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도시유키
1. 개요
난부 도시유키는 난부 도시타케의 장남으로, 시로이시 번과 모리오카 번의 지사를 역임했으며, 1884년 백작 작위를 받았다. 1869년 시로이시 번 지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모리오카 번 지사로 전임했다. 1870년 지사직을 사임한 후 화족 난부가의 호주로 남았으며, 금록공채를 받았고, 1884년 화족령에 의해 백작이 되었다. 1903년 사망했으며, 장남 난부 도시카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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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백작 |
|---|---|
| 휘 | 히코타로 (幼名) 고키 (初名) 도시유키 (利恭) |
| 묘소 | 도쿄도분쿄구오쓰카고코쿠지 |
| 가문 | 난부 씨 |
| 관위 | 종5위 하, 가이노카미 종3위 정3위 |
|---|---|
| 섬긴 왕 | 메이지 천황 |
| 옛 봉역 | 이와키국시라이시번 무쓰국모리오카번 |
| 출생 | 1855년 11월 18일 |
|---|---|
| 사망 | 1903년 10월 19일 |
| 아버지 | 난부 도시히사 |
| 어머니 | 와시코 (도쿠가와 나리아키, 미토번 번주의 딸) |
| 배우자 | 정실: 다테 무네나리의 여섯째 딸, 테루 계실: 미조구치 나오히로의 일곱째 딸, 이쿠히메 계계실: 아사노 모치아키라의 딸, 기쿠코 |
| 자녀 | 난부 도시나가 난부 도시준 요코 야스코 |
| 모리오카 번주 (15대) | 1868년 ~ 1868년 |
|---|---|
| 시라이시 번 지사 | 1869년 ~ 1870년 |
| 모리오카 번 지사 | 1870년 ~ 1871년 |
| 난부 종가 당주 (41대) | 1868년 ~ 1903년 |
| 난부 백작가 당주 (1대) | 1884년 ~ 19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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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 모리오카번 사람 -
오시마 타카토
오시마 타카토는 일본 모리오카 출신의 근대 제철 기술자로, 란학 및 채광 기술을 습득하여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를 완성하고 일본 광업계 발전에 기여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로 불린다. -
막말 모리오카번 사람 -
니토베 이나조
니토베 이나조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활동한 일본의 농학자이자 교육자, 외교관, 국제연맹 사무차장으로, 『부시도: 일본의 영혼』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식민지 정책 옹호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모리오카번주 -
난부 시게나오
난부 시게나오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모리오카 번의 2대 번주이며 모리오카성 축성을 완성하고 산킨코타이 지각으로 처벌받았으며 네덜란드 선박 승무원을 심문하기도 했다. -
모리오카번주 -
난부 유키노부
에도 시대 모리오카 번 제5대 번주 난부 유키노부는 가즈노 금산 생산량 감소와 흉년으로 악화된 번 재정을 재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기근 속에서 유교에 심취했으며, 포술과 승마에 능하여 각 분야의 새로운 유파를 창시했다. -
일본의 백작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
일본의 백작 -
오쿠마 시게노부
오쿠마 시게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두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재정 개혁, 철도 건설, 헌법 제정, 와세다 대학 설립 등에 기여했으나, 제국주의적 정책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2. 약력
난부 도시유키는 1848년 제14대 번주 난부 도시타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이름은 히코타로(彦太郎), 처음 이름은 고키(剛毅)였다. 1863년 9월 막부에 장부계를 제출하였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 아버지 도시타케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동조하여 정부에 반역했기 때문에, 정부군에 항복한 후 11월에 관위가 박탈되었고, 12월 7일에 성지 수거되었다.
그러나 12월 17일에는 도시타케의 아들 도시야스에게 이와키 국시로이시 번 13만 석이 하사되어 가명 재흥을 허락받았다. 1903년 10월 9일에 사망했으며, 작위와 가독은 장남 도시카가 상속했다.
2.1. 시로이시 번지사 및 모리오카 번지사
1869년 6월 18일, 판적봉환으로 시로이시 번지사에 취임했다. 같은 해 6월 28일, 종5위하·가이노카미에 서임되었다.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개인 재산인 가록은 현미로 6858석이었다. 같은 해 7월 21일, 구 영지 모리오카로 복귀하여 리쿠추 국 모리오카 번 지사로 전임했다.
1870년 7월 10일 이전에 번 지사를 사임하고 군현 제도로 복귀할 것을 청하는 상표를 제출했고, 같은 날 이 상표가 가납되어 지사에서 면직되었다. 도시야스는 번 지사 사임 후에도 1903년 사망할 때까지 화족 난부가의 호주로 계속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