원(興元)



대당대총관 김유신은 풍병으로 참전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다.[57] 6월 22일, 유인원이 고구려 대곡성과 한성 등 2군 12성이 항복했음을 알렸다.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곱 군과 한성주 병마를 이끌고 당 군영으로 갔다.[54] 6월 27일, 문무왕이 서라벌을 출발, 이틀 뒤 여러 도 총관들이 출발했다. 김인문은 영류산 아래까지 진군했다.[54]

7월 16일, 한성에 도착한 왕은 총관들에게 당군과 회합을 명했다. 김문영 등은 사천[54] 벌판에서 태대막리지 남건의 군사와 충돌, 신라군이 크게 이겼다. 대당소감 본득은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받았고, 전사한 김상경도 같은 상을 받았다. 아술 사찬 구율은 군령을 어겼다 하여 포상에서 제외되었다.[54]

9월 21일,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포위했다. 보장왕은 연남산 등 98명 수령과 항복했고,[53] 김인문이 보장왕을 이적 앞에 꿇어앉히고 죄를 세었다. 남건은 성문을 닫고 항거했으나, 9월 26일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53][58] 평양성 함락 후, 문무왕은 남한주에서 논공행상을 했다. 흑악령 선극은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 군사 북거는 술간 관등과 벼 1천 섬, 부양 구기는 술간 관등과 벼 700섬을 받았다. 임시 군사 세활은 고간 관등과 벼 500섬, 서당당주 김둔산은 사찬 관등과 조 700섬, 박경한은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받았다.[54]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돌아갔고, 김인문 등이 당으로 들어갔다.[54] 문무왕은 평양성으로 가던 중 당 장수들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돌아왔다.[54] 신라는 전쟁 후 약속된 보상을 기대했지만, 이적은 "신라는 공이 없다"며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58] 신라는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깨닫게 되었다.

10월 22일, 남한주로 돌아온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태대서발한 직위와 식읍 500호, 궤장을 하사하고 보좌관들에게 위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57] 인문을 대각간, 다른 이찬과 장군들을 각간, 소판 이하에게 관위 1등급씩 더해주었다.[54] 10월 25일, 욕돌역에서 국원사신 용장 대아찬에게 대접받았다. 11월 5일, 고구려 포로 7천 명을 거느리고 서라벌로 돌아와 다음날 선조묘에 전쟁 종료를 고하고, 11월 18일 전사자들에게 부의를 내렸다.[54]

669년 5월, 천정군·비열홀군·각련군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59] 급찬 기진산 등을 당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김흠순과 김양도를 보내 사죄하게 했다. 겨울, 당 사신이 쇠뇌 기술자 구진천을 데려갔다.[59] 이는 '천보노'라 불리던 신라 쇠뇌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목장 174곳을 소내에 22곳,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김유신 등 고위 진골 대신들과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59] 백제 여자를 아내로 삼은 한성도독 박도유가 웅진도독부와 내통, 신라 병기를 훔쳐 난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58]

670년 정월, 당 고종은 김흠순에게 귀국을 허락했지만 김양도는 억류,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신라가 백제 땅과 유민을 취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61] 3월, 설오유가 고연무와 병사 1만씩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다. 4월 4일 개돈양에서 말갈족[62]과 전투에서 승리, 백성[63]으로 후퇴했다.[61] 6월, 검모잠이 당 관리와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했다. 검모잠은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충성을 약속, 금마저[64]에 머물게 했다. 7월, 백제 남은 세력을 의심, 김유돈과 수미·장귀를 웅진도독부에 보내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응하면서도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을 야간 기습했다.[58] 김흠순 등이 가져온 지도는 신라 차지 옛 백제령을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58] 신라는 예군을 첩자 혐의로 억류,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쳐서 땅을 빼앗았다. 퇴각한 장수들은 면직으로 매듭지었다.[61] 같은 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61] 12월,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반란을 도모하자 진주를 보내 목을 베었다.[61]

671년 웅진도독부를 침공했다. 말갈병이 설구성을 포위했다 물러가는 것을 쳐서 3백 명을 죽이고, 진공 등을 시켜 수군으로 옹포를 지키게 했다.[58] 6월, 죽지 등을 시켜 가림성 벼를 짓밟게 하고, 당병과 석성에서 싸워 5,300명을 죽이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 과의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58] 7월, 설인귀가 신라에 파견되었는데, 왕은 군사를 숨기고 무기를 감춘 채 기습 준비를 했다. 설인귀는 신라가 은혜를 잊고 고구려를 도와 당을 치고 있다며 항의하고, 당이 신라를 멸망시킬 수 있음을 협박하는 편지를 보냈다.[58] 문무왕은 신라가 당에 협조했던 사실과 당이 약속을 어기고 신라 땅을 무단으로 거둬들인 일을 비난하며 입장을 표명했다.[58] 같은 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진왕을 도독으로 삼았다. 10월 6일 당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 낭장 겸이대후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았다.[58]

