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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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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 25년) 12월에 창제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한국의 고유 문자이다. 세종은 한자와 다른 한국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했다. 훈민정음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창제목적, 원리, 사용법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한글 사용에 대한 반대와 탄압도 있었지만, 갑오개혁 이후 국문으로 공식 인정받고 널리 보급되었다.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의 제자 원리에 따라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로 평가받으며, 중세 한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훈민정음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글자도 존재하며, 훈민정음 해례본의 번역 오류에 대한 논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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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훈민정음 정보
훈민정음 서문 첫 페이지
기본 정보
명칭훈민정음
원문 표기훈〮민져ᇰ〮ᅙᅳᆷ
한자 표기訓民正音
로마자 표기Hunminjeongeum
옛 로마자 표기Hunminjŏngŭm
의미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발간일1446년 10월 9일 (조선 시대)
소장처간송미술관, 서울특별시
언어한문
제작 장소조선 서울
저자세종대왕
집현전
내용한글 창제 및 소개
다른 이름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필사자집현전
국보 지정 번호70
국보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소재지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성북동)
시대조선시대
참고옛 한글 도움말 참고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구글 지도

2. 역사

1443년(세종 25년) 세종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집현전 학자들에게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발간과 <동국정운> 편찬을 명하고, 최항과 박팽년에게는 『고금운회거요』 번역을 명했다.[36] 1445년(세종 27년)에는 훈민정음을 사용한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였다.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고,[38][39]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 함께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훈민정음 창제 목적과 원리, 사용법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한자를 배우기 어려워 문맹률이 높았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익혀 사용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러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37]

2. 1. 창제 배경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은 그 때까지 사용되어 온 한자한국어와는 구조가 다른 중국어 표기를 위한 문자 체계이기 때문에 백성이 배우고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1443년(세종 25년)[17]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어 훈민정음이라 불렀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 한국인들은 한자를 사용하여 단어를 기록했다.[3] 그러나 한자와 한국어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자를 빌려 쓰는 것은 구어를 반영하는 데 비효율적이었다.[3]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시기는 명나라중국에서 새롭게 권력을 잡은 시기였는데, 이로 인해 한자의 발음이 변하여 한국인들이 새로운 표준 발음을 익혀 단어를 기록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4] 또한 일반 백성들은 한자를 읽고 쓰는 것을 배울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맹률도 높았다.[3][5] 지배 계급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한자 학습을 권력과 특권의 상징으로 만들었다.[3] 세종대왕은 일반 백성이 문자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배 계급의 반발을 우려하여 훈민정음 창제를 비밀리에 진행했다.[3]

1444년 2월 최만리,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6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던 부제학 최만리는 한글 반포에 크게 반대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고 투옥되었다.[37] 그는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37]

2. 2. 창제 및 반포

1443년(세종 25년) 12월에 훈민정음 28자가 창제되었다. 세종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발간과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했으며, 최항과 박팽년에게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을 명했다.[36] 1445년(세종 27년) 4월에는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 편찬을 진행하였다.

1444년 2월 최만리,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송처검, 조근 등 집현전 내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6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던 부제학 최만리가 한글 반포에 크게 반대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고 투옥되었다.[37] 그는 다음 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37]

1446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고,[38][39]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 함께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원리, 사용법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세종은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도록 하였고,[40][41]삼강행실’와 같은 국가 윤리를 훈민정음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42]

세종은 사서(四書)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했고,[43]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도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44] 이후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사용했다. 이러한 훈민정음 보급 정책에 따라 훈민정음은 점차 퍼져 나갔다.[45]

2. 3. 조선 시대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하급 관리 채용 시험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고,[40][41]삼강행실도’와 같은 국가 윤리를 훈민정음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다.[42] 또한, 사서(四書)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했고,[43]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도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44]

한자는 주로 지배 계급이 공문서에 사용했고, 일반 백성들은 한자를 읽고 쓰는 것을 배울 기회가 제한되어 문맹률이 높았다.[3][5] 지배 계급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한자 학습을 권력과 특권의 상징으로 만들었다.[3] 훈민정음 반포 이후, 일반 백성, 특히 여성들은 훈민정음을 통해 의사소통하고 정보를 얻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양반 계층은 여전히 한자를 중시하고 훈민정음을 언문이라 폄하하며, 훈민정음 사용을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444년 2월 최만리,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집현전 내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6가지 이유를 들며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던 부제학 최만리가 한글반포에 대해 크게 반대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고 투옥 되었다.[37] 그는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37] 연산군 시대에는 한글 사용자에 대한 탄압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 사상의 영향과 상업 발달로 훈민정음 사용이 점차 확대되었다. 조선은 의 속국이었고, 한자가 중시되는 한편, 한글은 서간이나 시가에서의 사용에 한정되었고, 공문서에 채택되는 일은 없었다. 조선 말기 1886년개화파와 井上角五郎(이노우에 각고로)의 협력으로 조선 최초의 한글 사용 신문·공문서(관보)인 한성주보가 발행되었다.[19]

