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레키리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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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은 17세기부터 19세기 일본에서 기독교 박해를 피해 신앙을 숨기고 지낸 가톨릭 신자들을 지칭한다.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선교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불교, 신토 등 일본 전통 종교와 융합된 독자적인 신앙 형태를 발전시켰으며, 마리아 관음상과 같은 독특한 신앙 방식을 보였다. 1865년 오우라 천주당에서 가쿠레키리시탄이 발견된 후, 1873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많은 수가 가톨릭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하나레키리시탄으로 남았다. 가쿠레키리시탄은 현재 일본의 역사, 문화, 예술 분야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관련 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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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쿠레키리시탄 | |
|---|---|
| 개요 | |
![]() | |
| 다른 이름 | 가쿠레 키리시탄, 센푸쿠 키리시탄 |
| 정의 | 에도 시대(1603~1868) 동안 숨어 지낸 일본 기독교인 |
| 설명 | 기독교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한 사람들. 잠복할 필요가 없어진 현재에도 신앙을 이어가는 신자들은 스스로를 "고(古)키리시탄", "구(旧)키리시탄"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
| 역사적 배경 | |
| 기독교 전래 | 16세기 중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에 의해 일본에 전래 |
| 박해 시작 |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점차 박해가 시작됨 |
| 금교령 | 에도 막부 시대, 철저한 금교령이 내려짐 |
| 신앙 유지 | 탄압을 피해 숨어들어가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 |
| 신앙 형태 | |
| 겉으로는 불교 또는 신토 신자 | 겉으로는 불교 또는 신토 신자인 척함 |
| 비밀스러운 의식 | 비밀스러운 의식과 기도문으로 신앙을 이어감 |
| 독자적인 신앙 형태 | 외부와 단절된 채 독자적인 신앙 형태를 발전시킴 |
| 현재 | |
| 신앙 계승 | 일부 지역에서 신앙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존재 |
| 연구 대상 |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연구 대상 |
| 관련 용어 | |
| 데우스 | '하느님'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Deus에서 유래 |
| 오라쇼 | '기도'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Oratio에서 유래 |
| 미즈카타 | 세례를 주는 사람 |
| 참고 자료 | |
| 관련 서적 | 고조 도시아키: 잠복 기리시탄, 다채로운 모습◇사라져가는 전국의 유물・습속을 조사, 있는 그대로의 삶을 검증◇ |
2. 역사
가쿠레키리시탄은 1600년대 일본의 기독교 금지 및 박해 동안 자신을 숨겼던 일본의 가톨릭 공동체이다.[7][4]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온 후, 기독교 포교가 이루어져 기리시탄이 늘어났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교령에 이어,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1614년 금교령을 발포하여 기독교 신앙을 금지했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막부의 철저한 기독교 금지와 기리시탄 단속이 이루어졌으며, 단계적으로 강화된 쇄국으로 선교사의 입국도 밀입국 외에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가톨릭 신도(기리시탄)와 그 자손들은 겉으로는 불교도로 행동해야 했으며, 1644년 이후 일본 내에 가톨릭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도 은밀히 기독교 신앙을 대대로 이어갔다. 이를 ''''잠복 기리시탄''''이라 부른다.
잠복 기리시탄은 아주 작은 취락 단위로 비밀 조직을 만들어 은밀히 기원문(오라쇼)을 외우며 기도를 계속하고, 자모 관음상을 성모 마리아로 간주하거나(오늘날 그 관음상은 "마리아 관음"이라고 불린다), 성상, 성화, 메달, 로사리오, 십자가 등의 성구를 비장하여 "납도 신"으로 모시는 등 신앙을 지켜나갔다.
불교의 신인 관음을 모델로 한 마리아 묘사가 가쿠레 키리시탄 사이에서 흔해졌으며, "마리아 관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기도문은 불교식 염불처럼 들리도록 각색되었지만, 라틴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에서 번역되지 않은 많은 단어를 유지했다. 성경 등은 구두로 전해졌다.[1]
잠복 기리시탄은 처음에는 일본 전국에 널리 흩어져 규슈에서 홋카이도(당시 에조지)에 이르기까지 유물이 현존하고 있다.[8] 그러나 나가사키현을 비롯하여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오이타현 우스키 등에서는 기독교 전래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선교사의 지도를 받은 신앙이 널리 스며들었기 때문에 막말까지 많은 신앙 조직이 존속했다.
