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배 (1923년)
1. 개요
김용배는 1923년 경성부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군 학병으로 복무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제7사단장, 육군본부 인사국장, 제1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965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대장으로 진급했다. 육군참모총장 재임 시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하고 국방력 강화에 기여했다. 1966년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 기업인으로 활동했으며, 1980년 국방부 정책 자문을 맡았다. 1950년 윤태현 소령 즉결처분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으며, 윤태현의 명예는 2008년 회복되었다. 그는 태극무공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수훈했다.
| 씨명 | 김용배 |
|---|---|
| 한글 표기 | 김용배 |
| 한자 표기 | 김용배 |
| 로마자 표기 | Gim Yong-bae |
| 출생일 | 1923년 4월 21일 |
|---|---|
| 사망일 | 2006년 3월 13일 (84세) |
| 출생지 | 경성부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32호 |
| 본관 | 광산(光山) |
| 배우자 | 수안 김씨 김희숙(遂安 金氏 金熙淑) |
| 친척 | 친아우 김종면(金宗勉), 손윗처남 김종문(金宗文), 손윗처남댁 풍천 임씨 임마리(豊川 任氏 任瑪利) |
| 군 복무 | 소위(일본 육군) 대장(한국 육군) |
|---|---|
| 복무 기간 | (1944년 ~ 1945년 8월 15일) (1946년 ~ 1966년 9월 1일)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 지휘 | 육군참모총장 |
| 학력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
|---|
| 기타 이력 | 대한중석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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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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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보병학교 동문 -
김종필
5·16 군사정변 주역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여와 '김-오히라 메모' 논란, 9선 국회의원, DJP 연합을 통한 총리 재임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지역주의 정치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
육군보병학교 동문 -
임동원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임동원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군과 정부의 요직을 거쳐 나이지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으나, 제2연평해전 발언과 불법 감청 혐의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 생애
金容培일본어는 1923년 4월 21일 경성부에서 태어나 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학병으로 입대하여 소위로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하였다.
한국 전쟁 참전 및 주요 전투에서 활약, 전후 육군 주요 보직 역임, 군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육군참모총장 재임 시기에는 월남전 파병, 나이키 허큘레스 대대 창설, 단기 간부 후보생 제도 신설, 멸공기동 훈련 실시 등 উল্লেখযোগ্য 업적을 남겼다.
1966년 예비역으로 편입 후, 충주비료 사장, 대한중석 사장 등을 역임하며 기업인으로 활동, 1980년에는 국방부 정책 자문을 맡았다.
2.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金容培일본어는 1923년 4월 21일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학병으로 입대해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946년 3월 23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10077번)하여, 제1연대 C중대 소대장을 맡았다. 이후 제7연대 및 제13연대에서 근무하며 중령까지 진급했다. 1949년 1월 15일 제1사단 참모장, 같은 해 9월 17일 제8사단 제21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50년 1월부터 6월까지 육군보병학교 교육 과정에 입교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동해안 전투, 7월 지연 작전,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용전했다. 1950년 10월, 제3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1951년 1월, 제7사단 부사단장으로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2월 공세, 킬러 작전, 4월 공세에서 사단장을 보좌했다. 같은 해 4월 27일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요원을 거쳐, 5월 28일 제7사단장에 임명되었다. 6월의 917고지 쟁탈전을 지휘하고, 8월에는 양갈래 고지(732고지)를 점령했다. 이후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진주지구 위수사령관을 역임했다.
1952년 3월 육군보병학교 부교장, 5월 육군본부 인사국장을 역임했다. 1953년 2월에는 제7사단장으로 복귀하여 전초 진지 쟁탈전을 전개했다. 1954년 6월부터 이듬해까지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다. 1955년 7월 육군본부 인사국장, 1956년 9월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차장을 역임했다.
