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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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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기붕은 몰락한 왕족 출신으로, 이승만 정권에서 비서,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자유당 창당을 주도하고 사사오입 개헌을 이끌며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권력을 누렸다. 1960년 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실각했고, 아들에 의해 가족과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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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의 이기붕
이름이기붕
한자 이름李起鵬
로마자 표기I Gibung
출생일1896년 12월 20일
출생지괴산군, 충청북도, 조선
사망일1960년 4월 28일
사망지서울, 대한민국
배우자박마리아
부모이낙의(부), 송정현(모)
자녀이강희(딸)
이강석(장남)
이강욱(차남)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본관전주
경력
직업정치인
정당자유당
소속 정당 내 직책대표최고위원 겸 대표전임고문
전직국회의장
국방부 장관
자유당 중앙위원
국민회 중앙총본부 최고위원
인하공과대학교 재단 이사장
학력
학력미국 아이오와 주립 데이버 대학교 철학과 학사
관직
제3대 및 4대 서울특별시장임기 시작: 1949년 6월 6일
임기 종료: 1951년 5월 8일
전임: 윤보선
후임: 김태선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임기 시작: 1951년 5월 7일
임기 종료: 1952년 3월 29일
대통령: 이승만
전임: 신성모
후임: 신태영
국회 의원 선수2
제3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임기 시작: 1954년 6월 9일
임기 종료: 1956년 6월 8일
제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임기 시작: 1956년 6월 9일
임기 종료: 1958년 6월 30일
제4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임기 시작: 1958년 6월 7일
임기 종료: 1960년 4월 28일
기타 정보
서명서명 이미지 없음

2. 이력

1934년 귀국하여 1945년 미군정청 군정 재판장의 통역을 맡았고, 이후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이승만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여 1948년 대통령 비서실장, 1949년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했다.[4]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해임되자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을 창당하고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주도할 정도로 권력을 잡게 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그의 저택은 “서대문 경무대”라고까지 비웃음을 당했다.[4]

1960년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실각하여 경무대(현: 청와대)에 피신했으나, 장남 이강석 (육군 장교로 이승만의 양자가 되었던)에 의해 박마리아 여사와 차남 이강욱과 함께 총살당했다(장남 또한 자결했다). 이기붕 일가의 저택은 일가 자살 후 정부에 환수되었고, 그 자리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건설되었다.

1950년대 초에는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인하공과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4][5]

2. 1. 출생과 유년기

만송(晩松) 이기붕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7대손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13대조에서 끝이 났다. 그의 12대조는 자손들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전성군 이대였다. 그의 증조부 이회정(李會正)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수하에서 활약하다가 임오군란에 연루, 명성황후의 민씨 정권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한성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중퇴하고 선교사통역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주의 데이비드 대학교(현 아이오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뉴욕에서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 발간에 참여했다.[4]

2. 2. 학창 시절

그는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만나 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주시경 외에 최린 등을 은사로 만났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이승만(李承晩)을 만나 알게 되었다. 학생으로는 허정, 김도연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기도 했다.[7] 그러나 보성중학교 재학 당시 그의 가정 환경은 어려워져 경성부를 떠나 경기도 수원 매향교 다리 근처로 이사하여 지내게 되었다. 집안에 식량이 부족하고 양식을 구할 수 없어 생식을 1년간 하기도 했다. 몸이 병약하여 통학이 어려웠던 그의 어려운 환경을 들은 보성중학교 당시 교장 최린(崔麟)의 주선으로 동창 김찬(金燦)이 자신의 집에서 하숙하도록 도와주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다시 친구인 최승만의 집으로 옮겨가서 중학교를 마쳤다. 또한 최린은 그에게 몸이 약한 사람은 생식을 하면 위험하다며 생식을 그만두게 하였다.[7]