나당전쟁의 전개 (파란 화살표: 신라군, 붉은 화살표: 당군)


672년 당나라가 대군으로 신라를 침략했다. 신라는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이기고, 2월에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65] 7월, 고간의 한병 1만, 이근행의 말갈병 3만이 평양 여덟 곳에 군영을 설치했다.[65] 8월부터 한시성과 마읍성을 이기고 백수성 5백 보 거리까지 진군했다.[65]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이들을 이기고, 석문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내부 분열로[66] 당병에 대패, 효천, 의문, 산세, 능신, 두선, 안나함, 양신 등이 죽었다.[65] 원술도 참전했다 살아 돌아왔는데, 김유신은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하려 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66] 유신의 진언에 따라 주장성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65] 9월, 억류했던 웅진도독부 백제 관원들과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고 왕이 표문과 물품을 바치는 등 유화책을 폈다.[65]

673년 2월부터 9월까지, 문무왕은 서형산성, 사열산성, 국원성[67], 북형산성, 소문성, 이산성, 주양성[68], 주잠성, 만흥사산성, 골쟁현성 등 여러 성을 쌓고,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00척으로 서해를 지키게 했다.[69] 김유신이 죽고, 대토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처형당했다.[69] 호로하와 왕봉하에서 당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69] 겨울, 당병은 우잠성을 함락시키고, 거란·말갈 병사는 대양성과 동자성을 멸했다.[69] 신라는 외사정을 두고 수병제를 부활시키는 등 지방 통제를 강화했다.[69]

674년 1월, 덕복이 가져온 신력을 반포했다.[70] 문무왕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고 백제령을 지배하자, 고종은 문무왕 관작을 깎아 없애려 했다.[70]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하고 군사를 딸려보내 신라를 치려 했다.[70] 문무왕은 8월 서형산 아래, 9월 영묘사 앞길에서 대규모 사열식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 달에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했다.[70]

675년 정월, 각 관청 및 주·군 인장을 만들었다.[72] 2월,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돌아가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가 되었다. 문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 당은 문무왕 관작을 회복시켰다.[72] 백제령 대부분이 신라 지배하에 들어가고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신라 주·군이 설치되었다. 문무왕은 당 침략 대비 아홉 부대 병사를 내보냈다.[72] 9월, 설인귀 군사가 천성을 쳤는데, 풍훈[73]이 당을 도왔다.[72] 문훈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천 필을 얻었다.[72] 9월 29일 이근행이 20만 군사로 매초성에 진을 쳤다. 신라군 공격에 당군은 말 30,380필과 병기를 남기고 도망갔다.[72] 안북하를 따라 관·성을 설치하고 철관성을 쌓았다. 이 해 신라-당 18번 싸움에서 모두 신라가 이겨 당병 6,047명, 말 200필을 얻었다.[74]

676년 7월 당군이 도림성을 공격, 현령 거시지를 죽였다.[75] 11월, 시득이 수군으로 설인귀와 기벌포에서 싸웠다. 패했지만, 22회 싸움에서 모두 승리, 당군 4천여 명을 목베었다.[75] 당은 웅진도독부를 요동 건안성으로, 안동도호부를 요동성 거쳐 신성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에서 병사를 철수시켰다.[76]

2. 2. 4. 통치 제도 정비

678년 1월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고 대아찬(大阿湌) 오기(吳起)에게 지키게 하였다.[77]

680년 5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78]

중앙 관청 정비에 관해서는, 667년에 입법을 담당하는 이법부(理法府)를 증설[17]하여 좌우 이법부로 하였다. 678년에는 좌우 이법부에 각각 1명의 경(卿, 차관)을 증원 배치하였고, 같은 해에 병부(兵部)의 관할하에 있던 선박 관리를 선부(船府)로 독립시켜 영(令, 장관)을 배치하였다.

백제·고구려의 옛 땅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백제의 옛 도읍 사비에 소부리주(所夫里州, 주치는 현재 충청남도부여군)를 설치하고, 백제의 남서부에는 발라주(發羅州, 주치는 현재 전라남도나주시)를 설치하였다. 678년에는 고구려 평원성 터에 북원소경(北原小京, 강원도원주시)을, 680년에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 경상남도김해시)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고, 왕도 금성(金城)의 문화를 보급하는 데 힘썼다. 6세기에 이미 설치되었던 주(州)·소경(小京)과 함께, 신라의 지방 통치 기구인 구주오소경(九州五小京)의 완성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2. 3. 붕어 (문무대왕릉)

681년 7월 1일에 56세로 붕어하였다. 유조(遺詔)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장사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 경주시의 관광지이자 경북동해안 국가지질공원의 지질유산인 경주 문무대왕릉으로 남아 있다.[79]

