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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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익은 1547년에 태어나 1634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활약했으며, 광해군 시대에는 영의정을 역임하며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데 기여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을 지냈으나, 청렴한 생활과 당파를 초월한 정치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대동법 시행이며, 청백리 정신을 실천하여 '오리 정승'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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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복은 자가 자상, 호가 백사이며 경주 이씨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보필하여 호성공신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광해군 대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 후 관작이 회복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호성공신 - 심우승
심우승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승진을 거듭했으며, 호조참의 재직 중 재정 안정에 기여, 경기감사 재임 시에는 세금과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사후 호성공신 2등에 책록, 청계부원군으로 추봉,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원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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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한글 | 이원익 |
호 (칭호) | 오리 |
자 | 공려 |
시호 | 문충 |
한자 | 李元翼 |
호 (한자) | 梧里 |
자 (한자) | 公勵 (公励) |
시호 (한자) | 文忠 |
히라가나 | り げんよく |
호 (히라가나) | ごり |
자 (히라가나) | こうれい |
가타카나 | イ ウォニク |
호 (가타카나) | オリ |
자 (가타카나) | コンニョ |
직책 | 조선의 영의정 |
출생일 | 1547년 12월 15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금천현 서면 |
사망일 | 1634년 2월 26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본관 | 전주 |
자 | 공려(功勵) |
호 | 오리(梧里) |
시호 | 문충(文忠) |
봉호 |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
학력 | 1569년 별시문과에 병과 급제 |
아버지 | 이억재 |
어머니 | 동래 정씨 |
기타 정보 | |
참고 | 그의 생전에 그려진 영정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의해 약탈되었다. |
2. 생애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유성룡, 정구, 이이는 그의 인품과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선조 6년) 성균관 전적으로 성절사 질정관의 서장관이 되어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명나라 관리들 앞에서 글재주, 시 솜씨, 서예 솜씨를 뽐내 이름을 떨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 예조랑에 뽑혀 황해도 도사가 되어 인망을 얻었다. 이이가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1576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이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군기시 판관, 사간원 사간,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78년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하여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안주목사로 부임하여 약곡 1만여 석으로 기민을 구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 겸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왕의 피난길을 도왔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항전하였다.[3] 관찰사가 되어 대동강 이서 지역을 지켰으며, 7월에는 명나라 원병 조승훈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키는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패퇴했다.
1593년(선조 26년) 1월, 명나라 총병관 이여송의 평양성 공격에 참여하여 평양성을 회복하고, 이 공으로 숭정대부(종1품) 품계를 받았다. 1595년(선조 28년), 이항복의 후임으로 우의정에 올랐고, 사도 도체찰사를 겸임하며 영남에서 일본군에 대응하는 동시에 명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8월에는 기강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부하를 처벌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을 참소하여 혁직시키고 곤장형에 처했으며, 후임으로 박진을 임명했다(그 후 이복남은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1598년(선조 31년), 직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명나라 장수 양호의 공적을 본국에 알리는 진주변무사로 자원하여 유성룡의 배척을 막았다. 1600년 좌의정에 올랐고,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당시 장수들 중 이순신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순신의 벗인 서애 유성룡마저 비판할 때에도 그는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라며 유일하게 이순신을 지지하였다. 후일 그의 서녀를 통해 이순신과도 사돈간이 되었다. 1604년(선조 34)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한편 문하생인 허목에게 손녀를 주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남인에 속했음에도 영의정에 발탁되었다.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게 하였다.[3] 개혁 성향이던 북인은 그의 견해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일부 남인은 북인 정권에서 수상을 지내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임해군의 처형 당시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했다가 북인들의 눈밖에 났으며,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사형하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1615년에는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나타나자,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다가 기자헌, 정구 등의 변호와 탄원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홍천군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3]