체력이 약했던 그는 운동회에 상을 타는 것을 부러워하여 매일 새벽에 남산을 뛰어갔다가 오는 연습을 4개월간 반복하여 하다가 운동회에 500m 경주에서 2등으로 입상하기도 했다. 보성중학교 재학 중 사생대회에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한글번역본 책표지의 장발장 그림을 모사하여 출품하고 제목을 귀향노인이라는 이름으로 제출하였다. 당시 최남선은 어느 잡지에 보성중학교의 이군의 귀향노인이라는 작품은 장발장을 연상케 한다는 논평을 낸 것을 이기붕은 후일 우연히 발견하였다. 보성중학교의 이사장이었던 손병희는 직접 학생들에게 여비를 주고 도보여행으로 경상북도 경주시까지 수학여행을 갔다. 그러나 그의 체력이 병약하여 학교 이사장인 손병희는 그를 경주여행에 데려가는 것을 주저하였으나 울면서 애걸하여 경주에 같이 가게 되었다. 대구까지 기차로 여행한 뒤 대구에서 내려 경주까지 도보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키가 크고 나이 많은 학생들은 발이 붓고 터지고 병이 나고 하였다. 안데리고 가겠다는 것을 떼를 써서 가게 된 그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고 따라갔다고 한다. 이후 중학교를 졸업했고 1915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입학한다.[7] 중학교 졸업 직후 중국인 교회에 다녔고, 남궁억과 함께 교회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고, 악기 연주도 하였다. 중학교 졸업 직후 일시적으로 서양인의 통역으로 취직하기도 했다.[7]

2. 3. 도미 유학과 귀국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18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중퇴 후 막일을 전전하던 중, J.R.무스 선교사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통역 당시 성경 번역에 쓰던 훈민정음체를 사용하지 않고, 주시경의 한글체(현대한글체)를 사용한 것이 문제되어 무스 선교사와 갈등하였고, 결국 무스와 싸운 뒤 통역을 그만두었다.

그 후 미국 유학을 결심, 도미하였다. 옷이 없던 그는 당시 중앙학교에 근무하던 은사인 남상협(南相協)에게서 입던 헌 양복을 빌려입고 출국했으며, 그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미하였다. 길을 잘못 찾아 상하이로 건너갔던 그는 미국으로 가는 길을 몰라 상하이로 온 백낙춘을 만났다.

백낙춘은 그에게 배삯을 주는 대신 미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조건을 달았다. 그에게 미국으로 인도하는 조건으로 여비를 부담하였다. 배가 일본 요코하마를 경유, 당시 한국인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일본경찰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중국인 승객들이 노름하는 곳에 끼어 위기를 모면하고 백낙준과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삯이 없어 한국인 교포의 주선으로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남부 캘리포니아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LA근교 헌팅턴의 호텔에 종업원으로 취직하였다.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하였고, 스스로 고학과 노동으로 학비를 조달했으며 1923년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를 졸업을 했다.[7] 데이버 대학 졸업 직후 뉴욕으로 건너가서 노동을 하였다.

뉴욕에서 노동을 하던 중 크리스마스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뉴욕에 모여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를 할 때, 성탄절 기념 연극 '동방박사와 세사람'의 남자 주인공을 맡게 되었다. 같은 연극의 여자 주인공을 맡게 된 유학생 박마리아를 알게 되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미국에서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고, 이승만동지회에 가담, 장덕수·윤치영·허정과 함께 '삼일신문'을 발간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다. 허정이 귀국하면서 그는 삼일신보를 인수, 운영하였으나 곧 경영난과 재정난으로 문닫게 되었다. 귀국후 허정과 다시 광산업을 동업하였다.

부인 박마리아 (이화여전 시절)


이후 주시경에게서 배운 필적이 문제되어 한때 일경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다. 박마리아이화여자대학교[8]에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1934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1934.12.15(토)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일로 장모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아내 박마리아를 통해 어렵게 결혼 승락을 얻어냈다.

