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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코지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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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코지(方広寺)는 일본 교토에 위치했던 사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다이지 대불을 대신하여 건립을 추진했다. 1586년 착공되어 여러 차례 대불과 대불전이 건립되었으나, 지진, 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특히 1614년 완성된 범종의 '국가안강(國家安康)' 명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가문 간의 갈등을 촉발하여 오사카 전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 폐불훼석 정책으로 인해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1973년 화재로 마지막 대불과 대불전이 소실되었다. 현재는 대불전 터가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범종과 같은 문화재를 통해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희생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묻은 귀무덤(미미즈카)이 존재하여 한국과 관련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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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코지 (교토)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혼도
현재의 호코지 본당. 묘호인의 곁절이었던 니치겐인의 객전을 메이지 초기에 이축한 것. 건물의 창건은 17세기로 여겨지며, 호코지 본존을 안치하기 위해 개변되었지만, 천태문적 사원의 객전 건축으로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됨.
위치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야마토오지 거리시치조 오르는 차야정 527-2
종파천태종
본존노사나불
별칭대불전
상세 정보
창건 연도분로쿠 4년 (1595년)
창건자아시카가 요시미쓰
슌오쿠 묘하/무소 소세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산고케이 소친
문화재호코지 범종 (중요문화재)
대불전 터 및 석루와 석탑 (나라의 사적)

2.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1586년(덴쇼 14년) 나라도다이지 대불을 대신할 새로운 대불 건립을 발원하면서 호코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20] 1588년(덴쇼 16년) 칼 사냥 칙령으로 백성들의 무기를 거두어 대불 제작에 사용했다.[6] 1595년(분로쿠 4년) 초대 대불과 대불전이 완성되었으나,[20] 1596년(분로쿠 5년) 게이초 후시미 지진으로 대불이 손상되었다.[7]

히데요시 사후,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동제 대불과 대불전 재건을 추진, 1612년(게이초 17년) 2대 대불과 대불전이 완공되었다.[10] 그러나 1614년(게이초 19년) 범종 명문의 '국가안강' 문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꼬투리 잡혀 호코지 종명 사건이 발생, 오사카 전투의 계기가 되었다.[11]

간분 2년(1662년) 지진으로 2대 대불이 손상,[12] 간분 7년(1667년) 금박을 입힌 목불인 3대 대불이 재건되었다.[12] 간세이 10년(1798년) 낙뢰로 소실되기 전까지,[12] 호코지는 일본 삼대불 중 하나였다.[20] 오타 난포는 당시 교토 민중들이 대불 소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기록했다.[21]

메이지 3년(1870년), 신정부의 폐불훼석으로 경내 대부분이 수용되어 규모가 축소되었다.[14] 덴포 14년(1843년) 4대 대불과 대불전이 건립되었으나,[14] 1973년(쇼와 48년) 실화로 소실되어 현재 호코지에 대불은 없다. 2000년(헤이세이 12년) 대불전 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2. 1.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1586년(덴쇼 14년) 나라도다이지 대불을 대신할 새로운 대불을 교토에 만들기로 계획했다.[20] 1588년(덴쇼 16년) 칼 사냥 칙령을 내려 백성들의 무기를 거두어 대불 제작에 필요한 못과 꺾쇠 재료로 사용했다.[6]

1595년(분로쿠 4년) 초대 대불과 대불전이 완성되었다.[20] 대불은 도다이지 대불보다 큰 약 19m 크기였다.[20] 그러나 1596년(분로쿠 5년) 게이초 후시미 지진으로 대불이 손상되었다.[7] 히데요시는 손상된 대불을 파괴하고 젠코지 여래를 모셨다가 다시 시나노로 돌려보냈다.[8]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에서 희생된 조선인과 명나라 군인들의 귀와 코를 묻은 귀무덤(미미즈카)을 호코지 문 앞에 만들었다.

2. 2. 도요토미 히데요리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동제 대불과 대불전 재건을 추진했다.[10] 1603년(게이초 7년) 대불 주조 중 사고로 초대 대불전이 소실되었다.[9] 1612년(게이초 17년) 2대 대불과 대불전이 완공되었다.[10]

1614년(게이초 19년) 완성된 범종의 명문 중 '국가안강'이라는 문구가 문제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문구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라 주장했는데, '안(安)' 자가 이에야스의 이름 '가강(家康)' 사이에 위치하여, 이에야스를 분리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1] 이는 단순한 구실에 불과했지만,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살아있는 한 자신이 찬탈한 권력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히데요리는 사죄를 위해 가타기리 가쓰모토슨푸성으로 보냈으나,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1] 결국 이 사건은 호코지 종명 사건으로 불리며, 오사카 전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 3. 에도 시대

간분 2년(1662년) 간분 오미·와카사 지진으로 2대 대불이 손상되었다.[12] 간분 7년(1667년)에는 파괴된 청동 불상을 대신하여 금박을 입힌 나무 불상인 3대 대불이 재건되었다.[12]

호에이 6년(1709년) 도다이지 대불전이 재건되면서 교토(호코지)와 나라(도다이지)에 대불과 대불전이 함께 존재하게 되었다.[22]

교호 4년(1719년), 조선 통신사도요토미 히데요시귀무덤을 이유로 호코지 방문을 거절했으나, 아메노모리 호슈의 중재로 갈등이 조정되었다.