막말 개국 후 1865년(게이오 원년),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당을 우라카미(현 나가사키시 우라카미) 거주 신자들이 방문하면서("신도 발견") 잠복 기리시탄의 존재가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우라카미 외에도 나가사키현 소토메, 고토 등에서도 신앙을 표명하는 자가 다수 나타났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직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앙을 표명한 신자는 투옥이나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받거나, 전국으로 배류되는 등 대규모 탄압을 받았다.
대정봉환 이후에도 메이지 정부는 에도 막부의 정책을 계승하여 고찰에 의해 금교령을 지속하고(오서의 게시), 신도에 대한 격렬한 탄압을 계속했다. 이는 기독교권의 구미 제국으로부터 비난받았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메이지 6년) 2월 24일, 태정관 포고에 의해 금교의 고찰을 폐지하고,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묵인됨으로써 에도 막부 이래의 "기리시탄 금교령"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 이후에는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중죄에 처해지는 일이 없어지고, 재선교를 위해 온 파리 외방전교회 등에 의해 일부를 제외한 많은 기리시탄들이 기독교 신앙을 표명하고, 가톨릭 교회의 신앙으로 복귀했다.
1873년 일본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여 기독교 신자들의 활동을 합법화했다. 이로써 대부분의 가쿠레키리시탄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이를 거부하고 밀교화된 신앙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하나레키리시탄일본어)이라고 부른다.[7][4]
현재 일본국 헌법 제19조 및 일본국 헌법 제20조에 의해 법적으로도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상 잠복 기리시탄은 존재하지 않는다.
2. 1. 초기 역사 (16세기)
1549년 나바라 왕국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을 전파하였다. 조총과 같은 유럽제 제품들이 일본에 대거 유입되면서 예수회 수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그 결과 16세기 일본에서는 가톨릭에 귀의한 일본인들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들을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일본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590년 일본 전 지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이 예수회와 결탁하여 자신에게 대항할 것을 우려해 다이묘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접촉을 막았고, 기리시탄들의 종교 활동에 제약을 걸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바오로 미키와 같은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다.[8]
2. 2. 에도 막부 시대 (17-19세기)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불교, 신토와의 마찰을 이유로 로마 가톨릭 포교를 금지하며 기리시탄 탄압을 시작했다. 많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었다.[3]도쿠가와 히데타다는 1629년부터 후미에를 실시, 기리시탄을 색출하고 탄압했다. 1639년 기리시탄들은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켰으나 막부군에 진압당하고, 남은 기리시탄들은 학살당했다. 생존자들은 밀교 형식으로 로마 가톨릭 신앙을 이어나갔다.[4]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많은 기리시탄은 불교 관련 물건으로 위장한 기독교 관련 물품을 사용하며 신앙을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원래 가톨릭 교리와는 다른 형태로 신앙이 변질되었다.
불교의 관음을 모델로 한 "마리아 관음"상이 가쿠레키리시탄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5] 기도문은 불교 염불처럼 바뀌었지만, 라틴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에서 온 단어들이 남아 있었다. 성경 등은 구두로 전해졌다.[1]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온 후, 기독교 포교가 이루어져 기리시탄이 늘어났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교령에 이어,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1614년 금교령을 발포, 기독교 신앙을 금지했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전후부터 막부의 철저한 기독교 금지와 기리시탄 단속이 이루어졌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 말-현재)
1853년 구로후네 사건과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유럽 국가들과의 접촉이 다시 늘어나면서, 숨어 있던 기리시탄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국가신토를 국교로 선포하고 기독교를 탄압했다.[1] 하지만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탄압은 오래가지 못했고, 1873년 일본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여 기독교 신자들의 활동을 합법화했다.이로써 대부분의 가쿠레키리시탄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이를 거부하고 밀교화된 신앙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일본어)이라고 부른다.[7][4] 하나레키리시탄은 1990년대까지 일본에 존속했지만, 1991년 미국의 인류학자 크리스탈 웰런이 나가사키현 고토 섬에서 마지막 존재를 확인한 후, 젊은 층들이 신앙을 버리고 대거 이탈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6]
막말 개국 후 1865년(게이오 원년),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을 우라카미(현 나가사키시 우라카미) 거주 신자들이 방문하면서("신도 발견") 잠복 기리시탄의 존재가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우라카미 외에도 나가사키현의 소토메나 고토 등에서도 신앙을 표명하는 자가 다수 나타났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앙을 표명한 신자는 투옥이나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받거나, 전국으로 배류되는 등 대규모 탄압을 받았다.
