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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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흥수는 대한민국의 화가로, 모자이크 기법을 활용한 색면 분할과 하모니즘 미술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조화를 추구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파리에서 유학하며 살롱 도톤느전에 참여했다. 1977년 하모니즘 미술을 선언하며 한국 화단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작품은 국제 경매에서도 선보였으며, 2014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작품 세계는 동서양의 조화를 모색하는 하모니즘에 기반하며, 여성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을 대비시키는 등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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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화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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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흥수 |
한자 표기 | 興 |
로마자 표기 | Gim Heungsu |
출생일 | 1919년 11월 17일 |
출생지 | 함흥, 간쿄난도, 일본 제국 |
사망일 | 2014년 6월 9일 |
국적 | 한국 |
직업 | 화가 |
활동 기간 | 1936년–2014년 |
예술 활동 | |
분야 | 미술, 회화 |
사조 | 값찾기 |
대표작 | 값찾기 |
영향 | 값찾기 |
영향 받음 | 값찾기 |
학력 | |
학력 | 값찾기 |
수상 | |
수상 | 값찾기 |
가족 | |
배우자 | 값찾기 |
자녀 | 값찾기 |
부모 | 값찾기 |
친척 | 값찾기 |
기타 | |
스승 | 값찾기 |
제자 | 값찾기 |
종교 | 값찾기 |
웹사이트 | 값찾기 |
서명 | 값찾기 |
서명 설명 | 값찾기 |
기타 | 값찾기 |
2. 생애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44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해방 후 1952년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장 및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역임하고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아카데미 드 라 크랑크 샤브마에르에서 회화를 연구했다. 1968년부터 1980년까지 필라델피아 미술대학교 교환교수로 재직했다.[5]
2. 1. 프랑스에서의 활동 (1955-1961)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크랑크 샤브마에르에서 회화를 연구했다.[3] 그 해 살롱 도톤느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회원이 되었고, 갈르리 라라 벵시를 비롯한 여러 화랑과 계약을 맺고 개인전을 개최하며 유럽 시장에 진출했다.[4]2. 2. 귀국 후 활동 (1961-2014)
1961년 제10회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현대작가초대전 및 문화자유초대전에 출품했다.[3] 1962년 제11회 5월문예상을 수상하였고, 1967년 미국 무어대학 교환교수로 초빙되어 미국 유화조각전에 출품했고 순회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5][6] 1977년 추상과 구상의 조화를 꾀하는 하모니즘 미술을 선언하여, 국내 화단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이중섭미술상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14년 6월 9일,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며 '하모니즘'을 창시한 김흥수 화백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8]
김흥수 화백은 여성의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으로 된 추상화를 대비시켜 그리는 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시킨 '하모니즘 미술' 화풍을 통해 국내 화단에 독보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김흥수 화백의 유족으로는 3남 1녀가 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 예술적 동반자이자 부인이 된 장수현(1962∼2012) 김흥수미술관장은 201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 3. 하모니즘 선언과 후기 활동
김흥수는 1977년 추상과 구상의 조화를 꾀하는 하모니즘 미술을 선언하여 국내 화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1]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이중섭미술상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1] 2014년 6월 9일,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며 '하모니즘' 창시자로 알려진 김흥수 화백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였다.[1]김흥수 화백은 여성의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으로 된 추상화를 대비시켜 그리는 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시킨 '하모니즘 미술' 화풍을 통해 국내 화단에서 독보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1] 유족으로는 3남 1녀가 있으며, 예술적 동반자이자 부인이었던 고(故) 장수현(1962∼2012) 김흥수미술관장은 2012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1]
2. 4. 별세
김흥수는 2014년 6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8]였다. '한국이 낳은 인물의 거장', '한국의 피카소', '하모니즘 창시자' 등의 수식어로 불렸다.3. 작품 세계
김흥수는 모자이크 기법을 바탕으로 색면을 분할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한국의 풍물과 에로틱한 소재를 주로 다루었다. 그의 화풍은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12]
2010년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는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그의 창작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지만, 그는 이후에도 계속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북한 출신 실향민인 그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20주년을 기념하여 '망향'이라는 작품을 대한민국 국회 예술회관에 전시하기도 했다.[13]
3. 1. 하모니즘의 개념
김흥수는 모자이크 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색면 분할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한국적인 풍물과 에로틱한 소재를 주로 다루었으며,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화풍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는 〈나부(裸婦)〉, 〈탑(塔)과 소녀〉, 〈군동(群童)〉, 〈호(壺)〉 등이 있다.[12]김흥수 작품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조화주의 회화로, 하나의 작품 안에 구상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형태를 결합한 것이다.[9] 그의 아이디어는 음양의 조화, 여성과 남성의 조화, 동양과 서양의 조화에서 비롯되었다.[10] 그는 조화주의의 근본적인 목표가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추상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자신의 생각이든, 모든 사람의 상식이든, 성격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결합하는 것이다.[11]
Ftnews Korea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사상, 즉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융합하는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푸쉬킨 미술관의 초청을 받은 그는 입체파를 연구한 후 회화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1960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모두 팔고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후 살롱 작가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동료들은 회원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7]
그의 작품은 추상화와 형태, 구조의 혼합에서 유래한 조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7년 그는 미국의 추상화 흐름을 관찰하고 추상화와 다른 형태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7] 그는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 안에서 색조 분할을 시도했는데, 이는 한국의 풍습과 예술, 그리고 에로틱한 소재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작품은 그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12]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환상적인 색조와 형태의 조화로 유명하다.