2.2. 한국전쟁 참전
김용배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동해안 전투, 7월 지연 작전,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용전했다. 1950년 10월 제3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했고, 1951년 1월에는 제7사단 부사단장으로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2월 공세, 킬러 작전, 4월 공세에서 사단장을 보좌했다. 같은 해 4월 27일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요원을 거쳐 5월 28일 제7사단장에 임명되었다. 6월의 917고지 쟁탈전을 지휘하고, 8월에는 양갈래 고지(732고지)를 점령했다. 이후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진주지구 위수사령관을 역임했다. 1953년 2월, 제7사단장으로서 전초 진지 쟁탈전을 전개했다.
2.3. 한국전쟁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동해안 전투, 7월 지연 작전, 부산 교두보 전투에 참전했다. 같은 해 10월, 제3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1951년 1월, 제7사단 부사단장으로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2월 공세, 킬러 작전, 4월 공세에서 사단장을 보좌했다. 같은 해 4월 27일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요원을 거쳐 5월 28일 제7사단장에 임명되었다. 6월의 917고지 쟁탈전을 지휘하고, 8월에는 양갈래 고지(732고지)를 점령했다. 이후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진주지구 위수사령관을 역임했다.
1952년 3월, 육군보병학교 부교장, 5월 육군본부 인사국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2월, 다시 제7사단장으로 복귀하여 전초 진지 쟁탈전을 전개했다.
1954년 6월부터 이듬해까지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다.
1955년 7월, 육군본부 인사국장으로 복귀했다.
1956년 1월, 김창룡 중장 암살 사건 조사 위원을 맡았고, 9월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59년 7월, 소장으로 임명되며 제1군단장을 맡았다.
1960년 4월, 제5군단장, 10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차장을 역임했다.
1961년 1월, 중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육군 참모차장을 역임했다.
1963년 6월, 제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65년 4월, 육군 참모총장 및 대장에 임명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재임 시기에 그는 월남전에 대한민국 국군 파월 전투부대였던 맹호, 백마부대를 파월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전세계에 과시하였고, 한국군 최초의 나이키 허큘레스 대대 및 지원대를 창설하여 대공 방어능력을 향상시켰으며, 부족되는 장교를 보충하기 위하여 단기 간부 후보생 제도를 신설하여 우수장교를 확보하고, 야전군의 훈련평가를 위해 멸공기동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 태세 완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6년 9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967년 1월, 충주비료 사장을 맡았다.
1968년, 대한중석광업 사장을 역임했다.
1980년, 국방부 정책 자문을 맡았다.
2.4. 육군참모총장 재임 시절
김용배는 육군참모총장 재임 시기에 월남전에 대한민국 국군 파월 전투부대였던 맹호, 백마 부대를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전세계에 과시하였다. 한국군 최초의 나이키 허큘레스 대대 및 지원대를 창설하여 대공 방어능력을 향상시켰고, 부족한 장교를 보충하기 위하여 단기 간부 후보생 제도를 신설, 우수 장교를 확보하였다. 또한, 야전군의 훈련평가를 위해 멸공기동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 태세를 완벽하게 갖추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5. 전역 이후
1966년 9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967년 1월, 충주비료 사장을 맡았다. 1968년에는 대한중석 사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에는 국방부 정책 자문을 맡았다.
3. 윤태현 소령 즉결처분 문제
1950년 7월, 김용배가 이끄는 제21연대는 강릉에서 철수한 후, 경상북도 영주읍·풍기면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 제12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독단적인 철수를 반복했다는 이유로 제1대대장 윤태현 소령을 군법회의 없이 7월 17일에 총살했다.
그러나 육군 참모총장의 즉결처분 허가령이 발동된 것은 8일 뒤인 7월 25일이었고, 따라서 윤태현의 처형은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 출신인 김용배와 한국광복군 출신인 윤태현과는 여러 마찰이 있었고, 처형도 원한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상은 확실하지 않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2008년에 윤태현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4. 학력
| 학교 | 졸업 년도 |
|---|---|
| 군사영어학교 1기 | 1946년 |
| 조선경비보병학교 | 1947년 |
| 통위부 보병학교 | 1948년 |
| 육군보병학교 | 1949년 |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 1954년 |
|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 1956년 |
|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기 | 1958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