대정봉환 이후에도 메이지 정부는 에도 막부의 정책을 계승하여 고찰에 의해 금교령을 지속하고(오서의 게시), 신도에 대한 격렬한 탄압을 계속했다. 이는 기독교권의 구미 제국으로부터 비난받았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메이지 6년) 2월 24일, 태정관 포고에 의해 금교의 고찰을 폐지하고,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묵인됨으로써 에도 막부 이래의 "기리시탄 금교령"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 이후에는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중죄에 처해지는 일이 없어지고, 재선교를 위해 온 파리 외방전교회 등에 의해 일부를 제외한 많은 기리시탄들이 기독교 신앙을 표명하고, 가톨릭 교회의 신앙으로 복귀했다.
현재 일본국 헌법 제19조 및 일본국 헌법 제20조에 의해 법적으로도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상 잠복 기리시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교령 해제 이후에도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은 숨은 기리시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요인이 고려된다.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조상으로부터의 전통 형태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
# 불교, 신도를 은폐 수단으로 삼았지만, 오랜 세월 속에 정신과 생활에 정착하여, 가톨릭으로 부활함으로써 신불상이나 조상의 위패를 버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
#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관습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위장이었던 불교나 신도의 신앙이 강해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사라졌고, 숨은 기리시탄에게 있어서 조상이 전해 온 기독교 기원의 기도나 행사를 끊이지 않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며, 비록 본래의 기독교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되더라도, 계승이야말로 조상에 대한 자손의 책무라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메이지 시대 초기 가톨릭 교회의 선교 당시, 우라카미 4번 붕괴 등 직전에 있었던 격렬한 박해와 차별을 두려워하거나, 당시 가톨릭 교리가 엄격했기 때문에 쉽게 돌아갈 수 없었던 것도 이유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에는 가톨릭과 숨은 기리시탄 사이의 인식 차이도 생겨나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신자 측은 숨은 기리시탄도 가톨릭과 같은 신앙이라고 보고 있지만, 숨은 기리시탄 사람들은 "가톨릭과는 다르다"라고 의식하고 있는 사례가 보인다. 혹은 현대 일본에서 불교나 신도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강한 신앙심이 사라지고 단순한 전통으로서 종교를 계승하고 있을 뿐이며, 숨은 기리시탄 또한 그 예외가 아니며, 그렇기에 굳이 가톨릭으로 복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경우도 있다. 단, 소토미 지구와 같이 같은 지역이나 마을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계승하고 있어도 가톨릭으로 복귀한 자와 숨은 기리시탄의 신앙을 견지한 자가 혼재되어 있는 예가 많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월 15일 일반 알현 연설에서 "일본의 기독교 공동체는 17세기 초에 성직자가 추방되어 한 명의 사제도 남지 않고, 공동체는 비합법 상태로 물러나 은밀히 신앙과 기도를 지켰습니다. 약 250년 후에 선교사가 일본으로 돌아와 수만 명의 기독교 신자가 공적인 장소에 나타나 교회가 다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훌륭합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25]
3. 특징
가쿠레키리시탄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온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개종한 사람들, 즉 기리시탄(キリシタン)에서 유래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교령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614년 금교령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금지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막부는 기독교를 철저히 금지하고 기리시탄을 단속했다. 쇄국 정책으로 선교사 입국도 불가능해졌다.
가톨릭 신도들과 그 후손들은 겉으로는 불교도로 위장했지만, 1644년 이후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비밀리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했다. 이들을 ''잠복 기리시탄''이라 부른다.
잠복 기리시탄은 작은 취락 단위로 비밀 조직을 만들어 오라쇼라는 기도문을 외우고, 자모 관음상을 성모 마리아로 여기거나(오늘날 "마리아 관음"이라 불림), 성화, 메달, 로사리오, 십자가 등을 숨겨서 "납도 신"으로 모시며 신앙을 지켰다. 지역에 따라 신앙 형태는 달랐다.
