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화
1. 개요
이능화는 충청북도 괴산 출신으로, 한국의 종교, 여성사, 민속 등을 연구한 인물이다. 정종의 후손으로, 한성외국어학교 교관 및 교장을 역임하며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영·불·중·일어에 능통했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의 종교와 문화를 연구하여 《조선여속고》, 《조선해어화사》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그는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청구학회 평의원을 지냈으며, 친일 단체 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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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편수회 -
아리요시 주이치
아리요시 주이치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의 일본 고위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여러 현의 현지사와 조선총독부 총무국장, 정무총감을 지내며 현대화 사업과 도시 재건에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 관여한 점은 비판적으로 평가되며 귀족원 의원과 요코하마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
조선사 편수회 -
이병도
이병도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학자로,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 고대사 연구 기반 마련과 실증사학 발전에 기여하며 근대사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
정인보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시기에 활동한 사학자, 시조 작가, 교육자로, 민족주의 역사관과 ‘얼’ 사상을 형성하고, 연세대학교 강사, 동아일보 논설위원, 국학대학교 학장,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사 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1943년 사망 -
현진건
현진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대표작으로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을 받기도 했다. -
1943년 사망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능화는 조선의 종교, 민족문화, 사회 사정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14년 불교진흥회 간사와 기관지 『불교진흥회월보』의 편집 겸 발행인을 거쳐 1917년 이사가 되었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조선사편찬위원회(후에 조선사 편수회로 변경) 위원으로 15년간 《조선사》 편찬에 참여했고, 수집된 자료로 한국의 종교와 민속을 연구하였다. 1930년 일본 학자들이 주도하는 청구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1931년 계명구락부를 설립하여 민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재의 동국대학교) 강사로 있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충청북도 괴산 출신이다. 본관은 전주로 정종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의 후손이며, 홍문관 교리와 이조참의, 군국기무처 회의원을 지낸 이원긍의 아들이다.
어려서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고향에서 그의 별명은 이탈망이었는데, 평소 망건을 쓰지 않고 다녔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21세 되던 1889년에 상경, 정동 영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 동안 배웠으며, 1894년에는 한성한어(중국어)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듬해인 1895년에 관립 법어(프랑스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전인 1897년에는 한성외국어학교의 교관과 학감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1911),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 일어야학사를 졸업하는 등 한성외국어학교의 교관으로 재직하는 와중에도 외국어를 익혀 영·불·중·일어에 능통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한성법어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의정부의 특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관청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1907년 7월에는 국문 연구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2.2. 교육 활동과 외국어 능력
어려서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고향에서 그의 별명은 이탈망(李脫網)이었는데, 평소 망건을 쓰지 않고 다녔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21세 되던 1889년에 상경, 정동 영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 동안 배웠다. 1894년에는 한성한어(중국어)학교를 졸업하였고, 1895년에 관립 법어(프랑스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97년에는 한성외국어학교의 교관과 학감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 일어야학사(日語夜學舍)를 졸업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면서도 외국어를 익혀 영·불·중·일어에 능통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한성법어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의정부의 특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관청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1907년 7월에는 국문 연구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12년에는 사립 능인보통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있었다.
2.3. 민족문화 연구와 친일 행적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능화는 조선의 종교, 민족문화, 사회 사정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12년 사립 능인보통학교를 세워 교장을 지냈고, 1914년 불교진흥회 간사와 기관지 『불교진흥회월보』의 편집 겸 발행인을 거쳐 1917년 이사가 되었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조선사편찬위원회(후에 조선사 편수회로 변경) 위원으로 15년간 《조선사》 편찬에 참여했고, 수집된 자료로 한국의 종교와 민속을 연구하였다. 1930년 일본 학자들이 주도하는 청구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1931년 계명구락부를 설립하여 민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재의 동국대학교) 강사로 있었다.