2. 4. 일제 강점기 후반

1934년 귀국 후 이기붕은 북촌에서 가회상회를 운영했지만 실패했고,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 지배인을 지냈다. 부인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이강석, 이강희, 이강욱을 두었으나, 장녀 이강희는 이화여자중학교 재학 중 사망하여 두 아들만 남았다.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 사무소, 허정과 광산 경영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9]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창씨개명 령에도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광산업과 상점 경영에 몰두하였다. 1945년 초 일제의 반체제 인사 숙청 정보를 입수하고 도봉산으로 은신, 숨어 지내다가 8월 광복을 맞았다.[9]

2. 5. 정치 활동

몰락왕족 출신으로 8·15 광복 이후 이승만의 비서,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 시장, 국회의장직을 역임하였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 창당을 주도하였고, 1951년 김성수 등 한민당을 야당으로 이승만자유당 조직을 결성할 때 신당의 중앙위 의장에 추대되어 당의 실권을 잡았다. 1954년에는 국회의장이 됨과 동시에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후계자로 경무대로 보내면서 이승만의 뒤를 이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고, 그의 거처는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쥐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초기에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인민군서울을 점령한 상황에 은신해 있다가 대전으로 내려왔다. 한국전 중이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방장관 신성모를 몰아내면서 1951년 5월부터 1952년 3월까지 제3대 국방부 장관을 지내어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하였다.[7]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를 엄격히 처벌하려다가 다른 이승만의 측근들로부터 '이승만 반대 세력의 앞잡이로 김모 등을 죽이려 한다'는 모함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승만이 듣지 않아 위기를 모면하였다.

1957년에는 자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승만양녕대군의 15대손이고, 이강석효령대군의 17대 손이므로 손자 항렬인즉 서로 촌수가 맞지 않으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했다.[16]

1957년 가을 장택상, 민주당의 장면 등과 선거법 협상을 벌여 후보난립을 막기 위해 출마자의 기탁금제를 신설(40만환)하고 선거비용 제한, 선거관계자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법을 대폭 손질하고 의석(선거구)도 203개에서 233개로 늘렸다.[17]

서대문구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선거구를 옮긴 이기붕은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의장에도 재선되었다. 자신의 정치적 텃밭을 이기붕에게 빼앗긴 이정재는 이로 인하여 이기붕의 곁에서 떠나 한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민주당 후보 연윤희는 당과 사전에 협의도 없이 느닷없이 입후보를 사퇴한 후 잠적했다가 5일 만에 국회기자실에 나타나 "이기붕 씨와의 대결에서 승산이 없기 때문에 사퇴했다."고 말했다.[18] 1958년 11월 순국선열추념회 회장이 되었다.[19]

2. 5. 1. 이승만의 비서

1934년 귀국하여 1945년 미군정청 군정 재판장의 통역을 맡았고, 이후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이승만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여 1948년 대통령 비서실장, 1949년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했다.[4]

2. 5. 2. 해방 정국의 활동

1945년 9월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었다. 군정청 통역관 당시 급료를 초콜릿과 캔디로 받았다. 10월 12일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그는 이승만의 첫 사저인 돈암장에서 이승만비서직으로 지내게 되는데, 이는 과거 이승만과 인연을 가진 것 덕분이었다.[4] 이승만의 비서로 있던 중, 그의 다른 비서인 윤치영과는 경쟁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1946년 3월 26일, 이승만 생일을 맞아 돈암장에서 측근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이승만 부부. 사진 왼쪽 넥타이를 매고 서있는 사람이 이기붕이다.


이승만과 돈암장의 비서로 활동하던 그는 좌우합작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승만과 하지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중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별다른 지원 없이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그는 집이 있는 북아현동에서 이승만의 사저가 있는 돈암동과 마포장으로 걸어서 출퇴근하였다.

2. 5. 3. 정부 수립 초기

1934년에 귀국하여 1945년 미군정 군정 재판장의 통역을 맡았고, 이후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이승만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였다.[4] 프란체스카 도너와 친밀해진 박마리아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급속히 순조로운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9] 이후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를 부담스러워하던 프란체스카 도너가 이은혜를 멀리하고 이승만의 또 다른 측근인 임영신을 돈암장에 출입금지시키면서 그의 아내 박마리아프란체스카 도너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이후 윤치영, 임영신 등이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곁에서 멀어지자 그가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맡게 되었다.

그 일련의 수직상승 뒤에서 작용한 부인 박마리아의 절묘한 권모술수는 한국 사회에서 화제거리가 되었다.[9] 1946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조선적십자사 이사를 지냈다.

