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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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나 한국어 연구에 헌신한 언어학자이다. 한학을 배우다 한국어 연구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접하며 국어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독립신문에서 활동하며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여 맞춤법 제정 및 한글 보급에 힘썼으며, '한글'이라는 명칭을 만들고, 국어 문법 연구와 교육 활동을 펼쳤다. 주시경은 국어 연구소 주임위원으로 활동하며 맞춤법 통일에 기여했고,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글과 한국어를 연구하여, 1914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말의 소리', '국어문전음학' 등 국어 관련 저서를 저술했다. 그는 한글의 표준화와 체계적인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제자들이 조선어학회를 조직하여 한글 연구를 이어갔다. 198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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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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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이름 | 주시경 |
한자 이름 | 周時經 |
출생일 | 1876년 12월 22일 |
사망일 | 1914년 7월 27일 |
출생지 | 봉산군, 황해도, 조선 |
직업 | 언어학자 |
주요 업적 | 한국어 언어학의 초기 기여, 한글 명명 |
한국어 이름 | |
한글 이름 | 주시경 |
한자 이름 | 周時經 |
로마자 표기 | Ju Sigye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u Sigyŏng |
호 | 한힌샘, 한흰메 |
호 로마자 표기 | Hanhinsaem, Hanhuinme |
자 | 상호 |
자 로마자 표기 | Sangho |
일본어 이름 | |
일본어 이름 | 周時経 |
일본어 가나 | しゅうじけい |
일본어 가타카나 | チュシギョン |
기타 정보 | |
종교 | 개신교(감리교) → 대종교 → 개신교(감리교) |
본관 | 상주 |
부모 | 부 주학원(周鶴苑) / 모 연안 이씨 이성수(李聖壽)의 딸 / 양부 주학만(周鶴萬) |
필명 | 호 한힌샘, 한흰메, 두루때글, 주보다리 |
2. 생애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문을 공부했다. 1887년 서울로 이주하여 언어학을 공부했고,[1] 1896년에는 서재필이 창간한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에서 일했다.[1]
1896년, 배재학당 내 협성회의 동지들과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여 맞춤법 연구, 국문 전용 권장, 국어사전 편찬, 국어 문법 연구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1] 같은 해, 독립신문사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 협성회 간행물 편집을 맡았다. 1897년 독립협회 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898년 배재학당 졸업 후 독립신문사에서 물러나 국어 문법 연구를 위해 영어 문법을 공부하고자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승만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대한국어문법' 원고본을 집필했다. 1899년에는 제국신문사 기자로 활동했다.
1900년 배재학당 졸업 후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 학원(야학)에 국어문법과를 개설, 한국 최초로 국어 문법을 근대 교육 과목으로 가르쳤다.[1]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06년 '대한 국어 문법'을 출간하고, 창동 학교 '정리사'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배웠다. 1907년 지석영의 국어연구회 회원, 학부 내 국문 연구소 주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08년 '국어 문전 음학'을 출간하고, 1908년부터 1910년까지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했다.[1] 1909년 캐나다 개신교 선교사 J.S.게일 등과 한어연구회를 조직했다.
1911년 국어연구학회는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 1913년 학회 이름은 한글모로, 1914년 조선어강습원은 한글배곧으로 재개칭되었다.
1914년 7월 27일 39세로 별세하였다.[3] 독립 운동 탄압이 강화되자 망명을 계획하던 중이었다.[4]
2. 1. 출생과 가계
1876년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서당 훈장 주학원(周鶴苑)과 연안 이씨 사이의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상주 주씨 시조 주이(周頤)의 17세손이며, 어릴 적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관명(冠名)은 시경(時經)이다. 할아버지 방렬(方烈) 대에 황해도 평산군 차돌개에 와 살다가 아버지 대에 봉산군 무릉골로 옮겼다. 주세붕의 후예이다.[1][3]1887년 12세에 서울 남대문 안 시장에서 해륙물산객주업을 하는 둘째 백부 주학만(周鶴萬)의 양자로 입양되었다.[1]
2. 2. 유년 시절 및 한학 수학
1876년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서당 훈장 주학원(周鶴苑)과 연안 이씨 사이의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상주 주씨 시조 주이(周頤)의 17세손이며, 어린 시절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관명(冠名)은 시경(時經)이다. 할아버지 방렬(方烈) 대에 황해도 평산군 차돌개에 와 살다가 아버지 대에 봉산군 무릉골로 옮겼다. 정승 주세붕(周世鵬)의 후예이다.[1]1887년 12세에 서울 남대문 안 시장에서 해륙물산객주업을 하는 둘째 백부 주학만(周鶴萬)의 양자로 입양되었다.[1] 같은 해 수박다리(水橋)에 사는 진사 이희종의 글방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1]
1892년 진사 이희종에게 시전(詩傳)을 배우던 중 한문을 한국어로 풀이하는 과정에 의문을 품고 한국어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한국어 연구에 뜻을 세웠다.[1]
2. 3. 신학문 수학과 국어 연구
주시경은 1887년 서울로 이주하여 진사 이희종의 글방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1] 1892년 이희종에게 시전(詩傳)을 배우던 중 한문을 한국어로 풀이하는 과정에 의문을 품고 한국어 연구에 뜻을 세웠다. 1893년 배재학당의 강사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 산술과 만국지지(역사, 지리)를 배웠다.[4] 1894년 배재학당 특별과인 만국지지과에 입학했다. 1895년 탁지부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제물포에 있는 이운(利運) 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항해술을 배웠다. 1896년 배재학당에 다시 입학하여 학당 안에 있는 활판소에서 잡역을 하며 공부했고, 독립신문사의 회계 겸 교정원, 또는 총무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다.[1]1896년 배재 학당 내 활판소와 독립신문사 및 협성회의 동지들을 모아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의 목적은 국문 동식법(맞춤법)을 연구하고 국문 전용을 권장하며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국어 문법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1898년 국어 문법 연구에 필요한 추가 공부를 위해 영어 문법을 연구하기로 하고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1900년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 학원(야학)에 국어문법과를 부설하였다. 1900년 2월 15일은 한국에서 최초로 국어 문법이 근대 교육의 한 과목이 된 날이다. 이 당시 교재는 '대한 국어 문법' 원고본이었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1] 1906년 '대한 국어 문법' 목각 인쇄본을 출간했다. 같은 해 창동에 있는 학교 '정리사'에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배웠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다.