문무왕은 죽기 전, "나라에는 언제나 임금이 있어야 한다. 왕세자가 내 관보다 먼저 내 왕관을 받도록 하라. 내 시신은 화장하여 고래가 사는 바다에 뿌려라. 나는 용이 되어 외침을 막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아들 신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을 한국 해안의 작은 바위섬인 대왕암에 뿌렸다.[3]

사후 세속에서는 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의 대상으로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숭배되었다. 신문왕은 아버지를 위해 감은사를 짓고, 바다 용이 바다와 육지 사이를 오갈 수 있도록 수로를 건설했으며, 미래의 왕들이 문무왕에게 존경을 표할 수 있도록 대왕암을 내려다보는 익궁(益宮)이라는 정자를 건립했다.

꿈속에서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신문왕에게 나타나 "대나무 피리를 불면 천지가 평온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문왕은 꿈에서 깨어 바다로 나가 만파식적이라는 대나무 피리를 얻었다.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영혼이 강림하여 적군을 물리치고, 병을 고치며, 가뭄에는 비를 내리고, 홍수에는 비를 그치게 한다고 전해진다.

재위 21년 만에 681년 7월 1일에 사망하여 문무왕으로 시호되었다. 왕 자신의 유조에 따라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화장된 왕이 되었으며, 유골함은 동해 해변의 큰 바위 위에 묻혔다. 이 큰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불렀으며, 유명한 해중왕릉이다. 또한, 왕을 위해 경상북도경주시 양북면에 감은사가 세워졌다. 감은사에 전해지는 책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짓고자 했으나 완공되기 전에 죽었고, 절은 신문왕 2년(68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18]

신문왕 7년(687년)에 신라의 종묘 제사로서, 신문왕에게는 아버지 문무왕, 할아버지 무열왕, 증조부 문흥걸문왕(김용춘), 고조부 진평왕, 그리고 태조대왕(김씨 왕통의 시조인 13대 미추왕)의 오묘 제도가 정비되었다. 제36대 혜공왕 시대에는 오묘의 대상을 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할아버지 성덕왕, 문무왕, 무열왕, 미추왕으로 하였으며, 문무왕은 무열왕·미추왕과 함께 대대로 변치 않는 종묘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다.[19]

3. 가계

관계이름
조부김용춘(金龍春, 579?~646?)
조모천명공주(天明公主, 생몰년 미상)
부왕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3~661) - 신라 제29대 왕
모후문명왕후 김씨(文明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 김서현의 차녀, 김유신의 누이동생
여동생고타소(古陀炤, ?~642년) - 보라궁주의 소생으로 대야성 성주 김품석(金品釋, ? ~642년)에게 시집감, 윤충에 의해 남편과 같이 사망함.
매제김품석(金品釋, ?~642)
남동생김인문 (金仁門, 629년~694년) - 신라 대장군, 삼국통일의 주역. 사료상으로 강릉 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의 선조.
남동생김문왕 (金文王, ?~665년) - 강릉 김씨 족보상으로 김주원의 선조.
남동생김노차(金老且)
남동생김지경(金智鏡)
남동생김개원(金愷元)
누이지소공주 (智炤公主,생몰년 미상) - 외숙부 김유신에게 60세에 시집감
이모영창부인 김씨(永昌夫人 金氏, 생몰년 미상) - 김서현의 장녀, 태종무열왕의 셋째 부인. 김유신의 누이.
남동생김개지문(金皆知文)
누이요석공주(瑤石公主, 생몰년 미상) - 김흠운(金歆運)과 원효의 아내이자 설총(薛聰)의 어머니.
조카설총(薛聰, 655년~?) - 신라의 유학자
외숙부김유신(金庾信, 595년~673년), 김흠순(金欽純, 생몰년 미상)
왕후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선품공의 장녀. 진골정통계.
아들신문왕(神文王)



문무왕릉비는 그가 흉노(Xiongnu)계 출신이거나, 적어도 그의 가계 일부가 흉노에서 왔다는 것을 시사한다.[4][5][6][7][8][9]

4. 평가

당대의 신라인들은 문무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용모가 영준하고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80]

문무왕의 정책으로 학계에서도 신라사 명군으로 평가받는다.[80]

5. 대중 문화 속 문무왕


  • 1986년 KBS 드라마 《원효대사》에서 배우 안대용이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1992년~1993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 배우 정형기가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2003년 영화 《황산벌》에서 배우 안내상이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배우 백승현이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2006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배우 문회원이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2011년 영화 《평양성》에서 배우 황정민이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2011년 MBC 드라마 《계백》에서 배우 박주형이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2012년~2013년 KBS 1TV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배우 이종수가 문무왕을 연기하였다.[10]
  •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 배우 윤희석이 문무왕을 연기하였다.
  • 2016년 DC 코믹스의 만화책 ''뉴 슈퍼맨''에서 문무왕은 수중 생물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북한 탈북자 안광조의 힘의 원천으로 등장한다.
  • 한국 웹툰 게이머에서 그는 동해 용왕으로 등장한다.