이승만의 비서로 있을 때 방문자가 주고 간 고급 양식기에 음식을 담았다가 이승만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이승만은 비서들에게 값싼 질그릇에 음식을 담을 것을 지시하였으나 고급 양식기에 음식을 담았다. 한 번은 이승만에게 '고급 양식기는 두었다 무엇 하려고 안 쓰고 싼 그릇을 또 쓰시라고 하십니까?'라고 질문했다가 이승만으로부터 질책을 당하였다.

1948년 5월 병원 입원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이승만의 비서실장 직을 내놓았다.[10] 이후 8월 22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고, 1949년 6월부터 8월까지 윤보선의 뒤를 이어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1949년 8월부터 1951년 5월 8일까지 다시 서울특별시장에 재선되었다.

2. 5. 4. 자유당 활동과 국회의장

1951년 12월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였다.[7]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 장택상, 전진한, 박용만 등과 정당 창당 작업에 착수, 이범석 등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자유당 창당 초기, 부당수에 피선된 원외자유당의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놓였다. 그러나 부당수 이범석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승만과, 이승만의 곁에서 이범석, 윤치영 등 강경파를 분리시키려는 미국의 움직임 등에 의해 이범석이 평당원으로 격하당하면서 그는 자유당의 2인자로 부상하였다.

1953년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세력을 축출하였고, 1954년 6월부터 1960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민의원의장에 당선되었다.[7] 1955년부터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초대 의원에 피선되었다. 그는 권력의 '제2인자'로 등극하였고, 1954년에는 이승만의 대통령 장기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여 가결시켰다. 그러나 이는 그가 지시했다기보다 그의 하수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1954년 11월 자유당이승만의 3선을 확정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때, 이기붕은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는 김영삼, 김철안, 김상도 등 4명의 경무대 방문자를 이승만에게 인도했다. 이때 김영삼이승만 앞에서 3선개헌은 안되며 이번으로 끝나야 한다는 의견을 즉석에서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11] 3선 개헌 소식이 보도될 때 다시 경무대를 방문한 김영삼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國父)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12] 그때 이승만은 80대였는데 불쾌해하며 손을 떨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별말 없이 뒷문으로 나가버렸다.[12] 후에 이기붕은 김영삼을 찾아가 화를 내며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노인을 화나게 하느냐?"고 나무랐다고 한다.[12]

제1공화국 후반기 이기붕의 권력은 막강했다. 혁명 직전까지 이기붕을 찬양하는 내용의 서적이 자주 출간되었는데, 그 중 '민족의 해와 달'이란 책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민족의 해'는 대통령 이승만을, '민족의 달'은 이기붕을 지칭한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전기와 사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처럼 이기붕은 제1공화국에서 막강한 영향력과 권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13]

2. 5. 5. 부통령 낙선

1956년 5월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하여 낙선하였다. 장택상, 윤치영, 이윤영 등 친여 정치인들이 이기붕의 권력 장악에 반발하여 대통령 후보 없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여당 성향의 표가 분산된 결과였다.[15] 같은 해 민의원의장에 재선되었다. 1960년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다시 출마한다.

2. 5. 6. 장면과의 갈등

그는 매우 병약했으나 권력욕이 강해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과 연계하여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웠다.[15]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배하였다. 이기붕의 권력 장악에 반발한 장택상, 윤치영 등 친여 정치인들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여당 성향의 표가 분산된 결과였다.[15]

3대 부통령 선거 이후 9·28 장면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의 측근이었다가 민주당으로 간 장면 역시 적으로 만들었다. 1956년 11월 이기붕은 피격 후 입원 중인 장면에게 병문안을 갔는데, 장면은 9·28 사건의 배후를 이기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장면1956년 9월 28일에 일어난 자신의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이기붕을 지목했고, 1960년 재수사 결과 이기붕의 측근들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 5. 7. 몰락과 죽음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에 실시한 1960년 정부통령 선거로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임이 밝혀지면서 사퇴하였다. 해외로 도주하려던 그해 4월 28일 아들 이강석에 의해 권총으로 살해되었다.[9]

장면1956년 9월 28일에 일어난 자신의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이기붕을 지목했고, 1960년 재수사 결과 이기붕의 측근들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59년 이윤영은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1억을 보낼테니 사퇴하고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이를 거절하였다.[22]

1960년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24],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4월 28일 새벽,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진 이기붕은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했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몰락하였다.

