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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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휴는 1597년 안동에서 태어나 1639년 사망한 조선의 문인이다. 그는 19세에 장현광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으며, 《해동문헌총록》을 저술하여 문헌 연구에 기여했다. 김휴는 관직에 나아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장현광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영향을 받았다. 그의 가문은 안동 지역의 명문가였으며, 김휴는 《해동문헌총록》 편찬을 통해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김휴는 1597년 경상도 안동 임하면 천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영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일곱 살 전후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에는 문장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1] 경전을 한 번 읽으면 그 깊은 뜻에 심취할 정도였다.
2. 생애
광해군 4년(1612년) 향시에 합격했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성시에는 응시하지 못했다.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뒤 19세에 경암(敬庵) 노경임(盧景任)의 딸과 혼인하였다. 노경임은 김휴의 할아버지 김통과 교류하던 사이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인조 5년(1627년) 31세에 사마시에 응시한 정도였다. 인조 13년(1635년) 전시에서는 '삼가 대답한다(謹對)'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 격식을 어겼다는 이유로 낙제했다. 인조 15년 이조참판 용주 조형(1586~1669)의 천거로 강릉(명종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그해 그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유사(遺事)를 직접 기록했다.
이후 김휴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했다. 금강산 등 여러 곳을 다니며 느낀 바를 글로 남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고향에서 《해동문헌총록》 등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특히 《해동문헌총록》은 그의 필생의 역작으로, 사망하기 1년 전까지도 집필과 정리에 매달렸다. 병세가 악화되어 직접 글을 쓰기 어려워지자, 다른 사람에게 구술하여 내용을 받아 적게 할 정도였다.
인조 17년 8월, 김휴는 '임종자만'(臨終自輓)이라는 만시를 짓고 다음 날인 24일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의 스승 여헌 장현광 역시 그보다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2. 1. 출생과 가계
1597년 경상도 안동 임하면 천전동에서 아버지 경재 김시정(金是禎)과 어머니 예안 김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김휴의 집안은 안동 지역의 명문가로, 의성 김씨 가문은 퇴계 학문의 중심 가문으로 평가받았다. 김휴의 고조할아버지 김진(1500~1580)의 다섯 아들들은 모두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1]
| 인물 | 관계 |
|---|---|
| 김진(1500~1580) | 고조할아버지 |
| 낙봉 김극일(1522~1585) | 고조할아버지 김진의 아들 |
| 귀봉 김수일(1528~1583) | 증조할아버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
| 운천 김통(1557~1620) | 할아버지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에 임명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전란 이후 선산부사로 재임하면서 금오서원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영남 유학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
| 경재 김시정(金是禎, 1579~1613) | 아버지 (문집으로 《경재유고》가 있다.) |
| 운암 김명일(1534~1570) | 고조할아버지 김진의 아들 |
| 학봉 김성일(1538~1593) | 종고조부 |
| 남악 김복일(1541~1591) | 고조할아버지 김진의 아들 |
이러한 가학(家學)의 배경은 훗날 김휴가 《해동문헌총록》을 편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휴는 부인 경암(敬庵) 노경임(盧景任)의 딸 노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 인물 | 관계 |
|---|---|
| 김학기(學基) | 아들 (진사) |
| 김두장(金斗章)에게 출가 | 딸 (아들 김만추(萬秋) 출산) |
| 김세경(世鏡) | 손자 (김학기의 아들) |
| 김덕하(德河) | 증손 (김세경의 아들) |
| 김상원(相元) | 현손 (김덕하의 장남, 후사 없이 요절) |
| 김시원(始元) | 현손 (김덕하의 차남) |
| 김복하(福河) | 증손 (김세경의 아들) |
2. 2. 학문 수학과 여헌 장현광과의 만남
김휴는 할아버지 김통으로부터 장현광(張賢光)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김통은 장현광을 "덕(德)과 기(氣)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져서 꾸밈이 없으며, 옛 사람의 말처럼 겉으로는 심상한 말을 하지만 속은 진실로 성성하다"고 평가했다.[2]이후 김휴는 장인이자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노경임을 통해 장현광을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세 되던 해인 1615년(광해군 7년), 노경임으로부터 《주역》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장현광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김휴는 장현광을 찾아가 원당(遠堂)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거나, 장현광과 함께 여지정(余池亭) 등에서 유숙하면서 《주역》을 배우기도 했다.[2]

장현광은 김휴에게 자신이 저술한 《역학유설》(易學類說)의 목록을 건네면서, 함께 연구하며 가르침을 주고 싶지만 김휴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랜 시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2] 그럼에도 김휴는 장현광의 학문 요체를 전수받았고, 《경위설》(經緯說), 《우주설》(宇宙說), 《만학요회》(晩學要會) 등을 전수받아 병중에도 탐독했으며, 서신을 통해 여러 의문점을 해소했다.