3. 2. 주요 특징
김흥수는 모자이크 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색면 분할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한국적인 풍물과 에로틱한 소재를 주로 다루었으며,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화풍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는 〈나부(裸婦)〉, 〈탑(塔)과 소녀〉, 〈군동(群童)〉, 〈호(壺)〉 등이 있다.[9]그의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조화주의 회화로, 하나의 작품 안에 구상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형태를 결합한 것이다.[9] 이러한 아이디어는 음양의 조화, 여성과 남성의 조화, 동양과 서양의 조화에서 비롯되었다.[10] 그는 조화주의의 근본적인 목표를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추상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1]
Ftnews Korea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동서양 철학 융합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푸시킨 미술관의 초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입체파를 연구한 후 회화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고, 1960년에는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모두 판매하고 살롱 작가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당시 일본 동료들은 회원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7]
그의 작품은 추상과 형태/구조의 혼합에서 유래한 조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7년 미국의 추상화 흐름을 관찰하면서 추상과 다른 형태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7]
그는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에서 색조 분할을 구현했는데, 이는 한국의 풍습과 예술, 에로틱한 소재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작품은 그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12]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환상적인 색조와 형태의 조화로 유명하다.
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0년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는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그의 창작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북한 출신 실향민으로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20주년을 기념하여 '망향'이라는 작품을 대한민국 국회 예술회관에 전시했다.[13]
3. 3. 추상과 구상의 조화
김흥수는 모자이크 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색면을 나누어 그림을 그렸다. 한국적인 풍경과 에로틱한 소재를 주로 다루었으며,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화풍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는 〈나부(裸婦)〉, 〈탑(塔)과 소녀〉, 〈군동(群童)〉, 〈호(壺)〉 등이 있다.[9]그의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조화주의 회화인데, 이는 하나의 작품 안에 구상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형태를 결합한 것이다.[10] 그의 아이디어는 음양의 조화, 여성과 남성의 조화, 동양과 서양의 조화에서 비롯되었다.[10] 그는 조화주의의 근본적인 목표를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추상주의의 다양한 사상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자신의 생각이든, 모든 사람의 상식이든, 성격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결합하는 것을 추구했다.[11]
Ftnews Korea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동서양 철학 융합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고, 푸쉬킨 미술관의 초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입체파를 연구한 후 그림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1960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모두 팔고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후 살롱 작가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동료들은 회원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7]
그의 작품은 추상화와 형태, 구조의 혼합에서 유래한 조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7년 그는 미국의 추상화 흐름을 관찰하여 추상화와 다른 형태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다.[7] 그는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 안에서 색조의 분할을 깨달았는데, 이는 한국의 풍습과 예술, 그리고 에로틱한 소재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작품은 그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환상적인 색조와 형태의 조화로 유명하다.[12]
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에서 열린 2010년 전시회는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그의 창작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그는 전시회에 계속 출품했다. 훗날 북한이 된 곳에서 태어난 실향민으로서 그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20주년을 기념하여 '망향'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 작품은 대한민국 국회 예술회관에서 전시되었다.[13]
4. 평가 및 영향
김흥수는 추상과 구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조화주의(Harmonism)' 화풍을 창시하여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7년 미국의 추상화 흐름을 접한 후, 추상과 구상을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7] 그의 작품은 구상적인 구조와 추상적인 형태를 결합한 조화주의 회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는 음양, 여성과 남성, 동서양의 조화에서 비롯된 사상이다.[9][10]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동서양 철학 융합 사상에 영향을 받아 푸쉬킨 미술관에 초청받기도 했다.[7]
입체파 연구 후 회화에 더욱 몰두했으며, 1960년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모두 판매하고 살롱 작가 칭호를 얻었다. 당시 일본 동료들은 회원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7] 모자이크 기법을 통해 색조 분할을 깨달았으며, 이는 한국의 풍습, 예술, 에로티시즘을 소재로 한 작품에 반영되었다. 그의 그림은 한국에서 시작된 철학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색조와 형태의 조화로 유명하다.[12]
2010년 서울 전시회는 건강 악화로 창작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으나, 계속 전시회에 출품했다. 북한 출신 실향민으로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20주년을 기념하여 '망향'이라는 작품을 대한민국 국회 예술회관에 전시했다.[13]
4. 1.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