3. 사후

1960년 4월 28일 사망하였다. 이기붕과 일가의 시신은 비서들에 의해 수습되어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에는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허정 등 내각 인사, 여야 국회의원 일부가 참여하였고, 장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먼저 죽은 딸 이강희의 묘 근처에 이기붕 내외의 묘, 아들 이강욱, 이강석의 묘를 그 아래에 조성하였고, 이강희의 묘소는 옆에 조성되었다.

이기붕 내외가 살던 집은 제2공화국 당시 국가에 환수되어 집터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건립되었다.

4. 평가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12]

5. 가족 관계

구 분내용
증조부이회정(李會正)
증조모의령 남씨 (남영교(南泳敎)의 딸)
종조부이덕우(李悳宇, 1842년 ~ 1905년)
조부이석우(李錫宇, 1853년 12월 21일 ~ 1881년 11월 23일)
조모백천 조씨 (1849년 8월 29일 ~ 1911년경?, 조용재(趙容在)의 딸)
백부이순의(李淳儀, 1872년경? ~ 1908년경?)
백모청주 한씨 (1868년경? ~ 1936년경?, 한하주(韓夏周)의 딸)
생부이낙의(李洛儀, 1876년 4월 25일 ~ 1904년경?)
생모송정현(1875년 8월 7일 ~ 1946년경?, 송규원(宋圭元)의 딸)
부인박마리아(朴瑪利亞, 1906년 7월 19일 ~ 1960년 4월 28일)
장녀(친맏딸)이강희(李康姬, 1935년 12월 19일 ~ 1949년 5월 31일) (요절)
장남(친장자)이강석(李康石, 1937년 2월 5일 ~ 1960년 4월 28일)
양자(양차자)이강복(李康福, 1937년 6월 11일 ~ )
차남(친차자)이강욱(李康郁, 1940년 5월 26일 ~ 1960년 4월 28일)
외할아버지송규원(宋圭元)
기타 친인척


참고:


  • 양자 이강복의 생부 이기호(李起虎, 1905년~1971년)는 이기붕의 친가 10촌 남동생이다.

6.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선 여부비고
1954년제3대 총선자유당12,923표 (58.63%)1위당선초선
1956년제3대 대선자유당3,805,502표 (44.0%)2위낙선
1958년제4대 총선자유당무투표당선재선
1960년제4대 대선자유당8,337,059표 (79.2%)1위당선무효


참조

[1] 서적 Korea: A History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1971
[2] 서적 Korean Politics: The Quest for Democratization and Economic Development https://archive.org/[...]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3] 웹사이트 崩れ去った独裁政治 http://wx08.wadax.ne[...] 中日映画社
[4] 웹사이트 이기붕(李起鵬) https://encykorea.ak[...] 2023-08-14
[5]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7-22
[6] 뉴스 “회개치 않은 교회… 그래서 4·19는 미완의 혁명” http://www.christian[...] 크리스천투데이
[7] 웹사이트 iMBC.com, More Click Better Life! http://www.imbc.com/[...]
[8] 기타
[9] 서적 찢겨진 산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출판 1986
[10] 기타
[11] 서적 김대중과 김영삼 일월서각 1985
[12] 뉴스 YS 단독인터뷰-"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 http://www.sisaon.co[...] 시사온 2009-10-24
[13] 웹사이트 민족의 해와 달 http://www.bookhunte[...] 2010-02-08
[14] 뉴스 중대서 학위 수여 대통령부인등 육명 경향신문 1955-11-07
[15] 기타
[16] 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17] 간행물 자유공론 한국자유총연맹 2008-05
[18] 서적 한국정당정치 실록 지와사랑 2001-01-01
[19] 뉴스 동아일보 1958-11-15
[20] 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99
[21] 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99
[22]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사초 1984
[23] 서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24] 기타
[25] 기타
[26] 뉴스 李起鵬의 養子 決定 李起虎氏 次男 동아일보 1962-04-10
[27] 기타
[2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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