2. 4. 독립협회와 언론 활동
주시경은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한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에서 회계, 교정원, 총무 등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1] 같은 해, 배재학당 내 활판소와 독립신문사 및 협성회 동지들을 모아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여 맞춤법 연구, 국문 전용 권장, 국어사전 편찬, 국어 문법 연구 등을 추진했다.[1] 1897년 독립협회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1899년에는 제국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했다.2. 5. 국어 연구 및 교육 활동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문을 공부했다. 1887년 서울로 이주하여 진사 이희종의 글방에서 한학을 배웠고, 1892년 한문을 한국어로 풀이하는 과정에 의문을 품고 한국어 연구에 뜻을 세웠다.[1] 1893년부터 배재학당의 강사 박세양과 정인덕에게 산술과 만국지지를 배웠고, 1894년 배재학당 만국지지과에 입학했다.1896년 배재학당 내 협성회의 동지들과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여 국문 동식법(맞춤법) 연구, 국문 전용 권장, 국어사전 편찬, 국어 문법 연구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1] 같은 해, 독립신문사의 회계 겸 교정원, 총무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 협성회 찬술원 및 사적으로 피선되어 '협성회보'를 편집했다. 1897년 독립협회 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898년 배재학당 만국지지 특별과를 졸업하고 독립신문사 총무직을 사임한 후, 국어 문법 연구를 위해 영어 문법을 공부하고자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승만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황제의 특사령으로 석방되었으며, '대한국어문법' 원고본을 집필했다. 1899년에는 제국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했다.
1900년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 학원(야학)에 국어문법과를 부설, 한국 최초로 국어 문법을 근대 교육 과목으로 가르쳤다.[1]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06년 '대한 국어 문법' 목각 인쇄본을 출간하고, 창동 학교 '정리사'에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배웠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7월 학부 내 국문 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제출·토의했다.
1908년 '국어 문전 음학'을 출간하고,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상동청년학원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유지들을 모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했다.[1] 1909년에는 캐나다 개신교 선교사 J.S.게일 등과 한어연구회를 조직했다.
1911년 국어연구학회는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 1913년 학회 이름은 한글모로, 1914년 조선어강습원은 한글배곧으로 재개칭되었다.
2. 6. 사망
1914년 7월 27일 급병으로 별세하였다. 당시 39세였다.[3] 독립 운동 탄압이 강화되자 망명을 계획하던 중이었다.[4]3. 국어 연구 및 표준화 노력
주시경은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한국의 문자 체계를 '한글'(한글한국어)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는데, 이전에는 15세기부터 '언문'(언문한국어, 속된 글) 등으로 불렸다.[1]
1914년 출판된 '말의 소리'(말의 소리한국어)에서 주시경은 음절 단위가 아닌 문자 단위로 한글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는 현대 한국어 어학에서 채택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제안 중 하나이지만, 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 문자 단위 한글을 사용하는 실험이 있었다.
주시경의 주요 저서로는 「국어문전음학」(1908년), 「국어문법」(1910년), 「말의 소리」(1914년)가 있다. 이 책들은 가로쓰기, 띄어쓰기, 어간과 어미의 분리, 동음이의어, 초성과 받침 설정, 모음 이동, 두음법칙을 설명하고, 직소분석법(IC 분석법)을 창안하여 한글을 설명한다. 또한, 형태소 “늣씨”(어소), 음소 “고나”(음소)를 발견했다.
