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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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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봉연은 군산상업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야구 선수로,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1988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프로 원년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통산 4차례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83년 교통사고 후 한국시리즈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통산 타율 0.278, 110홈런을 기록했으며, 1980년대 대표적인 스타로 7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선수 은퇴 후에는 극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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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선수명김봉연
원어명Kim Bong-yeon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전라북도 전주시
생년월일1952년 1월 13일
신장177cm
체중83kg
수비 위치내야수
투구
타석
프로 입단 연도1982년
드래프트 순위프로 원년 멤버
첫 출장KBO / 1982년 3월 28일 구덕 대 롯데전
선수 경력
선수 경력해태 타이거즈 (1982년 ~ 1988년)
지도자 경력
지도자 경력현대건설 야구단 인스트럭터
수상 내역
획득 타이틀홈런왕 (1982, 1986)
타점왕 (1986)
1983년 한국시리즈 최우수 선수
골든 글러브 (지명타자, 1986)
베스트 10 2회수상 (1루수 1982, 지명타자 1983)
베스트 올스타 최다득표자 (1982, 1985, 1986)
국가대표 경력
대표 국가대한민국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1975 서울
월드 게임1981 샌타클래라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메달1975 서울 단체전 금메달
월드 게임 메달1981 샌타클래라 단체전 은메달

2. 선수 경력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연고지 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프로 원년 홈런왕을 차지했다.[1] 김우열, 이만수와 라이벌 관계였다.

1983년 동승자가 사망할 정도로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300바늘 넘게 꿰맨 상처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으며, 한 달 만에 한국시리즈에 나와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끌고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1]

통산 타율 0.278, 포스트 시즌 타율 0.341을 기록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4차례 우승에 기여했으며, 두 번의 홈런 1위를 기록했다.[1] 1982년 데뷔부터 1988년 은퇴할 때까지 7년 연속 올스타 베스트에 선정되었고, 1983년, 1985년, 1986년에는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1990년 원광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과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여 프로야구계의 대표적인 학구파 선수로 알려져 있다.

2. 1. 아마추어 시절 (군산상고, 한국화장품)

군산상업고등학교 시절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가진 군산상고의 4번 타자로 활약했다. 당시 군산상고는 김일권, 김준환, 청보 핀토스 1번 타자였던 김우근 등의 선수들과 함께 전국구 강호로 군림했다.[1]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실업 야구팀 한국화장품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아마 최고의 강타자 김우열을 제치고 대통령배 실업야구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아마추어 야구에서 단 6개밖에 없는 3연타석 홈런 기록 중 절반을 김봉연이 가지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

2. 2. 프로 시절 (해태 타이거즈)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연고지 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당시 한국 나이로 31세로, 이미 전성기를 약간 넘긴 시점이었으나 프로 원년 홈런왕을 차지했다.

골프를 연상시키는 어퍼 스윙의 대명사로 엄청난 힘을 자랑했으며, 김우열, 이만수와 라이벌 관계였다. 1983년 동승자가 사망할 정도로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300바늘 넘게 꿰맨 상처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으며, 한 달 만에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여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끌고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1]

통산 타율은 0.278, 포스트 시즌 타율은 0.341이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4차례 우승에 기여하였으며, 두 번의 홈런 1위를 기록하는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오른손 강타자로 활약하였다.[1] 1982년 데뷔부터 1988년 은퇴할 때까지 7년 연속으로 올스타 베스트에 선정된 1980년대 대표적인 스타 선수였으며, 그 중 3차례(1983, 1985, 1986년)나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2. 3. 선수 시절 통산 기록


도소





장타







2

3



















O
P
S




타몸

맞희





4
1982해태307430426955891412252722816.331.406.6361.042171860131983318032928653801012259224228.280.372.552.924158300141984329740034142851801748325056.249.352.452.804154164231198533913633164580911747754326.253.348.449.79814263010198634108453407631221832167353830.300.363.514.87620994135198735983803393392112639122723.271.331.369.6991251345211988368220918720484052210138.257.304.358.6626740810KBO 통산 : 7년630243821453115968481103342418241187.278.355.478.83310265921161214



김봉연은 해태 타이거즈 소속으로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을 차지했고, KBO 통산 7년 동안 630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278, 110홈런, 334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1983년에는 큰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한국시리즈에 출전, 팀의 첫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 포스트 시즌 통산 타율은 0.341이다.[1]

3. 지도자 경력

해태 타이거즈에서 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3. 1. 해태 타이거즈 코치 및 2군 감독

1989년부터 1994년까지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에서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2] 그러나 1994년 시즌 후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해태 구단이 결별을 선언하면서[2] 한동안 현장을 떠나 있었다.

1997년에 해태 타이거즈 타격 코치로 복귀하여[3] 지도자로서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2000년 해태 타이거즈의 2군 감독을 맡아 유망주 육성에 힘썼으나, 이를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나 교육계에 몸담았다.

4. 교육자 경력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문서와 지시사항을 함께 제공해주시면 수정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5. 학력

6. 등번호

김봉연은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등번호 '''27'''번을 사용했다.

참조

[1] 뉴스 혼신의 스윙으로 쌓은 금자탑, 김봉연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2-09
[2] 뉴스 <프로야구>스타는 소모품인가-김봉연.박철순.김성한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94-11-23
[3] 뉴스 프로야구 8개구단 코칭스태프 개편 한창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96-11-15
[4] 뉴스 "쌀 아끼려 점심은 국수"... 배고픔이 만든 군산상고 신화 https://sports.news.[...] 오마이뉴스 201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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