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바 료하치
1. 개요
구사바 료하치는 일본의 법조인으로,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했다. 1925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로 임용되었다. 요코하마지방재판소와 도쿄지방재판소에서 형사 재판을 담당했으며, 최고재판소 사무총장을 거쳐 최고재판소 재판관 및 장관을 지냈다. 록히드 사건 판결에 참여했으며, 정년퇴직을 8일 앞두고 의원 퇴직했다. 1998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훈했으며, 2020년 94세로 사망하여 종2위에 추서되었다.
-
최고재판소 장관 -
요코타 마사토시
요코타 마사토시는 1899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 고등법원 판사, 지방법원장,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일본 최고재판소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
최고재판소 장관 -
다나카 고타로
다나카 고타로는 일본의 법학자이자 판사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상법 연구와 정치 활동을 거쳐 최고재판소 장관과 국제사법재판소 판사를 역임했으며, 1974년에 사망했다. -
2020년 사망 -
박원순
-
2020년 사망 -
김정례
김정례는 대한민국 제1세대 여성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 여성단체 창립 및 국회의원, 보건사회부 장관, 정당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며 여성계와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여성 정치 진출에 기여했다. -
1925년 출생 -
조르조 나폴리타노
조르조 나폴리타노는 이탈리아 공산당 출신의 정치인으로, 이탈리아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이탈리아 최초의 공산당 출신 대통령이자 재선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
1925년 출생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2. 생애
구사바 료하치는 1925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51년에 판사보로 임관했다. 여러 재판소에서 근무하며 형사재판을 주로 담당했고, 최고재판소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야구치 고이치 최고재판소 장관 시절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간이재판소 통폐합, 법정내 촬영 부분 완화 등 사법 개혁을 이끌었다.
1989년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되었고, 1990년에는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하여 사법부의 신뢰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재판관 연수 확대, 당번 변호사 제도 이용 고지 등 사법 제도를 개선했다. 1995년 록히드 사건 판결에서는 과거 촉탁심문조서의 증거 능력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같은 해 정년 퇴임을 앞두고 의원 퇴직했는데, 이는 일본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퇴임 후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에게 후임 장관을 추천했고, 권력 분립 존중 원칙에 따라 그의 추천이 받아들여졌다. 1998년에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훈했으며, 2020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 종2위에 추서되었다.
2.2. 법조 경력
1951년 판사보로 임관하여 요코하마지방재판소,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근무하며 형사재판을 주로 담당했다. 1963년 최고재판소 인사국 임용과장을 역임했고, 이후 최고재판소 비서과장으로 재직하며 신문기자를 통한 홍보 활동에 주력했다.
이후 최고재판소 경리국장, 고후지방재판소장, 도쿄고등재판소 판사를 역임했다. 야구치 고이치 최고재판소 장관 시절 최고재판소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야구치 고이치를 보좌했다. 이때 간이재판소 통폐합을 추진하고 오랜 현안이던 법정내 촬영의 부분 완화 조치를 이끌어냈다. 이후 도쿄고등재판소 장관을 역임했다.
2.3. 최고재판소 재판관 및 장관
1989년 11월 최고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1990년 2월 야구치 고이치의 지명을 받아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했다. 취임식 때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사법의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국민으로부터 한층 더 신뢰받는 사법의 확립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야구치 전 장관의 사법제도 재검토를 답습했고, 핫토리 다카아키 시절 시작된 재판관의 민간·성청 파견 연수의 규모를 늘렸다. 1992년 3월 구치되어 있는 용의자들에게 당번 변호사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지하도록 전국의 재판소에 지시했다.
2.4. 주요 판결
* 1995년 록히드 사건 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에서 19년 전 후지바야시 에키조가 미국 측 증인의 형사 면책을 보장했던 촉탁심문조서의 증거 능력을 부정했다.
* 나리타 신법 사건
*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중의원 정수 소송 (3.18배의 1표의 격차를 위헌 상태로 인정)
* 록히드 사건 마루베니 루트
* 혼외자 상속 차별 소송
2.5. 퇴임 및 이후
1995년 정년 퇴임을 8일 앞두고 의원 퇴직했는데, 이는 일본국 헌법 하에서 최초의 최고재판소 장관 의원 퇴직이었다. 11월 하순에 고등재판소 장관 회합과 재판소 인사 등이 예정되어 있어 현안 파악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퇴임에 앞서 내각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예방하여 후임 장관으로 미요시 도루를 추천했다. 무라야마는 관행에 따라 이를 받아들였는데, 인사 과정에서 구사바와 야구치 고이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야구치는 일본사회당 출신인 무라야마가 보다 리버럴한 인사를 최고재판소 장관으로 기용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요시다 시게루가 다나카 고타로를 장관에 앉혔고 사토 에이사쿠가 자유주의적인 다나카 지로를 배제하고 보수주의적인 이시다 가즈토를 등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라야마는 권력 분립을 존중하여 최고재판소의 후임 장관 인사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퇴임식에서 "재판소에 필요한 것은 안목이다. 조직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만 자격이 요구되는 재판소에선 간단하지 않다. 재판관이 바깥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흡수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재판관에 필요한 안목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재판소의 활성화를 위해 사람과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6. 사망 및 서훈
1998년 4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 2020년 3월 13일 향년 94세로 노쇠로 사망했다. 사후 종2위에 추서됐다.
3. 평가
구사바 료하치는 최고재판소 장관으로서 사법부의 독립성과 국민의 신뢰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995년 록히드 사건의 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에서 19년 전 후지바야시 에키조가 미국 측 증인의 형사 면책을 보장했던 촉탁심문조서의 증거 능력을 부정한 것은 일본 사법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되고 있다.
다만, 정년 퇴직을 앞두고 내각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후임 장관으로 미요시 도루를 추천한 것은 권력 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다. 무라야마는 관행에 따라 이를 받아들였지만, 인사 과정에서 구사바와 야구치 고이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