이들은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널리 퍼져 있었으나, 대부분 사라졌다. 나가사키현,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오이타현 우스키 등에서는 기독교 전래 초기부터 선교사의 지도를 받아 막말까지 많은 신앙 조직이 존속했다.
1865년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당을 우라카미(현 나가사키시 우라카미) 신자들이 방문하면서("신도 발견") 잠복 기리시탄의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나가사키현 소토메, 고토 등에서도 신앙을 밝힌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금지되어 탄압을 받았다.
메이지 정부도 에도 막부의 정책을 계승하여 금교령을 유지하고 탄압을 계속했다. 이는 서구 열강의 비판을 받았고, 1873년 태정관 포고로 금교령이 폐지되면서 기독교가 묵인되었다. 많은 기리시탄들이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다.
현재는 일본국 헌법 제19조 및 일본국 헌법 제20조에 의해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잠복 기리시탄은 존재하지 않는다.
3. 1. 신앙 형태
가쿠레키리시탄은 1873년에 공식적으로 신앙이 인정받기 전까지 로마 교황과의 연락이 불가능했고,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막부의 탄압이나 사회적 매장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교 신자로 위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 관음상으로,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제작된 상이나, 전반적인 형태는 불교의 관세음보살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기독교와 관련하여 구전되던 내용을 문서화하고자 불교 경전과 유사한 형태의 경전을 제작하기도 했고,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해서 염불과 유사한 형태로 읽는 독특한 기도문인 오라쇼(oratiola)를 암송하는 등, 불교와 유사한 형태로 전례가 바뀌었다.[1]
가쿠레키리시탄 공동체는 조가타(翁方일본어)라는 장로가 이끌었다. 야훼를 데우스님(デウス様|데우스사마일본어)이라고 불렀으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야훼로부터 용서를 받아 원죄에서 벗어났다고 해석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가쿠레 키리시탄''이 문장으로 채택한 기온 신사의 문장인 ''기온-마모리''는 두 개의 교차하는 두루마리와 뿔을 묘사한다.[3]
3. 2. 전례 및 조직
가쿠레키리시탄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우고 로마 가톨릭 포교를 금지하면서 시작되었다. 1629년 후미에 실시와 1639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기리시탄들은 밀교 형태로 신앙을 이어갔다. 이들은 불교 물건으로 위장한 기독교 관련 물품을 사용하고 구전으로 신앙을 전승하며, 본래의 가톨릭 교리와는 다른 형태로 신앙이 변질되었다.[1]초기 가쿠레키리시탄은 가톨릭의 모습을 유지했으나, 1873년 신앙이 인정받기 전까지 교황과의 연락이 불가능했고, 막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불교 신자로 위장했다. 마리아 관음상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면서도 불교의 관세음보살과 유사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기독교 관련 내용을 불교 경전처럼 만들거나,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한 오라쇼(oratiola)를 염불처럼 암송하는 등 불교와 유사한 형태로 전례가 변화했다.[1] 성직자 초빙이 불가능했기에, 조가타(翁方일본어)라는 장로가 공동체를 이끌었다. 가쿠레키리시탄은 야훼를 데우스님(デウス様|데우스사마일본어)이라 불렀고, 아담과 하와가 용서받아 원죄에서 벗어났다고 해석했다.
가쿠레 키리시탄은 불교의 신인 관세음보살을 모델로 한 마리아 묘사인 "마리아 관음"을 사용했다.[5] 기도문은 불교 염불처럼 각색되었지만, 라틴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에서 번역되지 않은 단어들이 유지되었다. 성경 등은 구두로 전해졌다.[1]
4. 교의의 변용
일부 가쿠레키리시탄의 신화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후 신에게 용서를 구하자 신이 이를 들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구약성서의 의의 신과는 명백히 이질적인 것으로, 서방 기독교(라틴 교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원죄 관념이 소멸된 것이다.