김흥수의 작품 세계는 추상과 구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조화주의(Harmonism)'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7년 미국의 추상화 흐름을 접한 후, 추상과 다른 형태를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7] 그의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조화주의 회화로, 하나의 작품 안에 구상적인 구조와 추상적인 형태를 결합한 것이다.[9] 이러한 아이디어는 음양의 조화, 여성과 남성의 조화, 동양과 서양의 조화에서 비롯되었다.[10]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동서양 철학 융합 사상에 영향을 받아 푸쉬킨 미술관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입체파 연구 후 회화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으며, 1960년에는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모두 판매하며 살롱 작가 칭호를 얻었다. 당시 일본 동료들은 회원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7]조화주의의 근본적인 모토는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추상주의의 다양한 사상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든, 모든 사람의 상식이든, 성격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결합하는 것입니다.|조화주의한국어[11]
그는 모자이크 기법을 통해 색조 분할을 깨달았으며, 이는 한국의 풍습, 예술, 에로티시즘을 소재로 한 작품에 반영되었다. 그의 그림은 한국에서 시작된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색조와 형태의 조화로 유명하다.[12]
2010년 서울 전시회는 그의 건강 악화로 창작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으나, 그는 계속 전시회에 출품했다. 북한 출신 실향민으로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20주년을 기념하여 '망향'이라는 작품을 대한민국 국회 예술회관에 전시하기도 했다.[13]
4. 2. 국제적 위상
김흥수의 작품 중 가장 큰 부분은 조화주의 회화로, 하나의 작품 안에 구상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형태를 결합한 것이다.[9] 그의 예술 사상은 음양의 조화, 여성과 남성의 조화, 동양과 서양의 조화에서 비롯되었다.[10] 그의 화풍인 조화주의(Harmonism)의 근본적인 모토는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추상주의의 다양한 사상을 통합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든, 모든 사람의 상식이든, 성격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11]Ftnews Korea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동서양 철학 융합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푸쉬킨 미술관의 초청을 받았다. 입체파를 연구한 후, 그는 회화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1960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모두 팔 수 있었고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후 살롱 작가의 타이틀을 얻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동료들은 회원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7]
그의 작품은 추상화와 형태/구조의 혼합에서 유래한 조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7년 그는 미국의 추상화 흐름을 관찰하여 추상화와 다른 형태를 조화시키는 등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수 있었다.[7] 모자이크에 뿌리를 두고 그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색조의 분할을 깨달았는데, 이는 한국의 풍습과 예술, 그리고 에로틱한 소재를 특징으로 했다. 그의 작품은 그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12]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환상적인 색조와 형태의 협력으로 유명하다.
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에서 열린 2010년 전시회는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그의 창작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그는 전시회에 계속 출품했다. 훗날 북한이 된 곳에서 태어난 실향민으로서 그는 남북한의 유엔 공동 가입 20주년을 기념하여 '망향'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 작품은 대한민국 국회 예술회관에서 전시되었다.[13]
5. 가족
부인 장수현은 2012년 11월 13일 암으로 사망하였다.[15]
6. 출연작
- 1996년 동방제약 징코민
참조
[1]
뉴스
‘한국의 피카소’ 김흥수 화백을 만나다
http://www.mydaily.c[...]
My daily
[2]
뉴스
김흥수 화백 43세 연하 부인 장수현 관장 별세
http://reviewstar.ha[...]
Hankook Ilbo
201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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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의 명화 Korean painting of fame
Park Raeboo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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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Heung s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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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and Korean art
http://www.thecityr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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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Heungsoo art museum
http://misulsegye.co[...]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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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과 양의 조화 하모니즘 창시자 김흥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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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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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s Picasso’ Kim dies at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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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 Herald
2014-06-09
[9]
뉴스
원로화가 김흥수 화백 10~17일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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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hap
2010-10-19
[10]
뉴스
'한국의 피카소' 김흥수 화백, 마지막 개인전
http://www.ajnews.co[...]
Aju Economist
2010-09-19
[11]
뉴스
“남 따라하지 말고 우리 것을 해야지”
http://www.segye.com[...]
Segye Ilbo
2009-09-10
[12]
뉴스
We should accomplish our own ones
http://www.segye.com[...]
Segye Ilbo
2009-09-10
[13]
뉴스
김흥수 화백의 작품, '망향(고향바다)'
http://news.naver.co[...]
Newsis
2011-12-01
[14]
뉴스인용
박은혜, ‘한국의 피카소’ 김흥수 화백을 만나다
https://web.archive.[...]
마이데일리
2009-10-21
[15]
뉴스
김흥수 화백 부인 장수현 관장 별세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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