그는 수학의 항과 연산자 개념으로 어간과 어미를 나누고, 어간의 받침은 복합자음이 되고 어미에는 모음이 추가된다고 보았다. 한국어 문법은 음절이 아닌 자음, 모음 하나하나에 의해 결정되며, 기하학 도형처럼 어간과 어미를 나열하고 X축과 Y축이 교차하듯 어간과 어미가 교차한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명사, 동사 등 품사론, 문법론에 의존하지 않고,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글과 한국어를 연구했다. 문법 이외의 철자법 등은 당시에 인정받아 사용되었으나, 독창적이라고 평가받는 문법 이론은 1970년대까지 계승되지 않았다. 이후 외래 문법 이론으로 발전한 한글, 한국어 문법이 이론과 현실이 맞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의 이론이 재도입되었다. 현재 한국어 문법은 1985년 성균관대학교에서 주시경의 「통사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3. 1. 국문동식회와 국어 연구 활동
주시경은 표준화된 한국어 알파벳의 필요성을 깨닫고[1] 1886년 동료들과 함께 조선문동식회(조선문동식회|朝鮮文同式會|한국어)를 설립했다.[1] 또한 상동청년학원국어강습소(상동청년학원국어강습소|尚洞青年學院國語講習所|한국어)에서 여러 세미나를 개최했다.주시경은 한국어의 품사를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관형사(관형사|冠形詞|한국어), 조사(조사|助詞|한국어), 접속사, 감탄사, 종결어미(종지사|終止詞|한국어)로 제안했다.
3. 2. 품사 체계 정립
주시경은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관형사, 조사, 접속사, 감탄사, 종결어미 등 한국어의 품사 체계를 제안했다.[1] 그는 언어학뿐만 아니라 기하학도 전공하여,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글과 한국어를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이어져 온 명사, 동사 등의 품사론, 문법론에 의존하지 않고, 어간과 어미를 수학의 항(=TERM)과 연산자(=OPERATOR)와 유사한 개념으로 나누는 등 수리적인 학문 체계를 구성했다.3. 3. '한글' 명칭 제정
주시경은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한국의 문자 체계를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는데, 이전에는 15세기부터 '언문'(언문|속된 글한국어)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1]3. 4. 음소, 음절, 형태소 개념 도입
주시경은 한국어의 품사를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관형사(관형사|冠形詞한국어), 조사(조사|助詞한국어), 접속사, 감탄사, 종결어미(종지사|終止詞한국어)로 제안했다.[1]1914년 출판된 '말의 소리'(말의 소리한국어)에서 주시경은 음절 단위가 아닌 문자 단위로 한글을 쓰는 것을 주장했다.
주시경은 한글을 설명하기 위해 형태의 기본 단위인 “늣씨”(어소, morpheme), 발음의 기본 단위인 “고나”(음소, phoneme)를 만들었다.
3. 5. 국문연구소 활동과 맞춤법 통일
주시경은 표준화된 한글의 필요성을 깨닫고 1886년 동료들과 함께 조선문동식회를 설립했다.[1] 주시경은 상동청년학원 국어강습소에서 여러 세미나를 개최했다.주시경은 한국어의 품사를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관형사, 조사, 접속사, 감탄사, 종결어미로 제안했다.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한국의 문자 체계를 지칭하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는데, 이전에는 15세기부터 '언문'(속된 글)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1914년 출판물인 '말의 소리'에서 그는 음절 단위가 아닌, 문자 단위로 한글을 쓰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현대 한국어 어학에서 채택되지 않은 그의 몇 안 되는 제안 중 하나이지만, 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 문자 단위 한글을 사용하는 실험이 있었다.
4. 강의 활동
주시경은 이화학당, 흥화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배재학당 등에서 강의하였다. 상동감리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국어 강의를 전개하였다.[1]
1907년 여름 상동청년학원의 국어강습소, 같은 해 11월 국어야학과에서 강의하였다.[1] 1908~09년 국어강습소, 1910년 재령 나무리강습소에서 강의하였다.[1]
강의 과목은 음학(音學), 자분학(字分學), 격분학(格分學), 도해학(圖解學), 변체학(變體學), 실용연습 등이었다.[1]
5. 제자
주시경의 제자로는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김윤경,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이필수, 김원우, 정열모, 이윤재, 이병기, 김두종, 백남규 등이 있다. 이들은 주시경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 중 이윤재와 최현배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활동한 한글학자들이다.[3]
1912년부터 1930년까지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언문철자법」 등이 제정될 때, 제작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주시경의 제자로 여겨진다.[8] 특히 고바야시 토오루(高橋亨)는 캐나다인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 한국명: 기일)과 함께 1909년부터 주시경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주시경이 주관한 조선어강습원 고등과 1기 수석 졸업생(1914년 3월)인 최현배와 그의 수제자인 김두봉은 각각 한국과 북한의 한글 관련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그의 제자들은 조선어학회(1921년)를 조직하여 1933년에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을 완성했고, 이는 1988년까지 사용되었다.
6. 저서
제목 |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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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망국사 | 1907 |
국어문전음학 | 1908 |
한문초습 | 1909 |
국문초학 | 1910 |
국문문법 | 1910 |
말의 소리 | 1914 |
소리갈 |
주요 저서로는 「말의소리」(1914년), 「국어문전음학」(1908년), 「국어문법」(1910년) 등이 있다.
7. 가족 관계
자녀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