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연구소
1. 개요
국문 연구소는 1907년 대한제국 학부에 설치된 한국어 연구 기관이다. 한글 맞춤법 연구를 통해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으며, 윤치오를 위원장으로 어윤적, 주시경, 지석영 등 국어학자들이 참여했다. 23차례의 회의를 거쳐 '국문연구의정안'을 마련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인해 실제 시행되지는 못했다. 국문 연구소의 연구는 한국어 정서법을 국가 차원에서 제정하려 한 첫 시도로 평가받으며, 이후 한글 맞춤법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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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
한글 학회
한글 학회는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기원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광복 후 한국어 연구를 주도해 온 대한민국의 학술 단체이다. -
주시경 -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이자 한글 신문으로,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되어 국민 계몽과 조선의 자주독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정부 탄압과 경영난으로 1899년에 폐간되었으며, 민중 계몽에 기여했으나 친일 논조로 비판받기도 한다. -
한국어의 역사 -
이두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신라 시대에 시작되어 한국어의 형태소와 문법 요소를 나타내는 데 활용되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이후 사용이 줄었지만 한국어 표기법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한국어의 역사 -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1443년에 세종에 의해 창제된 한국의 고유 문자로, 한글의 창제목적, 원리, 사용법 등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1446년에 반포되었으며,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로 평가받는다. -
대한민국의 연구소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점기 친일파 규명과 잔재 청산을 목표로 설립되어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으나, 선정 기준 논란 및 편향성 논란 등으로 보수 진영과 갈등을 겪는 연구기관이다. -
대한민국의 연구소 -
세종연구소
세종연구소는 외교, 안보, 통일 전략 등을 연구하는 대한민국의 재단법인 연구소로, 사회 공헌 및 교육 사업도 수행하며 세종 코멘터리 등의 연구 결과물을 발표한다.
2. 배경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글을 ‘국문’(나랏글)이라고 하여, 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및 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에서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글 사용이 점차 늘어나 한문을 섞지 않고 순수히 한글만으로 적는 문자 생활이 확대되자 한글 표기법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1905년 지석영이 상소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고종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으나, 그 내용의 결점이 지적되었다. 지석영은 6개 항목으로 된 맞춤법 통일안을 통해서 닿소리는 △과 ㆁ을 없애 14자로 할 것, 홀소리에는 ·자를 없애고 ㅣ와 ㅡ를 합하여 =라는 새 글자를 만들 것, 된소리는 쌍서(ㄲ, ㄸ, ㅃ, ㅆ)로 표기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906년 5월에 이능화가 학부에 어문정리사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국문일정의견〉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었다. 이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의 건의로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한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 연구소가 설치되었다.
3. 연혁
| | 사건 || 비고 | ||
|---|---|---|
| 1907년 7월 8일 | 대한제국 학부에 국문 연구소 설치 | |
| 1907년 7월 12일 | 위원장 윤치오, 위원 장헌식, 이능화, 현은, 권보상(權輔相), 주시경, 우에무라(上村正己, 당시 학부 사무관) 임명 | 위원 6명 |
| 1907년 8월 19일 | 장헌식 해임, 어윤적 위원 임명 | 위원 6명 |
| 1907년 9월 16일 | 제1차 회의 개최. 연구소 운영 규칙 제정, 매월 10일, 20일, 말일 회의 개최 결정. | |
| 1907년 9월 23일 | 이종일, 이억(李億), 윤돈구(尹敦求), 송기용(宋綺用), 유필근(柳苾根) 위원 추가 임명 | 위원 11명 |
| 1907년 11월 이후 | 현은, 이종일, 유필근 위원 사임 | 위원 8명 |
| 1908년 1월 21일 | 지석영 위원 임명 | 위원 9명 |
| 1908년 6월 | 이민응(李敏應) 위원 임명 | 위원 10명 |
| 1908년 8월 | 이억 위원 사임 | 위원 9명 |
| 1909년 12월 27일 | 제23차(최종) 회의 개최. 총 14개 항 문제 논의. | |
| 1909년 12월 28일 | 《국문연구의정안》 학부 대신에게 제출 |
4. 국문연구의정안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은 통일된 한국어 정서법을 마련하고자 한글의 원리와 연혁, 자모음 등을 연구하여 제출한 보고서이다. 국문 연구소에서 23차례의 회의를 거쳐 1909년 12월 28일 학부 대신에게 제출되었으며, 이때 위원들의 연구 결과를 담은 《국문연구》가 함께 제출되었다. 《국문연구》는 어윤적 1책(90장), 이능화 1책(82장), 주시경 1책(104장), 권보상·송기용·지석영·이민응·윤돈구 1책(각 24장·21장·15장·7장·11장) 등 총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 《국문연구의정안》을 정하고자 진행한 23차례의 회의에서 배포된 유인물의 모음인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 7책)이 남아 있다.
《국문연구의정안》은 비록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인해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국가 차원에서 한국어 정서법을 정하려 한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 보고서는 이후 한글 맞춤법 규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국문연구의정안》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 국문(國文)의 연원(淵源)과 자체(字體) 급(及) 발음(發音)의 연혁(沿革)
# 철자법(綴字法): 《훈민정음》 〈예의〉(例義)를 따르기로 함.
4.1. 주요 내용
| 주요 내용 |
|---|
| 초성, 중성, 종성 글자의 사용 여부 및 표기법을 규정하였다. 칠음과 청탁의 구별, 사성표 사용 여부, 자모의 음독 및 배열 순서 등을 결정하였다. 철자법은 훈민정음 예의를 따르기로 하였다. |
| 세부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