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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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백우는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기업가이자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자이다. 원산의 부호였으며, 원산일어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기업 활동을 했다. 원산무역주식회사와 북선창고주식회사 지배인, 원산무역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며 지역 유지로 활동했고, 원산청년회 등을 발기했다. 상공회의소 부회두, 원산부 의원,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거쳐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판소리 명창 박록주의 첫 남편으로도 알려져 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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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 남씨 - 남덕우
남덕우는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하고 제14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 의령 남씨 - 남경필
남경필은 5선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한나라당 내 개혁 세력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주요 당직을 거쳤고,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정책을 추진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 한상룡
이완용의 외조카이자 친일파 집안 출신인 한상룡은 한성은행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조선총독부의 지원하에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다. - 일제강점기의 기업인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일제강점기의 기업인 -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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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백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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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본관 | 의령 남씨 |
출생 | 1923년 1월 5일 |
사망 | 2015년 1월 10일 (91세) |
직업 | 기업인 정치인 |
학력 | |
학력 |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대한석탄공사 총재 제8대 국회의원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정책연구실장 민주정의당 중앙집행위원 민주자유당 상임고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김성자 |
자녀 | 4남 1녀 |
상훈 | |
훈장 | 국민훈장 무궁화장 |
2. 생애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원산에서 이름난 부호였다. 원산일어학교를 거쳐 1912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중국의 베이징과 난징 등을 여행하다가 1916년에 귀국하여 고향 원산에서 기업가로 일했다.
1921년부터 원산무역주식회사와 북선창고주식회사 지배인을 맡았으며, 원산무역주식회사 이사, 주식회사 흥업사 감사, 주식회사 원산관 감사 등을 지냈다. 원산의 지주이자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로, 원산청년회, 원산시영회, 원산시민협회와 같은 단체들을 발기했다.
상공회의소 부회두를 시작으로 원산부 의원과 함경남도 도의원을 지내는 등 공직자로 일하다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1941년에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는 평의원으로 가담했다.[1]
판소리 명창 박록주의 첫 남편으로도 알려져 있다.[2] 1920년 경 원산의 명창대회에 나갔다가 20년 이상 연상인 남백우와 만나 그의 소실이 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기업 활동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부호였던 남백우는 원산일어학교를 거쳐 1912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중국의 베이징과 난징 등을 여행하다가 1916년에 귀국하여 고향 원산에서 기업가로 일했다.[1]1921년부터 원산무역주식회사와 북선창고주식회사 지배인을 맡았으며, 원산무역주식회사 이사, 주식회사 흥업사 감사역, 주식회사 원산관 감사역 등을 역임했다. 원산의 지주이자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로도 활동하며 원산청년회, 원산시영회, 원산시민협회와 같은 단체들을 발기했다.[1]
2. 2. 지역 유지 활동
1921년부터 원산무역주식회사와 북선창고주식회사 지배인으로 근무했으며, 원산무역주식회사 이사, 주식회사 흥업사 감사, 주식회사 원산관 감사 등을 지냈다.[1] 함경남도 원산의 지주이자 영향력 있는 유지로, 원산청년회, 원산시영회, 원산시민협회와 같은 단체들을 발기했다.[1]2. 3. 정치 활동 및 친일 행적
남백우는 상공회의소 부회두를 시작으로 원산부회 의원, 함경남도 도의원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평의원으로 가담했다.[1]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추원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4. 박록주와의 관계
판소리 명창 박록주의 첫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2] 1920년 경 원산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박록주를 만나 20년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실로 삼았다.3. 평가
남백우는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받고 있다.
3. 1.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남백우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2],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참조
[1]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2]
서적
명창들의 시대
작가정신
200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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