1623년(인조반정)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등용되었다.[3] 그러나 서인과의 연립 정권은 1년 만에 붕괴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인조는 대북파 49명을 처형하려 하였으나, 이원익은 이에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의 처형에 대해서도 반대하여, 인목왕후에게 간청하여 광해군의 사형을 막았다. 대동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서인과 남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3] 1627년 정묘호란에는 도체찰사를 맡아 왕세자를 호위했다. 이어서 훈련도감 대장에 임명되었지만, 고령을 이유로 사직했다.[3]
관직에서 물러나 관감당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허목, 윤휴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으며, 특히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이자 애제자였다. 이원익이 40여 년간 정승을 지내면서도 초가집에서 생활하는 검소함에 감동한 인조는 직접 관감정을 지어 집과 토지를 하사했다. 조선 국왕이 신하에게 직접 집을 지어준 사례는 황희의 영당과 이원익의 관감정, 허목의 은거당뿐이다.[1]
만년에 그가 거처하던 관감당 근처에는 그를 모신 사당과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 영정이 봉안되었던 곳은 훗날 '영당말'이라는 자연부락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1634년 2월 26일(음력 1월 29일) 8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2. 1. 가계와 출생
이원익은 1547년(명종 2년) 함천도정 이억재(李億載)와 사헌부 감찰 정지의 딸인 동래 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종의 넷째 아들 익녕군 이치의 4대손이며,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아버지 대에서 끝났다. 외가 쪽으로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과 김질의 후손이었다. 그는 키가 작아서 '키 작은 재상'으로 불리기도 했다.1562년(명종 17년)에 사부학당 중 하나인 동학에 입학했고, 1564년(명종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음보로 승의랑이 되었고, 이후 진사시에도 응시하여 합격했다.
2. 2. 소년기와 청년기
1564년(명종 19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 생원이 되었으며 그 뒤 음보로 관직에 나가 승의랑에 올랐다. 그 뒤 다시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2. 3. 관료 생활 초기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유성룡, 정구, 이이는 그의 인품과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선조 6년) 성균관 전적으로 성절사 질정관의 서장관이 되어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명나라 관리들 앞에서 글재주, 시 솜씨, 서예 솜씨를 뽐내 이름을 떨치고 되돌아왔다.이듬해 예조랑에 뽑혀 황해도 도사가 되어 인망을 얻었다. 이이가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1576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이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군기시 판관, 사간원 사간,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78년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하여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안주목사로 부임하여 약곡 1만여 석으로 기민을 구호하였다.
2. 4.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 겸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왕의 피난길을 도왔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항전하였다.[3] 관찰사가 되어 대동강 이서 지역을 지켰으며, 7월에는 명나라 원병 조승훈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키는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패퇴했다.1593년(선조 26년) 1월, 명나라 총병관 이여송의 평양성 공격에 참여하여 평양성을 회복하고, 이 공으로 숭정대부(종1품) 품계를 받았다. 1595년(선조 28년), 이항복의 후임으로 우의정에 올랐고, 사도 도체찰사를 겸임하며 영남에서 일본군에 대응하는 동시에 명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8월에는 기강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부하를 처벌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을 참소하여 혁직시키고 곤장형에 처했으며, 후임으로 박진을 임명했다(그 후 이복남은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1598년(선조 31년), 직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명나라 장수 양호의 공적을 본국에 알리는 진주변무사로 자원하여 유성룡의 배척을 막았다. 1600년 좌의정에 올랐고,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당시 장수들 중 이순신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순신의 벗인 서애 유성룡마저 비판할 때에도 그는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라며 유일하게 이순신을 지지하였다. 후일 그의 서녀를 통해 이순신과도 사돈간이 되었다. 1604년(선조 34)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한편 문하생인 허목에게 손녀를 주었다.