2. 4. 근대

1886년 개화파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의 협력으로 조선 최초의 한글 사용 신문·공문서(관보)인 한성주보가 발행되었다.[19]

2. 5. 일제강점기

1911년 조선총독부는 초등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하고 한글을 가르치게 했으나,[23] 조선어 시간을 제외한 교수 언어는 일본어였다. 1912년 총독부는 근대 최초로 만들어진 조선어 표기법인 보통학교용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고, 1930년에는 아동의 학습 효율 향상과 조선어 표기법의 정리·통일을 위해 새로운 표기법인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2. 6. 현대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한글을 국어로 정하고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글은 교육, 언론, 출판 등 사회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며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3. 책의 구성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서문과 본문인 "예의"편, 집현전 학자들이 지은 해설 부분인 "해례"편, 정인지 서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훈민정음》에는 크게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 훈민정음 예의: 한자로 작성되었으며, 머리말, 자모, 각각의 음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담고 있다.[12] 세종실록에 실린 훈민정음 예의도 여기에 포함된다.[11]
  • 훈민정음 해례: 훈민정음의 해설서로, 훈민정음 예의와 해설(해례)을 포함한다.[12]
  • 훈민정음 언해: 훈민정음 예의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13]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동기를 보여주는 첫 번째 단락은 다음과 같다.

고전 중국어/한자[14]國之語音|국지어음lzh 異乎中國|이호중국lzh 與文字不相流通|여문자불상유통lzh 故愚民 有所欲言|고우민 유소욕언lzh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lzh 予爲此憫然|여위차민연lzh 新制二十八字|신제이십팔자lzh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矣|욕사인인이습편어일용의lzh
번역이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뭇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배우고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이 단락은 월인석보라는 불교 경전에 주석이 달린 형태로 중세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를 훈민정음 언해라고 부른다.[15]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 언해


훈민정음 머리말

3. 1. 판본

훈민정음에는 한문으로 쓰인 예의본, 해례본과 한글로 쓰여진 언해본(諺解本)이 있다. 세종실록에 실린 것은 실록본(實錄本)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예의본(例義本)에 속한다. 이 중 단행본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해례본(解例本)뿐이며, 보통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박승빈이 소장했던 언해본은 단행본으로 알려졌으나, 정밀 조사 결과 『월인석보』 책머리 부분을 따로 제책한 것으로 밝혀졌다.[46] 《훈민정음 해례본》은 약 500부 정도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20세기 초반까지 단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다. 1940년에 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고,[47] 2008년에 상주에서 한 부가 더 발견되어 현재 두 부가 존재한다.

《훈민정음 원본》 또는《오성제자고》(五聲製字考)라고도 불리는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기존에 알려졌던 예의(例義)편에 해례(解例)편이 추가된 것이다.[48] 예의(例義)편은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에 실려 널리 알려졌으나, 해례(解例)편은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49]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53][50] 해례본은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가로 20㎝, 세로 32.3㎝이다. 해례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예의(例義), 해례(解例), 정인지 서문(序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이 직접 쓴 예의 부분은[51]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 집현전 학사들이 쓴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 정인지가 쓴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구성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예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의편(例義)은 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힌 어제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한 예의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解例)부분에는 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대해 설명한 제자해(制字解), 초성에 대해 설명한 초성해(初聲解), 중성에 대한 설명과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한 중성해(中聲解), 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한 종성해(終聲解), 초성·중성·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해 설명한 합자해(合字解), 단어의 표기례를 제시한 용자례(用字解)로 구성되어 있다. 정인지 서문부분에는 한글의 창제이유, 창제자, 한글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그리고 끝에는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52]

해례(解例)와 예의(例義)가 모두 포함된 해례본과 달리 예의 부분만 들어 있는 것을 예의본이라 부른다. 예의본은 단행본이 아니라,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린 한글번역본인 언해본이 있다. 《예의본》은 1940년에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

