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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일 (응용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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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동일은 1908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응용화학자이다.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키유리, 가네보, 경성방직 등에서 근무하며 안전유리, 인견 제조 기술 개발에 기여했으며,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 교수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대한화학회 회장, 한국원자력연구원 초대 상임 원자력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지내며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고,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2. 학력


  • 1930 ~ 1933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 (공학사)[1]
  • 1952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1]

3. 생애 및 공적

김동일은 190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 및 대한화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응용화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와키유리, 가네보 화학공업주식회사, 경성방직 등에서 근무하며 안전유리, 인견 등의 제조 기술 개발에 참여했다. 특히 이와키유리에서는 동양 최초로 피막을 이용한 안전유리 제조에 성공했고, 가네보에서는 '가네라리아'라는 인견사를 개발하여 회사의 주력 상품으로 만들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여 교수진 확보, 국대안 파동 극복 등 공과대학의 기틀을 다졌다. 한국 전쟁 중에도 학장직을 수행하며 대학과 학생들을 보호했다.

이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원자력원, 대한화학회,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현 과학창의재단) 등에서 활동하며 과학기술 진흥에 힘썼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초대 상임위원, 대한화학회 회장(6회 역임), 흥한화학섬유(주)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창립 주도,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 설립, 서울국제사이언스클럽 창설 등 과학기술계 발전을 위한 활동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국제 순수 및 응용화학연합(IUPAC) 한국 대표 등 국제적인 활동에도 참여했다.

3. 1. 초기 생애와 일본 유학

1908년 3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의 작은 마을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평양직할시의 상수보통학교와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1] 학창 시절 화학 참고서를 통해 화학자의 꿈을 키웠으며, 192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사가고등학교 이공계열을 거쳐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1]

동경제국대학 졸업 후 1년간 무보수 조교 생활을 거쳐 도쿄 소재 이와키유리(이와키 주식회사) 연구주임으로 입사, 근무하며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피막을 사용해 안전유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1]

3. 2. 일제강점기 산업 현장 경험

1933년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김동일은 1년간 지도교수의 조수를 맡은 후, 1934년 이와키유리(AGCテクノ글라스)에 입사했다.[1] 1939년까지 이와키유리에서 연구과장을 맡았으며, 아세트산 셀룰로스 관련 기술로 7개의 특허를 취득했다.[1] 이와키 주식회사에서는 연구주임으로 근무하며 동양 최초로 피막을 사용해 안전유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1]

이후 경력을 인정받아 인견을 생산하는 가네보(鐘淵紡績) 화학공업주식회사로 옮겨 삼작산 섬유소를 원료로 인견을 만드는 새로운 제조법을 개발했다.[1] ‘가네라리아’라고 불리는 이 인견사는 회사의 주력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1] 1942년에는 경성방직으로 이직하여[1] 영등포 공장장으로 일하며 공정 개선 및 경영 합리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였다.[1]

3. 3. 해방 이후 교육 및 과학기술계 활동

해방 이후 김동일은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1946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1] 교수 부족으로 인해 전공인 섬유공학 외의 과목에서도 강의를 했다.[1] 초창기 어려운 여건에서도 교수진 확보에 노력했으며, 좌우대립과 국대안 파동(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을 겪으면서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자리를 잡게 만들었다. 1952년, 한국 전쟁 중이었지만 제3대 학장을 다시 맡아 전시 하에서 대학과 학생들을 지켰다.[1]

1952년 4월 서울대학교 이공계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 14년간의 공대 교수 및 학장 생활을 마감한 그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원자력원, 대한화학회,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현 과학창의재단),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 등 정부와 과학기술단체, 산업계를 넘나들며 실학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진흥시켰다. 1959년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초대 상임 원자력위원으로 임명되어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를 주도했으며, 고급인력 양성을 위한 해외 파견계획을 지휘하는 등 원자력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다.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총 6번이나 대한화학회 회장을 맡았고, 1966년부터는 화학회관 건립위원장으로 활동해 1971년 화학회관을 건립했다. 1962년 흥한화학섬유(주) 부사장을 맡아 화학공장 재직 시 쌓은 경험을 살려, 국내 최초로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성공적으로 건설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창립 준비위원으로 실무를 주도하며 90여개 과학기술단체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과총 초대 부회장을 맡아, 「과학기술진흥법」을 제정하고, 과학기술 전담부서를 설치했으며,「과학기술인의 신조」를 제정했다. 1970년에는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를 설립해 초대 이사장으로서 국가적으로 절실한 석유탐사와 개발연구를 선도했다. 1978년 서울국제사이언스클럽을 창설해 초대 이사장과 명예회장을 지냈으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유네스코 총회 한국 대표, 국제 순수 및 응용화학연합(IUPAC) 한국 대표, 국제과학연합(ICSU) 총회 한국 대표 등으로 활약했다.

4. 상훈


  •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 19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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