5. 현대 사회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기독교 금지령을 철회한 이후, 많은 가쿠레키리시탄들이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지만, 일부는 이전의 신앙 형태를 유지하며 '하나레키리시탄'(離れキリシタン|하나레키리시탄일본어)으로 남았다.[1][7] 현재 하나레키리시탄은 주로 우라카미와 고토 열도 지역에서 발견된다.[2]
1990년대 초, 인류학자 크리스탈 윌란은 고토 열도에서 여전히 하나레키리시탄이 살고 있음을 발견했다. 당시 90세가 넘은 사제 두 명이 있었고, 몇몇 평신도들도 노년에 이르렀다. 이들은 강력한 비밀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윌란의 다큐멘터리 ''오타이야'' 촬영에 동의했다.[6]
오늘날에도 가쿠레키리시탄은 존재하며, 16세기 중반 가톨릭 선교사들이 전파한 원래의 신앙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변화했다.[7]
금교령이 해제된 이후에도 가쿠레키리시탄이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거론된다.[22]
-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형태를 유지하려는 경향
- 불교와 신토가 오랜 세월 동안 정신과 생활에 정착하여, 가톨릭으로 복귀하면서 신불상이나 조상의 위패를 버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
-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관습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월 15일 연설에서 17세기 초 성직자 추방 이후에도 신앙을 지켜온 일본 기독교 공동체의 강한 공동체 정신을 언급하며, 이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25][26]
고소 토시아키(성심여자대학 학장)가 『잠복 키리시탄 도보』를 영일 대역으로 간행했을 때,[28][29][30]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안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8]
가쿠레키리시탄의 일반적인 영어 번역은 "Hidden Christians"이다. 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서신과 나가사키의 교회군과 기독교 관련 유산의 세계 유산 등재 활동 과정에서 사용되었다.
가쿠레키리시탄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오시마 미치루: 교향곡 『어송』, 남성 합창곡 『어송』
- 치하라 히데키: 『오라쇼』, 『도치리 키리시탄』, 『키리시탄 천지 시지노코토』
- 오기쿠보 가즈아키: 미사곡 제2번 『오라쇼』, 『파라이조/오라쇼』
- 키노시타 마키코: 『사교문비곡』
- 이와카와 사부로: 『십자가(쿠루스)의 섬』
- 후지와라 요시히사: 『마리아 관음』
- 이토 야스히데: 교향시 『구루리요자』
- 후지타 겐바: 『키리시탄의 시대』
- 레키시: 『가쿠레 키리시탄고』
- 침묵 (엔도 슈사쿠)
- 여자의 일생 (엔도 슈사쿠)
- 푸른 하늘 - 막부 말기 키리시탄 유족전 (에비사와 야스히사)
- 기담 (유카와 와타루, 모로호시 다이지로)
- 수호 (하하키기 호세이)
- 생명의 나무 (모로호시 다이지로)
- 침묵 -사일런스-
- 기담
- 도쿠가와 여형벌 그림 두루마리 소가죽 찢기 형
- 피에타 ~행복의 푸른 새~
6. 각 지역의 자료 및 유물
가쿠레키리시탄 관련 유물은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으며, 홋카이도에서 규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지역 | 주요 유물 및 유적 |
|---|---|
| 홋카이도 | 마쓰마에정 위령비, 호쿠토시 가미이소 정교회 노자키 묘지 |
| 도호쿠 | 이와테현이치노세키시 오오고 기리시탄 순교 공원, 시와정 박목금산 묘석 및 마리아 관음, 후쿠시마현고리야마시 여보사 묘 |
| 주부 | 나가노현 기소 계곡 일대 마리아상, 아이치현나고야시 에이코쿠사 기리시탄 유적 박물관 |
| 긴키 | 오사카부이바라키시 이바라키 시립 기리시탄 유물 사료관, 고베 시립 박물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상, 효고현가사이시 다이니치사 배면 십자가 지장, 라칸사 오백 나한 |
| 주고쿠 | 시마네현쓰와노정 오토메 고개 마리아 성당 |
| 시코쿠 | (정보 없음) |
| 규슈 | 오이타현다케다시 동굴 예배당, 남만인 선교사 거주지, 산티아고의 종, 후쿠오카현 미이군다치아라이마치 이마무라 천주당, 구마모토현아마쿠사시 산타마리아관, 미야자키현노베오카시 크리스찬 묘, 나가사키현 소토메 지구(구로사키, 데즈), 고토 열도(나루섬, 후쿠에섬, 나카도리섬), 히라도섬, 이키츠키섬 일대 |
- 홋카이도: 에조치(현 홋카이도)에는 쓰가루 번의 탄압을 피해 온 기리시탄들이 금광에서 일했으며, 마쓰마에 번에 의해 처형된 이들의 위령비가 마쓰마에 정에 남아있다. 호쿠토시에는 '가미이소 정교회 노자키 묘지'라는 가쿠레키리시탄 묘지가 있다.