옛 한글


훈민정음 언해본은 한문으로 쓰여진 '훈민정음 예의본'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69]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 1권의 첫머리에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이라는 제목하에 훈민정음의 어제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 실려있다.[70] 예의본의 한 종류이지만, 편의상 언해본으로 부른다. 이는 한문으로 적힌 예의본을 한글로 번역했기 때문인데, 언해(諺解)란 말이 한문을 한글로 번역했다는[71] 의미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언해는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의 본문을 먼저 쓰고, 그 아래 한글로 협주(夾註)를 단 뒤 한글로 새로이 한문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훈민정음에 쓰인 한문을 읽은 뒤 그 한문의 각 글자 풀이를 읽고, 한글로 번역된 부분을 읽게 된다. 한문을 모르더라도 훈민정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중세 한국어현대 한국어



훈민정음에는 세 가지 판본이 있다.


  • 훈민정음 예의: 한자본 (세종실록(세종 실록)은 훈민정음 예의로 분류된다.[11])
  • 훈민정음 해례: 훈민정음의 해설서 (훈민정음 예의 + 해설: 해례)[12]
  • 훈민정음 언해: 훈민정음 예의의 한글본[13]


훈민정음 예의는 고전 중국어/한자로 작성되었으며, 머리말, 자모, 각각의 음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담고 있다.[12]

문서의 첫 번째 단락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동기를 보여준다.

고전 중국어/한자[14]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矣lzh
음역Kwúyk ci ngě qum / Í hhwo tyung kwúyk / Yě mwun ccó pwúlq syang lyuw thwong / Kwó ngwu min wǔw swǒ ywók ngen / Zi cyung pwúlq túk sin kkuy ccyeng cyǎ ta ngǔy / Ye wúy chǒ mǐn zyen / Sin cyéy zí ssíp pálq ccó / Ywók sǒ zin zin í ssíp ppyen qe zílq ywóng zǐ.



훈민정음의 고전 중국어(한자)는 부분적으로 중세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본은 월인석보라는 주석이 달린 불교 경전과 함께 발견되며, 훈민정음 언해라고 불린다.[15]

한자 + 한글[16]
음역Kwúyk ci ngě qum í / Í hhwo tyung kwúyk hó yá / Yě mwun ccó lwó pwúlq syang lyuw thwong hol ssóy / Kwó lwó ngwu min í wǔw swǒ ywók ngen hó ya dwó / Zi cyung pwúlq túk sin kkuy ccyeng cyǎ y ta ngǔy lá / Ye y wúy chǒ mǐn zyen hó yá / Sin cyéy zí ssíp pálq ccó hó nwo ní / Ywók sǒ zin zin ó lwó í ssíp hó yá ppyen qe zílq ywóng zǐ ni lá.
중세 한국어[16]
음역Na lás mǎl sso mí / Tyung kwúyk éy tal á / Mwun ccó wá lwó se lu so mos tí a ní hol ssóy / Í len cyen chó lwó e lín póyk syéng í ni lu kwó cyé hwólq páy i syé twó / Mo chóm nǎy cey ptú túl si lé phye tí mwǒt holq nwó mí ha ní lá / Náy í lól wúy hó yá ě yes pí ne kyé / Sáy lwó sú múl ye túlp ccó lól moyng kó nwo ní / Sǎ lom mǎ tá hǒi GGyé swǔ Wí ni kyé nál lwó pswú méy ppyen qan khúy ho kwó cyé holq sto lo mí ni lá.
번역


3. 2.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문으로 쓰여진 훈민정음의 판본으로, 예의본에 해례가 추가되어 '해례본'이라고 불린다. 1940년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2008년상주에서 또 한 부가 발견되어 현재까지 두 부가 전해진다.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해례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며, 세종이 직접 쓴 예의(例義), 집현전 학자들이 쓴 해례(解例), 정인지 서문(序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 예의(例義): 훈민정음 창제 목적을 밝힌 어제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한다.
  • 해례(解例): 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대해 설명한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용자례(用字解)로 구성되어 있다.
  • 정인지 서문: 한글 창제 이유, 창제자, 한글의 우수성, 책의 편찬자와 반포일(1446년 9월 상한)을 기록하고 있다.


해례본은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간송본(안동본)과 2008년에 발견된 상주본으로 나뉜다.