6. 기타


  • 고려 시대에는 문무왕을 '''문호왕'''(文虎王)이라고 불렀다. 고려 혜종의 휘가 왕무(王武)였기 때문에 피휘를 하기 위해 무(武)를 뜻이 같은 호(虎)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 대한민국 해군의 문무대왕함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제2번 함이다.

참조

[1] 서적 Kore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 뉴스 King Munmu the Great , the Guardian of Silla https://world.kbs.co[...] 2010-06-11
[3] 뉴스 King Munmu the Great, the Guardian of Silla https://world.kbs.co[...] 2010-06-11
[4] 간행물 騎馬흉노국가 新羅 연구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장)의 심층취재 내 몸속을 흐르는 흉노의 피 http://monthly.chosu[...] 月刊朝鮮 2004-03-01
[5] 간행물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3> 금관의 나라, 신라 http://www.pressian.[...] Pressian 2005-08-30
[6] 간행물 경주 사천왕사(寺) 사천왕상(四天王像) 왜 4개가 아니라 3개일까 http://news.chosun.c[...] The Chosun Ilbo 2009-02-27
[7] 간행물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http://www.kbs.co.kr[...] KBS 역사추적 2008-11-22
[8] 간행물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http://www.kbs.co.kr[...] KBS 역사추적 2008-11-29
[9] 간행물 (채널돋보기)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일까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08-11-21
[10] 웹사이트 The King's Dream http://www.kbs.co.kr[...] 2018-06-17
[11] 서적 삼국유사
[12] 일반
[13] 일반
[14] 일반
[15] 일반
[16] 일반
[17] 일반
[18] 일반
[19] 서적 삼국사기
[20] 뉴스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http://www.donga.com[...] 1999-08
[21] 뉴스 騎馬흉노국가 新羅 연구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장)의 심층취재 내 몸속을 흐르는 흉노의 피 http://monthly.chosu[...] 2004-03
[22] 뉴스 洗濯板として使われてきた新羅文武王陵碑の上部発見 https://japanese.joi[...] 2009-09-04
[23] 뉴스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3> 금관의 나라, 신라” http://www.pressian.[...] 2005-08-30
[24] 뉴스 경주 사천왕사(寺)사천왕상(四天王像)왜 4개가 아니라 3개일까 http://news.chosun.c[...] 2009-02-27
[25] 뉴스 제1회: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http://www.kbs.co.kr[...] 2008-11-22
[26] 뉴스 제2회: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http://www.kbs.co.kr[...] 2008-11-29
[27] 뉴스 채널돋보기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일까? http://www.imaeil.co[...] 2008-11-21
[28] 일반 문무왕릉비
[29] 일반
[30] 일반
[31] 서적 삼국사기
[32] 서적 삼국사기
[33] 서적 삼국사기
[34] 서적 삼국사기
[35] 서적 삼국사기
[36]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662) 삼국사기
[37] 서적 동사강목
[38] 서적 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원년(662) 일본서기
[39] 서적 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2년(663) 일본서기
[40]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3년(663) 삼국사기
[41] 서적 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제6 唐 高宗 龍朔二年(662) 삼국사기
[42] 기타
[43] 서적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 중 삼국사기
[44] 서적 자치통감
[45] 서적 자치통감 권201 唐紀十七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龍朔 3년(663) 자치통감
[46]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664) 삼국사기
[47] 기타
[48]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5년(665) 삼국사기
[49]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6년(666) 삼국사기
[50] 서적 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5년(666) 삼국사기
[51]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7년(667) 삼국사기
[52] 기타
[53] 서적 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 삼국사기
[54]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 삼국사기
[55] 기타
[56] 기타
[57] 서적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 하 삼국사기
[58]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1년(671) 삼국사기
[59]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9년(669) 삼국사기
[60] 간행물 나당전쟁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1] 서적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0년(670) 삼국사기
[62] 기타
[63] 기타
[64] 기타
[65]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2년(672) 삼국사기
[66] 서적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전 부록 원술(元述) 삼국사기
[67] 기타
[68] 기타
[69]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3년(673) 삼국사기
[70]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4년(674) 삼국사기
[71] 서적 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김인문
[72]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5년(675)
[73] 일반
[74] 일반
[75]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6년(676)
[76] 서적 자치통감 권202 唐紀十八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儀鳳 2년(677)
[77]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8년(678)
[78] 서적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20년(680)
[79] 일반
[80] 웹사이트 빅데이터 기반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활용한 '문무대왕(文武大王) https://www.koread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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