- 도호쿠 지방: 이와테현이치노세키시 오오고 지역은 가쿠레키리시탄 마을로, 순교 공원과 자료관이 조성되어 있다. 시와정 박목금산에는 십자가 무늬 묘석과 마리아 관음상이 남아있다. 후쿠시마현고리야마시 여보사에는 에도 시대 가쿠레키리시탄 묘가 시 지정 중요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주부 지방: 나가노현 기소 계곡을 따라 나카센도 주변에는 가쿠레키리시탄 신앙의 흔적이 남아있다. 시오지리시 나라이다이의 다이호사에는 목이 잘린 마리아 지장상이, 기소마치 니치기에는 접이식 마리아상이, 오쿠와무라 묘카쿠지에는 천수관음 모습을 한 마리아 관음상이, 덴초인에는 자식 양육 지장보살이라 불리는 마리아 지장이 있다. 아이치현나고야시 에이코쿠사에는 '기리시탄 유적 박물관'이 설치되어 있다.
- 긴키 지방: 오사카부이바라키시 북부 센다이지 지구는 다카야마 우콘의 옛 영지로, 가쿠레키리시탄 가옥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이바라키 시립 기리시탄 유물 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중요문화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상'도 이 지역에서 발견되어 고베 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효고현가사이시 다이니치사에서는 십자가를 새긴 돌(배면 십자가 지장)이 발견되었고, 라칸사 오백 나한 중 일부는 가쿠레키리시탄과 관련이 있다는 의견이 있다.
- 주고쿠 지방: 시마네현쓰와노정에는 나가사키에서 연행된 가쿠레키리시탄 순교지에 세워진 '오토메 고개 마리아 성당'이 있다.
- 규슈 지방: 오이타현다케다시에는 가쿠레키리시탄들이 예배를 위해 만든 동굴 예배당과 남만인 선교사 거주지가 있다. 산티아고의 종은 나카가와 신사에 봉납되어 있다. 후쿠오카현 미이군다치아라이마치에는 국가 중요 문화재인 이마무라 천주당이 있다. 구마모토현아마쿠사시에는 산타마리아관이 있다. 미야자키현노베오카시 마츠야마 정에는 '크리스찬 묘'가 있다. 나가사키현에서는 소토메 지구(구로사키, 데즈)와 고토 열도(나루섬, 후쿠에섬, 나카도리섬), 히라도섬, 이키츠키섬 등에서 가쿠레키리시탄 조직과 신앙 유물이 남아있다. 특히 이키츠키섬에는 가장 많은 가쿠레키리시탄 조직이 남아있으며, 히라도시 이키츠키마치 박물관 '섬의 관'에는 납도신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고, 오라쇼가 CD로 출판되기도 했다.

6. 1. 관련 자료
가쿠레키리시탄 연구와 관련된 자료는 다음과 같다.; 키리시탄 전반
- 야마오리 테츠오, 오사다 토시키, 요네이 리키야, 카와무라 쿠니미츠 외, "일본인은 기독교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공동 연구 보고』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니치분켄 총서: 17〉, 1998년.
- 타카하라 이토시, 요코테 카즈히코, Burke-Gaffney, Brian 『나가사키 구 우라카미 천주당: 1945-58: 잃어버린 피폭 유산』 이와나미 서점, 2010년.
- 고노이 타카시, 『키리시탄의 문화』, 일본역사학회 (편), 요시카와 코분칸〈일본 역사 총서: 67〉, 2012년.
- 토요시마 마사유키, 『키리시탄과 출판』, 야기 서점 고서 출판부, 야기 서점 (발매), 2013년.
- 고노이 타카시, 『시마바라의 난과 키리시탄』, 요시카와 코분칸〈패자의 일본사: 14〉, 2014년.
- 미야자키 켄타로, 『카쿠레키리시탄의 실상: 일본인의 기독교 이해와 수용』, 요시카와 코분칸, 2014년.
- 오하시 유키야스, 『잠복 키리시탄: 에도 시대의 금교 정책과 민중』, 코단샤〈코단샤 선서 메치에: 574〉, 2014년.