이능화는 한국 종교와 한국 여성사라는 독특한 주제를 본격적인 학문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에 신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라는 다섯 가지 종교 전통이 있다고 보았다. 개항기 이후 종교 상황 변화에 맞춰 '종교'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며, 당대 종교 상황을 '종교들의 공존'과 '종교 영역과 사회(정치) 영역의 분리 현상'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이능화는 종교에 대한 1) 비교종교학적 관점과 2) 한국종교(사회)사학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였다. 유교적 남존여비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국 여성사 전반을 정리한 《조선여속고》와 기생의 역사를 다룬 《조선해어화사》를 남긴 것도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능화의 저술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고, 관련 사료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정리한 부분이 많아 '연구'라기보다는 '자료모음집' 성격이 강하다. 또한, 이능화의 조선 민속과 역사 연구는 일본 식민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한 일제 총독부의 조선 탐구 및 분석 사업의 일환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능화는 조선사 편수회 위원으로서 조선사 편찬에 관여했고, 일본 학자들이 주도한 식민사학의 청구학회 평의원을 지냈으며, 1940년 친일 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맡은 행적이 확인되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도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학문적 업적과 평가
이능화는 한국의 종교와 여성사라는 독특한 주제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선구자였다. 그는 조선에 신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라는 다섯 가지 종교 전통이 있다고 보았으며, 개항기 이후 종교 상황 변화에 맞춰 새로운 관점을 모색했다. 비교종교학적 관점과 한국종교(사회)사학적 관점을 제시하고, 조선여속고, 조선해어화사 등을 저술하여 여성사 연구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고 자료 모음집 성격이 강하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그의 연구가 일제 식민 통치를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조선사 편수회, 청구학회 등 친일 단체 활동으로 인해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인명사전 등에 포함되었다.
3.1. 종교, 여성사 연구의 선구자
이능화는 한국의 종교, 또는 한국의 여성사라는 독특한 주제를 본격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에 신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라는 다섯 가지의 종교전통이 있다고 보았다. 개항기 이후에 발생한 종교적 상황의 변화에 상응해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면서,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종교들의 공존'과 '종교영역과 사회(정치)영역의 분리현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여 이능화는 종교에 대한 1) 비교종교학적 관점과 2) 한국종교(사회)사학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유교적 남존여비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던 여성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국여성사 전반을 정리한 조선여속고와 기생의 역사를 집중 거론한 조선해어화사를 남긴 것도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능화의 저술은 대부분 국문이 아닌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관련 사료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정리한 부분이 많아 '연구'라기보다는 '자료모음집'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 민속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일본 식민통치를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한 일제 총독부의 조선 탐구와 분석의 일환으로서 행해진 사업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능화 자신은 조선사 편수회의 일원으로서 조선사의 편찬에도 관여하였으며, 일본 학자들이 주도한 식민사학의 청구학회 평의원을 지내고 1940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부 문화위원을 맡은 행적이 확인되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도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2. 한계와 비판
이능화의 저술은 대부분 국문이 아닌 한문으로 되어 있고, 관련 사료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정리한 부분이 많아 '연구'라기보다는 '자료모음집' 성격이 강하다. 이능화의 조선 민속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일본 식민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제 총독부의 조선 탐구 및 분석의 일환으로 행해졌다는 지적이 있다. 이능화는 조선사 편수회의 일원으로서 조선사 편찬에 관여했으며, 일본 학자들이 주도한 식민사학의 청구학회 평의원을 지냈다. 1940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부 문화위원을 맡은 행적이 확인되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의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저서
| 제목 | 출판/발행 년도 | 기타 |
|---|---|---|
| 《백교회통》 | 1912년 | 한국의 여러 종교를 비교하였다. |
| 《조선불교통사》 | 1918년 | |
| 《조선해어화사》 | 1926년 | |
| 《조선여속고》 | 1927년 | 총 26장의 한문체로, 한국 여성 문화의 단편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
| 《조선기독교급외교사》 | 1928년 | |
| 《조선무속고》 | 1929년 | |
| 《조선신사지(朝鮮神事志)》 | 1929년 | |
| 《춘몽록》 | 1929년 | |
| 《조선도교사》 | 1959년 | 사후 출간. 순한문으로 100여 종의 문헌을 인용하였다. 도교에 관한 자료를 모아 놓았다. |
| 《질병사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