3. 2. 1. 간송본(안동본)

1940년 무렵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 정벌 시 공을 세운 후 세종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53]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32.3cm (광곽(匡郭)은 가로 16.8cm, 세로 23.3cm)[54]이며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견 당시 표지와 첫 두 엽은 떨어져 나가 없었는데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53]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53][55][56] 훗날 간송 전형필김태준을 통하여 이 안동본을 입수하여 보관하였다. 광복이 되자 전형필은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학계에 알렸고 영인본을 제작 배포하여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다.[57] 전형필은 한국 전쟁 때 이 한 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개 삼아 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53] 현재에는 간송미술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53] 간송미술문화재단 측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의하면, 간송 전형필은 당시 큰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10000KRW을 지불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하였다고 한다.[58]

3. 2. 2. 상주본

2008년 8월 배익기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공개하였다.[59] 그러나 골동품상을 하는 조용훈이 도난당한 것이라며 주장하여 소송이 오갔다.[60] 대법원은 민사 소송에서 조용훈의 소유권을 인정하였으며[61], 2012년 5월에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서류상으로 기증하였다.[62] 이때 이것이 안동 광흥사의 복장유물이 도난된 것이라는 논란이 제기되면서[63], 광흥사가 소속된 조계종이 반발하였다.[64] 한편 민사 소송에서 패소한 배익기는 절도 혐의에 대한 형사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65], 상주본을 기증하는 대가로 1천억 원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66] 상주본은 조선의 음운학자가 남긴 주석이 있으나, 66쪽 중 18쪽이 멸실되고 불에 타는 등 보존 상태는 나쁜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3. 3. 훈민정음 예의본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한문으로 쓰여진 예의본, 해례본, 한글로 쓰여진 언해본(諺解本)이 있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것을 실록본(實錄本)이라고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예의본(例義本)에 속한다.[46] 예의본은 단행본이 아니며,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려 있다. 《예의본》은 1940년에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

훈민정음 예의는 고전 중국어/한자로 작성되었으며, 머리말, 자모, 각각의 음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담고 있다.[12]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동기를 보여주는 첫 번째 단락은 다음과 같다.

고전 중국어/한자[14]國之語音|국지어음lzh 異乎中國|이호중국lzh 與文字不相流通|여문자불상유통lzh 故愚民 有所欲言|고우민 유소욕언lzh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lzh 予爲此憫然|여위차민연lzh 新制二十八字|신제이십팔자lzh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矣|욕사인인이습편어일용의lzh
번역이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뭇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배우고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예의의 내용은 한글을 제작한 목적을 밝힌 서문, 28자의 음가를 오음과 한자 예를 들어 초성 17자, 중성 11자 순서로 설명한 부분, 연서, 병서, 부서(복합 자모의 합성법) 및 성음(자모를 합쳐 하나의 음절을 나타내는 것), 가점(성조 부호를 붙이는 것) 등의 운용법에 관한 부분으로 나뉜다. 속언해본에는 여기에 한국어에는 없는 중국어치음순치음을 표기하기 위한 자를 더한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아래에는 서문(세종서라고도 불린다)만을 제시한다.

3. 4. 훈민정음 언해본



훈민정음 언해본은 한문으로 쓰여진 '훈민정음 예의본'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69]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 1권의 첫머리에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이라는 제목으로 훈민정음의 어제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 실려있다.[70] 예의본의 한 종류이지만 편의상 언해본으로 부른다. 이는 한문으로 적혀있는 예의본을 한글로 번역하였기에 이를 구분짓기 위함인데, 언해(諺解)란 말이 한문을 한글로 번역했다는[71] 의미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언해는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의 본문을 먼저 쓰고, 그 아래 한글로 협주(夾註)를 단 뒤 한글로 새로이 한문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훈민정음에 쓰인 한문을 읽은 뒤 그 한문의 각 글자 풀이를 읽고, 한글로 번역된 부분을 읽게 된다. 한문을 모르더라도 훈민정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중세 한국어현대 한국어
|


4. 제자 원리

《훈민정음 해례본》의 해례(解例) 부분에는 제자 원리, 제자 기준, 자음 체계, 모음 체계, 음상 등에 대한 설명이 담겨있는 제자해(制字解)가 있다. 여기서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대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52]

훈민정음의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은 천(ㆍ), 지(ㅡ), 인(ㅣ) 삼재(三才)를 본떠 만들었다.