- 히로노 신지, 『지워진 신앙: "최후의 카쿠레 키리시탄"--나가사키·이키츠키 섬 사람들』, 쇼가쿠칸, 2018년.
- 히라오카 아키토시 · 스야마 사토시 · 미야우치 히사미츠 (편), 『도설 일본의 섬 - 76개의 매력적인 섬들의 활동 -』, 아사쿠라 서점, 2018년.
- 마츠이 케이스케, "고토 열도 기도 섬의 키리시탄 관광"
; 건축
- 이타쿠라 모토유키 (사진·글), 『쇼와 말기의 나가사키 천주당 순례』, Art Box 인터내셔널, 2014년. ("나루 섬" 외.)
; 음악
- 『숨겨진 크리스천』, 닛폰 포노그램, 1973년.
- 나가사키 필하모니아 합창단, 중세 음악 합창단 (연주), 『서양 음악 시초』, Toshiba Records, Toshiba-EMI (발매), 19--년.
- 녹음 CD로 개정, 나가사키 필하모니아 합창단, 중세 음악 합창단 (연주), 『서양 음악 시초』, Yamano Music, 1998년.
- CD 1. 사카라멘타 요약: 나가사키 판, 1605년(게이초 10년) = Cantus Gregorianus e "Manuale ad Sacramenta": Nangasaquij, 1605
- CD 2. 숨겨진 키리시탄의 오라쇼: 나가사키현 이키츠키 섬 = Oratio Christianorum occultorum in insula Ikitsuki
- 숨겨진 키리시탄의 노래 오라쇼: 나가사키현 이키츠키 섬 = Oratio Christianorum occultorum in insula Ikitsuki
- Cantus Gregorianus: "Laudate Dominum" -- "Nunc dimittis" -- "O Gloriosa"
- 요코타 쇼이치로, 『키리시탄과 서양 음악』, 삭호쿠샤, 2000년.
- 『Oratio of the Crypto-Christians in Ikitsuki isle』, Fontec, 2000년. (녹음 자료.)
- 미나가와 타츠오, 『서양 음악 도래고 -키리시탄 음악의 영광과 좌절-』, 일본 기독교단 출판국, 2004년.
- 미나가와 타츠오, 『서양 음악 도래고: CD & DVD판』, 일본 전통 문화 진흥 재단 (발매), 2006년. (녹음 자료, 해설서 포함, CD, DVD.)
- 『Oratio, the prayers in Ikitsuki Island』, Seven Seas, King Record〈The world roots music library: 145 East Asia; Japan〉, 2008년. (녹음 자료.)
- "《다단 야스(성모 마리아의 연도)》: 숨겨진 키리시탄의 오라쇼" 『Tokyo Cantat(도쿄 칸타트) 15년, 그 발자취와 소리의 세계』, Nippon Acoustic Records, 2010년. (녹음 자료. 별칭 『Fifteen years of the Tokyo Cantat a quest for sonority of our spirit』.)
- 『나가사키·이키츠키 섬의 오라쇼』, King Record〈세계 종교 음악 라이브러리: 15〉, 2015년. (녹음 자료.)
- 미나가와 타츠오, 『키리시탄 음악 입문 - 서양 음악 도래고로의 안내 -』, 일본 기독교단 출판국, 2017년.
; 문학작품
- 오시마 미치루: 교향곡 『어송』, 남성 합창곡 『어송』
- 치하라 히데키: 『오라쇼』, 『도치리 키리시탄』, 『키리시탄 천지 시지노코토』
- 오기쿠보 가즈아키: 미사곡 제2번 『오라쇼』, 『파라이조/오라쇼』
- 키노시타 마키코: 『사교문비곡』
- 이와카와 사부로: 『십자가(쿠루스)의 섬』
- 후지와라 요시히사: 『마리아 관음』
- 이토 야스히데: 교향시 『구루리요자』
- 후지타 겐바: 『키리시탄의 시대』
- 레키시: 『가쿠레 키리시탄고』
- 침묵(엔도 슈사쿠)
- 여자의 일생 (엔도 슈사쿠)
- 푸른 하늘 - 막부 말기 키리시탄 유족전 (에비사와 야스히사)
- 기담 (유카와 와타루, 모로호시 다이지로)
- 수호 (하하키기 호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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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跡/キリシタン {{!}} 一般社団法人紫波町観光交流協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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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西の異形石仏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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