《여헌선생문집》에는 김휴와 장현광 사이에 오간 서신 중 '답문목-김휴에게 답함'이라는 제목의 편지 하나만이 전한다.[3] 김휴는 장현광이 보낸 편지를 많이 유실한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이를 통해 둘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2]
1616년(병진년), 장현광은 김휴에게 자신이 초략해 엮은 《문헌통고》(文獻通考) 경적고(經籍考)를 보여주며, 우리나라 문헌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글로 남길 것을 권했다. 장현광의 가르침은 김휴가 각지에 흩어진 문헌들을 조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해동문헌총록》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관직 진출과 좌절
김휴는 광해군 4년(1612년)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가 위독하여 성시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더 이상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1] 인조반정 이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5년(1627년) 31세에 사마시에 응시한 적이 있을 뿐이다. 인조 13년(1635년) 전시에서 '삼가 대답한다(謹對)'라는 말을 쓰지 않아 격식을 어겼다는 이유로 낙제하였다.[1]인조 15년 당시 이조참판 용주 조형(1586~1669)의 천거로 강릉(명종릉)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1] 이후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1]
2. 4. 《해동문헌총록》 저술과 학문적 업적
김휴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평생의 역작이 될 《해동문헌총록》 집필에 매달렸다. 그는 사망하기 1년 전까지도 이 책의 집필과 정리에 매달렸으며, 저술이 완성되고 서문을 쓸 때는 병이 악화되어 다른 사람에게 구술하는 내용을 받아 적게 할 정도였다.[1]2. 5. 말년과 죽음
이후 김휴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학문에 침잠하였으며, 한때 금강산을 비롯한 여러 곳을 다니며 그 소회를 글로 남긴 것 외에는 대부분의 일생을 고향에서 《해동문헌총록》 등의 저술에 몰두하였다.[1] 김휴는 평생의 역작이 될 《해동문헌총록》 집필과 정리에 사망하기 1년 전까지도 매달렸다. 저술이 완성되고 서문을 쓸 때는 병이 악화되어 직접 쓰지 못하고 타인에게 구술하여 받아 적게 하였다.인조 17년 8월 만시 '임종자만'(臨終自輓)을 짓고 다음 날인 24일 사망하였다. 향년 42세였다.
김휴가 사망하기 1년 전에 그의 스승 여헌 장현광도 세상을 떠났다.
3. 여헌 장현광과의 관계
김휴는 장현광(여헌)의 문집 《여헌선생속집》 권9 부록에 실려 있는 경모록(敬慕錄)을 직접 작성했다. 경모록에 따르면, 김휴는 선조(先祖) 참의공(參議公) 김통으로부터 "장현광은 덕이 깊고 자연스러워 억지로 꾸미지 않으며, 겸손하고 온화하며 평이하다."라는 평가를 들었다.[2]
김휴는 할아버지 김통과 장인이자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노경임을 통해 1615년(광해군 7년) 19세에 장현광의 문하에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김휴는 원당에 기거하거나 여지정(余池亭) 등에서 장현광과 함께 유숙하면서 주역을 배웠다.[2]
장현광은 김휴에게 《역학유설》(易學類說) 목록을 건네면서 김휴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2] 그럼에도 김휴는 장현광의 학문 요체를 전수받았고, 《경위설》(經緯說), 《우주설》(宇宙說), 《만학요회》(晩學要會) 등을 병중에도 탐독했으며, 서신을 통해 여러 의문점을 확인받았다.
《여헌선생문집》에는 '답문목-김휴에게 답함'이라는 내용으로 장현광이 김휴에게 보낸 답신 하나만이 전한다.[3] 김휴는 많은 편지를 유실한 것을 한탄했다.[2]
장현광이 1616년(병진년) 자신이 초략해 엮은 《문헌통고》(文獻通考) 경적고(經籍考)를 김휴에게 보여주며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나라 문헌을 알지 않으면 아니되네."라고 한 가르침은 김휴가 《해동문헌총록》을 집필하는 동기가 되었다.
