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치오
1. 개요
니치오는 1565년 교토에서 태어난 불교 승려로, 불수불시의(不受不施義)를 주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했다. 1595년 호코지 대불 천승공양 참석을 거부하고 묘카쿠지를 떠났으며, 1599년 오사카 논쟁으로 쓰시마로 유배되었다. 23년간 유배 생활 후 사면되어 불수불시파의 포교가 허용되었으나, 1630년 수포시파와의 대립 중 사망했다. 사후 신치 대론에서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유골까지 유배되었다. 저서로 『수호정의론』, 『금단방시론』, 『종의제법론』 등이 있다.
-
법화계 불교도 -
기타 잇키
기타 잇키는 일본 제국 헌법의 천황제를 비판하고 군사혁명을 통한 국가 개조를 주장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그의 사상은 2·26 사건에 영향을 미쳤으며, 진보적인 면모와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지녔다는 평가를 받으며 2·26사건 연루 혐의로 사형당했다. -
법화계 불교도 -
미야자와 겐지
이와테현 출신의 일본 시인이자 소설가, 동화 작가, 농업기술 지도자인 미야자와 겐지는 불교적 신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헌신이 담긴 작품들을 남겼으며 사후 재평가를 통해 일본 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았다. -
쓰시마 후추번 사람 -
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는 1668년에 태어나 1755년에 사망한 일본의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쓰시마 번에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며 조선어와 주자학을 배우고 《교린수지》를 저술하여 성신을 강조하며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보였다. -
쓰시마 후추번 사람 -
소메자키 노부후사
소메자키 노부후사는 일본의 게사쿠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다메나가 슌스이의 제자였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언론 활동을 시작하여 《근세기문》을 저술하고 《조선국세견전도》를 제작했다. -
에도 시대의 승려 -
요시히메
요시히메는 모가미 요시미쓰의 여동생이자 다테 마사무네의 어머니로, 정략 결혼을 통해 다테 가문과 모가미 가문의 관계를 유지하고 가문 내외의 분쟁 해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
에도 시대의 승려 -
고다이인
고다이인은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으로, 그의 출세를 돕고 조정과의 교섭을 담당했으며, 사후에는 고다이지를 건립하여 여생을 보내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2. 생애
1565년 교토의 기모노 상인 쓰지 후지베의 아들로 태어나, 1574년부터 묘가쿠지(妙覚寺)의 닛덴(日典)을 스승으로 불법을 배웠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최한 호코지 대불전 천승공양회에 대한 출사 여부를 두고 수불시파(受不施派)와 대립했고, '불수불시'(不受不施)를 주장하며 묘카쿠지를 떠났다. 159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양회 참석 요청도 거절하고 오사카 논쟁으로 쓰시마에 유배되어 23년간 생활했다. 1623년 사면되었으나, 1630년 수포시파(受布施派)와 불수포시파(不受不施派)의 대립이 재연되는 와중에 입적하였다. 같은 해 에도 성에서 벌어진 대론(신치 대론) 결과, 막부에 반대하는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 쓰시마 유배가 결정되었고, 사망 후 그의 유골까지 유배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공양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을 통일한 자신의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종교집단이 있다는 것이었고, 이는 사회 불안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에도 막부로부터 금지된 불수불시파는 겉으로는 니치렌종이나 천태종, 선종을 믿는 척 가장하며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고, 이들에 대한 탄압이 해제된 것은 1876년으로, 가쿠레키리시탄에 대한 금교령이 해제되고도 3년 뒤의 일이었다.
2.1. 초기 생애와 출가
1565년 7월 5일(에이로쿠 8년 6월 8일) 교토의 기모노 상인 쓰지 후지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4년(덴쇼 2년)부터 묘가쿠지(妙覚寺)의 닛덴(日典)을 스승으로 불법을 배웠다.
2.2. 불수불시 논쟁과 유배
1595년(분로쿠 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최한 호코지 대불전 천승공양회에 대한 출사 여부를 두고 혼만지(本満寺)의 닛추(日重) 등 수불시파(受不施派)와 대립했다. 니치오는 "불교도라 하여도 같은 니치렌종의 신도가 아니면, 상대가 설령 왕이라고 해도 그로부터는 시주나 공양을 받지도 설법을 베풀지도 않는다"는 불수불시의(不受不施義)를 주장하며 묘카쿠지를 떠나 단바 국 고이즈미에 은거했다.
1599년(게이초 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공양회 참석을 요청했으나, 니치오는 이에야스가 니치렌종 신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수불시'를 내세워 참석하지 않았다. 오사카 논쟁으로 쓰시마에 유배되어 23년간 그곳에서 생활했다. 1623년(겐나 9년) 사면되어 불수불시파 전파가 허용되었다.
2.3. 신치 대론과 죽음
1630년(간에이 7년), 수포시파(受布施派)와 불수포시파(不受不施派)의 대립이 재연되었고, 이 와중에 닛코는 입적하였다. 같은 해 4월 양측은 에도 성에서 대론(신치 대론)을 벌였다. 그 결과 닛코는 막부에 반대하는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금 쓰시마 유배가 결정되었다. 닛코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골까지 유배된 것으로 알려졌다.
3. 사상과 영향
닛코는 불수불시(不受不施)의 원칙, 즉 니치렌종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는 공양이나 시주를 받지 않고, 그들에게 설법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 닛코는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최한 호코지 대불전 천승공양회에 이 원칙을 내세워 출사를 거부하고 묘카쿠지를 떠났다. 게이초 4년(1599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양회 참석 요청에도 같은 이유로 거절하여 쓰시마에 유배되었다.
겐나 9년(1623년) 사면되어 불수불시파 전파가 허용되었으나, 간에이 7년(1630년) 수포시파(受布施派)와의 대립이 재연되면서 닛코는 사망했다. 같은 해 에도 막부는 양측의 대론(신치 대론)을 열었으나, 닛코는 막부에 반대하는 불수불시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 쓰시마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미 사망한 닛코의 유골까지 유배된 것으로 알려졌다.
에도 막부는 닛코의 불수불시파를 사회 불안 요인으로 간주하고 탄압했다. 이는 종교 집단이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불수불시파는 겉으로는 니치렌종, 천태종, 선종 등을 믿는 척하며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76년(메이지 9년) 가쿠레키리시탄에 대한 금교령이 해제되고 3년 뒤, 불수불시파에 대한 탄압도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