2. 5. 광해군 시대
광해군이 즉위하자 남인에 속했음에도 영의정에 발탁되었다. 영의정 취임 초기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게 하였다.[3] 개혁 성향이던 북인은 그의 견해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일부 남인은 북인 정권에서 수상을 지내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그러나 그는 임해군의 처형 당시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했다가 북인들의 눈밖에 났으며,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사형하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1615년에는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나타나자,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다가 기자헌, 정구 등의 변호와 탄원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홍천군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3]
2. 6. 인조반정 이후
1623년(인조반정)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등용되었다.[3] 그러나 서인과의 연립 정권은 1년 만에 붕괴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인조는 대북파 49명을 처형하려 하였으나, 이원익은 이에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의 처형에 대해서도 반대하여, 인목왕후에게 간청하여 광해군의 사형을 막았다. 대동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서인과 남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3] 1627년 정묘호란에는 도체찰사를 맡아 왕세자를 호위했다. 이어서 훈련도감 대장에 임명되었지만, 고령을 이유로 사직했다.[3]2. 7. 말년과 죽음
관직에서 물러나 관감당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허목, 윤휴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으며, 특히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이자 애제자였다. 이원익이 40여 년간 정승을 지내면서도 초가집에서 생활하는 검소함에 감동한 인조는 직접 관감정을 지어 집과 토지를 하사했다. 조선 국왕이 신하에게 직접 집을 지어준 사례는 황희의 영당과 이원익의 관감정, 허목의 은거당뿐이다.[1]만년에 그가 거처하던 관감당 근처에는 그를 모신 사당과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 영정이 봉안되었던 곳은 훗날 '영당말'이라는 자연부락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1634년 2월 26일(음력 1월 29일) 8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3. 정치 활동과 사상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당시 한성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 49명에 대한 처형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1년(인조 9년) 1월 10일 인조는 승지 강홍중을 보내 이원익을 문안하고 그의 집 상태를 물었다.[4] 강홍중은 두 칸짜리 초가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낡았다고 보고했다. 인조는 40년간 재상을 지낸 이원익의 청렴함에 감탄하며 5칸짜리 집을 하사하려 했으나, 이원익은 백성들의 원망을 염려하여 사양했다.[4]
남인은 김육이 서인이라는 이유로 대동법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였으나, 이원익은 당색을 초월하여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다.
3. 1. 대동법 시행
1608년(광해군 즉위년) 영의정으로서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다.[4] 대동법은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고치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개혁 성향이던 북인은 이원익의 견해를 적극 지지하였다. 남인에서는 김육이 서인이라는 이유로 대동법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였으나,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였다. 만년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3. 2. 청백리 정신
이원익은 평생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재물에 욕심이 없었고, 짚신을 직접 만들어 신었으며[1] 지붕도 직접 수리했다.[1] 40여 년간 정승을 지냈음에도 초가집에서 생활했다.[1] 인조는 이러한 이원익의 청렴함에 감동하여 집과 토지를 하사하려 했으나, 이원익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이를 사양하였다.[1]국왕이 신하에게 직접 집을 지어준 사례는 황희와 이원익, 그리고 이원익의 제자이자 손녀사위인 허목 세 명이 있다.[1]
4. 평가와 영향
이원익은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성품이 원만하여 당파에 관계없이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남인 외 다른 당파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1] 그는 임진왜란 때부터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순신이 유성룡을 비판할 때에도 유일하게 지지했다.[2]