3. 1. 장현광의 학문적 영향
김휴는 할아버지 김통으로부터 장현광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김통은 장현광을 "덕이 깊고 자연스러워 억지로 꾸미지 않으며, 겸손하고 공손하며 온화하고 평이하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을 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진실로 성성하다."라고 평가했다.[2]이후 김휴는 장인이자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노경임을 통해 장현광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1615년(광해군 7년), 19세의 김휴는 노경임에게서 주역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장현광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김휴는 장현광을 찾아가 원당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받거나, 여지정(余池亭) 등에서 함께 묵으며 주역을 배우기도 했다.[2]
장현광은 김휴에게 자신이 저술한 《역학유설》(易學類說)의 목록을 건네주며, 김휴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가르침을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김휴는 장현광의 학문 요체를 전수받았다. 장현광의 저술인 《경위설》(經緯說), 《우주설》(宇宙說), 《만학요회》(晩學要會) 등을 전수받아 병중에도 탐독했으며, 서신을 주고받으며 의문점을 해소했다.[2]
《여헌선생문집》에는 장현광이 김휴에게 보낸 답신 하나만이 '답문목-김휴에게 답함'이라는 제목으로 전한다.[3] 김휴는 장현광에게 받은 편지를 많이 유실한 것을 한탄하며, 둘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음을 짐작하게 한다.[2]
1616년(병진년), 장현광은 김휴에게 자신이 간추려 엮은 《문헌통고》(文獻通考) 경적고(經籍考)를 보여주며, 조선 사람이라면 조선의 문헌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휴에게 문헌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글로 남길 것을 권했고, 이는 김휴가 《해동문헌총록》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3. 2. 서신 교류와 학문적 토론
장현광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김휴의 학문적 스승이었다. 김휴는 장현광의 문집인 《여헌선생속집》 권9 부록에 실린 경모록(敬慕錄)에서 할아버지 김통과 장인 노경임을 통해 장현광을 알게 되었고, 1615년에 그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고 기록했다.[2]김휴가 장현광을 남산 본택에서 만났을 때, 장현광은 《역학유설》(易學類說) 목록을 건네며 김휴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나 김휴는 장현광의 학문, 특히 《경위설》(經緯說), 《우주설》(宇宙說), 《만학요회》(晩學要會) 등을 배우고 서신을 통해 질문하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2]
《여헌선생문집》에는 '답문목-김휴에게 답함'이라는 서신 하나만 전해지지만,[3] 김휴는 많은 서신을 유실했다고 안타까워했다.[2] 이를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잦은 서신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616년, 장현광은 김휴에게 《문헌통고》(文獻通考) 경적고(經籍考) 초략본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문헌을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했고, 이는 김휴가 《해동문헌총록》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4. 《해동문헌총록》
김휴는 《해동문헌총록》 서문에서 장현광이 1616년에 자신에게 초략해 엮은 《문헌통고》 경적고(經籍考)를 보여 주면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나라 문헌을 알지 않으면 아니되네."라고 가르침을 주었고, 이것이 《해동문헌총록》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2]
장현광은 김휴에게 자신이 저술한 《역학유설》(易學類說)의 목록을 건네면서, 건강 문제로 오랫동안 함께 머물며 가르침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2] 그럼에도 김휴는 장현광의 학문 요체를 전수받았고, 《경위설》(經緯說), 《우주설》(宇宙說), 《만학요회》(晩學要會) 등을 전수받아 병환 중에도 탐독하였으며, 서신을 통해 여러 의문점을 확인받았다.
김휴는 스승인 장현광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많이 유실하였다고 한탄하였는데, 이를 통해 둘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2]
4. 1. 편찬 배경과 과정
김휴는 《해동문헌총록》 서문에서 장현광이 1616년(병진년) 자신에게 초략해 엮은 《문헌통고》(文獻通考) 경적고(經籍考)를 보여 주면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나라 문헌을 알지 않으면 아니되네. 자네는 자못 폭넓게 보고 많이 기억하는 재주가 있는 데다, 자네가 거주하는 근처 읍성은 병화(兵火)를 면해서 서적이 온전히 보존된 곳이 많을 것이니, 아마도 보고 들어서 수집할 수 있을 것일세. 이를 이어 글로 지으면, 문헌을 증빙하고 널리 살펴보는데, 충분히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니, 그 공(功)이야 말로 마땅히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것일세."라고 가르침을 주었고, 이것이 김휴가 각지에 흩어진 문헌들을 조사하고 그 목록을 정리하여 《해동문헌총록》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2]4. 2. 내용 구성과 특징