4. 1. 초성

초성은 17개의 기본 자모로 구성되며, 오음(五音) 체계를 따른다. 오음은 아음(ㄱ, ㅋ, ㆁ), 설음(ㄴ, ㄷ, ㅌ, ㄹ), 순음(ㅁ, ㅂ, ㅍ), 치음(ㅅ, ㅈ, ㅊ, ㅿ), 후음(ㅇ, ㆆ, ㅎ)으로 나뉜다.

오음상형기본 자덧붙인 자이체자
아음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한국어한국어한국어
설음혀가 윗니에 닿는 모양한국어한국어한국어한국어 (반설)
순음입술 모양한국어한국어한국어 
치음이빨 모양한국어한국어한국어한국어 (반치)
후음목구멍 모양한국어한국어한국어 


  • 병서: 초성 자모를 조합하여 복합 자모를 만든다.
  • 각자병서: 같은 초성 자모를 겹쳐서 나열한다. ㄲ한국어, ㄸ한국어, ㅃ한국어, ㅉ한국어, ㅆ한국어, ㆅ한국어 등이 있으며, 실제 한국어 표기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 합용병서: 서로 다른 초성 자모를 2개나 3개 나열한다. 당시 문헌에 나타나는 합용병서는 다음과 같다.
  • 한국어 계열 - ㅺ, ㅼ, ㅽ, (ㅻ)한국어
  • 한국어 계열 - ㅲ, ㅄ, ㅳ, ㅶ, ㅷ한국어
  • 한국어 계열 - ㅴ, ㅵ한국어
  • 연서: 순음(ㅁ, ㅂ, ㅍ)자 아래에 후음자 ㅇ한국어을 잇는 것. 입술이 가볍게만 닿아 발음되는 소리를 나타낸다. ㅸ한국어만이 실제 한국어 음 표기에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한자음 표기에만 사용되었다.
  • 순경음자 - ㅸ, ㆄ, ㅹ, ㅱ한국어

4. 2. 중성

중성은 11개의 기본 자모로 구성되며, 하늘(ㆍ), 땅(ㅡ), 사람(ㅣ)을 기본으로 하여 양성 모음(ㅗ, ㅏ, ㅛ, ㅑ)과 음성 모음(ㅜ, ㅓ, ㅠ, ㅕ)을 만들었다.

음양상형기본 자초출 자재출 자
양성ㆍ|아한국어ㅗ|오한국어, ㅏ|아한국어ㅛ|요한국어, ㅑ|야한국어
음성ㅡ|으한국어ㅜ|우한국어, ㅓ|어한국어ㅠ|유한국어, ㅕ|여한국어
중성ㅣ|이한국어


  • 이음절 합용자 - ㅘ|와한국어, ㅝ|워한국어, ㆇ, ㆊ
  • ㅣ|이한국어 결합 자
  • * 한글자 - ㆎ|애한국어, ㅢ|의한국어, ㅚ|외한국어, ㅐ|애한국어, ㅟ|위한국어, ㅔ|에한국어, ㆉ, ㅒ|얘한국어, ㆌ, ㅖ|예한국어
  • * 두 글자 - ㅙ|왜한국어, ㅞ|웨한국어, ㆈ, ㆋ
  • (ㆍ|아한국어ㅡ|으한국어 기준 ㅣ|이한국어 소리 - ᆝ, ᆜ)


이 중 ㆇ, ㆊ, ㆈ, ㆋ 네 글자는 『동국정운』의 한자음 표기에만 사용되었고, 한국어 음 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합자 해석에 ᆝ /jʌ/, ᆜ /jɯ/가 제시되어 있지만, 표준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방언이나 어린이의 말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4. 3. 종성

종성을 위해 별도의 자모를 만들지 않고, 초성 자모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종성에 자모를 적용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반되는 원칙이 있다.

  • 종성부용초성: 《훈민정음》 예의편에 기록되어 있다. 제자(製字) 상으로는 초성 자모를 그대로 사용하고 별도의 자모를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이며, 운용 상으로는 모든 초성 자모를 종성에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현행 한글 맞춤법은 이를 따른다.
  • 8종성가족용: 《훈민정음》 해례편의 종성 해에 기록되어 있다. 종성에 사용하는 자모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여덟 개로 충분하다는 운용상의 원칙이다. 종성의 음가에 대해 표음주의적인 표기법이며, 조선어철자법통일안(1933년) 이전에는 이쪽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참고로 합용병서에는 ㄳ, ㅧ, ㄺ, ㄻ, ㄼ, ㅭ이 당시 문헌에 나타나 있다.