1658년(효종 9년), 청백리이자 사심 없었던 그의 뜻을 기리고자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재의 경기 광명시 소하2동)에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가 세워졌다. 그 뒤 삼현사는 충현사(忠賢祠)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676년(숙종 2년)에 숙종이 직접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 친필 사액을 내렸다.[3]
1970년대 이원익의 영정이 일시적으로 도난당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원익의 영정은 시흥군 영당말 사당에 오랫동안 모셔 왔으나 1970년대 말에 일시 도난당했으나, 도둑들이 영정을 영당 밖에 버리고 도주하였고, 그의 13대 종손 이승규 등에 의해 수습되었다.[4] 그의 13대손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이승규는 자신의 사재를 희사하여 이원익의 기념관인 충현박물관을 건립하였다.[5]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수천군 이정은 | 태종의 12남 익녕군의 차남 |
조부 | 청기군 이표(李彪) | |
아버지 | 함천군 이억재(李億載, 1503년 ∼ 1585년 8월 13일) | |
어머니(생모) | 동래 정씨(東萊鄭氏) | 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 정창손의 후손 |
누나 | 이경숙(李敬淑, 1537 ~ ?) | |
형 | 이원보(李元輔, 1530 ~ ?) | |
부인 | 연일 정씨 | 정추(鄭樞)의 딸[5] |
측실 | 모로개(模老介) | 양민 출신 |
장남 | 이의전(李儀傳, 1568 ~ 1647) | |
며느리 | 순흥 안씨 | 장사랑(將仕郞) 안굉(安宏)의 딸 |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597년 12월 5일 ~ 1653년 2월) | 양천 허씨 허목(許穆)의 처 |
손자 | 이수약(李守約, 1530? ~ ?) | |
장녀 | 이경선(李敬善, 1574 ~ ?) | |
사위 | 한산 이씨 군수(郡守) 이정혁(李廷赫) | |
서장녀 | 이기선(李箕善, 1594 ~ ?) | |
서차녀 | 이의선(李儀善, 1598 ~ ?) | |
서3녀 | 이인선(李仁善, 1602 ~ ?) | |
서장남 | 이효전(李孝傳, 1604 ~ ?) | |
며느리 | 한양 조씨 | 교관(敎官) 조원량(趙元良)의 딸 |
손자 | 이수겸(李守謙, 1621 ~ ?) | |
손녀 | 전주 이씨(1625 ~ ?) | 김연(金沇)의 처 |
며느리 | 청주 한씨 | 통정(通政) 한황(韓滉)의 딸 |
손자 | 이수림(李守臨, 1639 ~ ?) | |
손자 | 이수이(李守頤, 1657 ~ ?) | |
손녀 | 전주 이씨(1641 ~ ?) | 권경(權璟)의 처 |
손녀 | 전주 이씨(1643 ~ ?) | 백광석(白光錫)의 처 |
손녀 | 전주 이씨(1646 ~ ?) | 원상훈(元尙勲)의 처 |
손녀 | 정환(鄭環)의 처 | |
서4녀 | 이말선(李唜善, 1608 ~ ?) | |
서차남 | 이제전(李悌傳, 1611 ~ ?) | |
며느리 | 선산 김씨 | 첨지(僉知) 김응남(金應男)의 딸 |
손자 | 이수명(李守命, 1627 ~ ?) | |
손자 | 이수태(李守泰, 1630 ~ ?) | |
손자 | 이수항(李守恒, 1633 ~ ?) | |
손녀 | 전주 이씨(1648 ~ ?) | 윤추(尹抽)의 처 |
손자 | 이수경(李守經, 1653 ~ ?) |
첩에게서 얻은 서녀 중 1명을 통해 윤휴, 충무공 이순신 등과도 사돈관계를 형성하게 된다.[6]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로, 정실 손녀딸의 남편이었다.
6. 관련 문화재
- 이원익 초상 (보물 제1435호)[7]
- 이원익 선생 영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
- 오리 이원익 영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 광명 이원익 초상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 이원익 인조 묘정 배향 교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9호)
- 이원익 유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0호)
- 이원익 도망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 이원익 계자손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 광명 이원익 친필유묵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5호)
- 이원익 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기념물 제85호)
- 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
- 광명 이원익 유묵목판 인출본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 --
변경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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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이원익은 키가 3척 3촌으로, 당대 기준으로도 매우 작은 체격이어서 '키 작은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1]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130~150cm가량으로, 대략 137cm 정도로 추측된다.[1]
그의 출신지인 광명시에는 이원익의 호를 따서 오리로라는 이름이 붙은 중심 도로가 있다.[2]
그의 서형이 이원익의 사위이다. 서형수가 이원익의 딸인 관계로 북인 가문 출신임에도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수학할 수 있었다.
참조
[1]
백과사전
李元翼
http://encykorea.aks[...]
韓国学中央研究院
2021-03-25
[2]
문서
[3]
역사기록
선조실록 1616
http://sillok.histor[...]
1591-06-23 #선조 24년 6월 23일
[4]
웹사이트
문화포털
http://www.culture.g[...]
[5]
문서
[6]
문서
[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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