《해동문헌총록》 서문에서 김휴는 장현광이 1616년에 자신에게 《문헌통고》 경적고(經籍考)를 보여주면서 "우리나라 문헌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고, 김휴가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거주지 근처에 병화를 면해 서적이 온전히 보존된 곳이 많다는 점을 들어 문헌 조사를 권유한 것이 《해동문헌총록》 집필 동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2]김휴는 장현광의 저술인 《역학유설》, 《경위설》, 《우주설》, 《만학요회》 등을 전수받아 탐독하였으며, 서신을 통해 여러 의문점을 확인받았다. 《여헌선생문집》에는 장현광이 김휴에게 보낸 '답문목-김휴에게 답함'이라는 편지 하나가 전한다.[3] 김휴는 "선생께서 평소 내려주신 간찰을 우환 중에 경황이 없어서 혹 많이 유실"하였다고 한탄하였는데, 이를 통해 둘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2]
5. 가계와 후손
김휴의 집안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진으로부터 김성일에 이르기까지 의성 김씨 가문은 퇴계 학문의 중심 가문으로 평가받았다.[1] 김휴는 부인 노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 김휴의 자녀 | 배우자 | 자녀 |
|---|---|---|
| 아들 김학기 (진사) | 전처 | 딸 (류창시에게 출가), 아들 류신적 |
| 후처 | 아들 김세경, 딸 (김덕일에게 출가, 아들: 김뇌만, 김항만, 김진만) | |
| 딸 | 김두장 | 아들 김만추 |
김학기의 아들 김세경은 김덕하와 김복하 두 아들과 딸 넷을 두었다. 김덕하는 아들 김상원과 김시원을 두었다. 김상원은 집안을 이었지만 후사 없이 요절했다.[1]
| 김세경의 자녀 | 배우자 |
|---|---|
| 아들 김덕하 | |
| 아들 김복하 | |
| 딸 | 박종상, 정주현, 권정기, 권정신 |
5. 1. 주요 가계 인물
金烋중국어의 고조할아버지는 김진(1500~1580)이다. 김진의 슬하 다섯 형제는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1]- 낙봉 김극일(1522~1585)
- 귀봉 김수일(1528~1583) - 金烋중국어의 증조할아버지.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남아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1]
- 운천 김통(1557~1620) - 金烋중국어의 할아버지.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다 병으로 사직하였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에 임명되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전란 이후에는 선산부사로 재임하면서 금오서원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영남 유학의 진흥에 이바지하였다.[1]
- 경재 김시정(金是禎, 1579~1613) - 金烋중국어의 아버지. 문집으로 《경재유고》가 있다.[1]
- 운암 김명일(1534~1570)
- 학봉 김성일(1538~1593)
- 남악 김복일(1541~1591)
金烋중국어의 집안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명망 있는 가문이자 여러 인맥들과 두루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증조부 김진으로부터 김성일에 이르기까지 의성 김씨 가문은 퇴계 학문의 중심 가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였고, 종고조부 김성일의 퇴계학파 내에서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안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가문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수집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1] 이는 훗날 그가 해동문헌총록을 편찬하는데 보탬이 되었다.[1]
5. 2. 후손들의 삶과 활동
김휴는 부인 노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김학기(學基)'''는 진사였고, 딸은 김두장(金斗章)에게 시집가 아들 김만추(萬秋)를 두었다. 김학기는 두 번 혼인하였는데, 전처 소생의 딸은 류창시(柳昌時)에게 시집가 류신적(信迪)을 낳았다. 후처 소생으로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김세경(世鏡)'''과 딸은 김덕일(金德一)에게 시집가 김뇌만(雷萬), 김항만(恒萬), 김진만(震萬)을 낳았다.[1]김세경은 김덕하(德河)와 김복하(福河) 두 아들과 딸 넷을 두었다. 네 딸은 각기 박종상(朴宗相), 정주현(鄭周賢), 권정기(權正己), 권정신(權正臣)에게 시집갔다. 김덕하는 아들 김상원(相元)과 김시원(始元)을 두었는데, 김상원이 집안을 이었으나 후사 없이 요절했다.[1]
6. 일화
광해군 9년(1617년) 폐모론을 주장하였던 정조가 경상도안찰사로 부임해서 도산서원에 들렀을 때, 김휴는 정조가 자신의 이름을 원록(院錄)에 기재하는 것을 보고 "유적(儒籍)을 더럽히지 말라"며 분개하여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는 일화가 있다.[3]
6. 1. 정조와의 갈등
광해군 9년(1617년) 폐모론을 주장하였던 정조(1559~1623)가 경상도안찰사로 부임해서 예안을 순시하였을 때 도산서원에 들러서 자신의 이름을 원록(院錄)에 기재하는 것을 보고 분개해서 "유적(儒籍)을 더럽히지 말라"며 정조의 이름을 지워버렸다는 일화가 있다.[3]참조
[1]
서적
경와집
[2]
서적
여헌선생속집
[3]
서적
여헌선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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