5. 운용법

훈민정음, 곧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운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 초성, 중성, 종성의 결합: 훈민정음은 자음을 나타내는 초성, 모음을 나타내는 중성, 그리고 받침을 나타내는 종성을 결합하여 하나의 글자를 만든다. 예를 들어, 'ㄱ' + 'ㅏ' + 'ㅇ' = '강'과 같이 조합된다.

  • 모아쓰기: 초성, 중성, 종성을 한 글자로 모아쓰는 방식은 한글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는 음절 단위로 글자를 인식하게 하여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세로쓰기가 일반적이었으나, 현대에는 가로쓰기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훈민정음은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모두에 적합한 문자 체계이다.

  • 띄어쓰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띄어쓰기 개념이 없었으나, 현대 한글 맞춤법에서는 띄어쓰기를 규정하고 있다. 띄어쓰기는 문장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방점 (사성점): 중세 국어에서는 소리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방점을 글자 왼쪽에 찍어 표기했다. 현대 국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독창적인 문자 체계와 효율적인 운용법을 통해 한국어 표기에 최적화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6. 평가 및 의의

훈민정음은 한글 창제의 취지와 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중세 한국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특히 《해례본》에 포함된 예의(例義)는 창제 당시의 글자체를 그대로 보여주어 가장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해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글자의 기원 등 여러 의문점을 밝혀 주었다.[72]

이 책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 창제에 대해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 창살 모양 기원설까지 다양한 학설들이 난무하며 독창성이 부정당했다. 그러나 이 책의 출현으로 이러한 학설들은 모두 사라지고, 발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명확히 밝혀졌다.[72] 이는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알리는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한편, 훈민정음 서문에서는 한글 창제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有天地自然之聲,則必有天地自然之文。所以古人因聲制字,以通萬物之情,以載三才之道,而後世不能易也。然四方風𡈽區別,聲氣亦隨而異焉。蓋外國之語,有其聲而無其字。假中國文字以通其用,是猶枘鑿之鉏鋙也,豈能達而無礙乎。要皆各隨所處而安,不可强之使同也。|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 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風土)가 구별되며 성기(聲氣)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日用)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기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중국어[73]

위의 내용은 세상의 다양하고 동등한 환경을 깊이 이해하고, 한국어 발음의 고유성을 밝히며, 이에 적합한 문자의 필요성에 따라 과학적인 원리를 사용하는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7. 현재 사용하지 않는 글자


  • '''ㆆ(여린히읗, 된이응):''' 의 중간 소리로, ㅎ으로 간소화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 '''ㆁ(옛이응, 꼭지이응):''' '앙' 소리를 낼 때 받침으로 쓰이는 유성음 이응이 옛이응이다. 과 혼동하기 쉬워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예시로 '솅종(세종)'에서 '솅(세)'의 ㅇ은 소리가 없는 '이'이고, '종'의 ㅇ은 ㆁ(옛이응)이다.
  • '''ㅿ(반치음):''' [z]로 추정되는 중세 국어 음소를 표기하는 글자였으나, 근대 한국어에서 ㅇ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 '''(아래아):''' 평순 후설모음으로 추정되는 중세 국어 음소를 나타내는 글자로, 주로 첫 음절에서는 ㅏ, 받침이 없는 마지막 음절에서는 ㅜ, 나머지 음절에서는 ㅡ로 변화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8. 훈민정음 해례본의 오역 논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훈민정음이 공식적으로 영어로 번역되었으나, 거기에 오역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해례본의 "全淸之聲凝則爲全濁也" 등에서 '凝'(엉길 응) 자는 종래 평음이 "응고하여 진해진다"고 해석되었기에 영어로도 그렇게 번역되었다. 또한 해례본에는 '厲'(갈 려/엄할 려) 자가 여러 곳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종래 "격렬하다"고 해석되었기에 strong으로 번역되었다. 각각의 형용하는 소리를 농음, 격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凝'과 '厲'자를 이렇게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참고로 해례본은 전탁음을 "最不厲"라고도 형용하고 있으므로 이 부분은 weakest sound로 번역되었다.

이것들이 오역이라는 주장에서는, '厲'는 "빠르다"는 의미이고, 반대로 '凝'은 "느리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농음, 격음이라는 명칭도 부적절하며, 훈민정음 전체를 오독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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