간세이 10년(1798년) 낙뢰로 인해 3대 대불과 2대 대불전이 소실되었다.[12] 오타 난포는 저서 『한일한화(半日閑話)』(가이단록)에서 3대 대불 소실 당시 "(대불은) 코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 진실로 열반에 드는 듯한 심정으로 교토 안의 귀천, 노약자, 그 외 소방관이 달려와서, 이때에 이르러 어찌할 바 없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저 합장하여 십념을 외칠 뿐이었다[21]"라고 기록하여, 3대 대불의 소실이 교토 민중들에게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음을 전한다. 도다이지 대불과 달리 3대 대불은 목조였기 때문에 대좌와 기단을 제외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3년(1870년), 신정부의 폐불훼석 정책으로 호코지 경내 대부분이 수용되었다. 경내 남쪽은 쿄메이구에 할당되었고, 중앙 부분은 호코쿠 신사의 메이지 시대 재건에 사용되어 사찰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14] 같은 해, 1614년에 추가된 호코지 종루(쇼로)는 철거되어 인근 지역에 재건되었다. 수 톤의 종은 원래 건설의 일부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찰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15]

덴포 14년(1843년), 오와리국의 부유한 상인들의 기부로 4대 대불과 3대 대불전이 건립되었다.[14] 19~20세기 대불전의 모습을 담은 호코지 종의 옛 사진 참조 이 4대 대불은 1973년(쇼와 48년)까지 존속했지만, 실화로 인해 4대 대불과 3대 대불전이 모두 소실되어 호코지에서 대불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2000년(헤이세이 12년)에는 대불전 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3. 경내

호코지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현재 경내에는 본당, 대흑천당, 종루 등이 남아있다. 본당은 메이지 시대에 닛겐인의 객전을 이전한 것이다. 대흑천당에는 사이초(덴교 대사)가 조각했다고 전해지는 대흑천상이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장했던 상도 함께 안치되어 있다. 종루는 1614년(게이초 19년)에 만들어졌으며 도다이지, 지온인의 범종과 함께 일본 3대 명종으로 꼽힌다.[77]

3. 1. 본당

현재의 본당은 메이지 시대에 닛겐인의 객전을 이전한 것이다.

3. 2. 대흑천당

사이초(덴교 대사)가 조각했다고 전해지는 대흑천상이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장했던 상도 함께 안치되어 있다.

3. 3. 종루

1614년(게이초 19년) 교토 산조 가마자(三条釜座)의 명월 삼창(名越三昌)이 주조하였다. 크기는 높이 4.2m, 외경 2.8m, 두께 0.27m, 무게는 82.7ton이다. 도다이지, 지온인의 범종과 함께 일본 3대 명종으로 꼽힌다.[77] 범종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른바 "국가안강" 명문으로 유명하다. 타종좌의 왼쪽 위에 명문이 있다.

메이지 시대에 촬영된, 규모가 축소되어 재건된 3대 대불전(1973년 소실)과 범종

4. 문화재

호코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노사나불을 안치하기 위해 1595년(분로쿠 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도요토미 씨 시대부터 에도 시대 중기에 걸쳐 3대에 걸친 대불이 있었으며, 문헌 기록에 따르면 그 높이는 6장 3척(약 19m)으로 도다이지 대불(14.7m)보다 높아 일본 제일이었다고 한다. 1798년(간세이 10년) 낙뢰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일본 삼대불 중 하나로 꼽혔다.[20]

1843년(덴포 14년) 규모가 축소되어 재건된 4대 대불은 1973년까지 존속했지만, 실화로 소실되어 현재 호코지에는 대불이 남아있지 않다. 1596년(분로쿠 5년) 윤달 7월 13일 게이초 후시미 지진으로 인해 개안 전의 초대 대불이 손괴되기도 했다.[37]

호코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4. 1. 중요문화재: 범종

1614년(게이초 19년) 교토 산조 가마자(三条釜座)의 명월 삼창(名越三昌)이 주조하였다. 높이 4.2m, 외경 2.8m, 두께 0.27m, 무게 82.7톤이다. "국가안강" 명문으로 유명하며, 도다이지, 지온인의 범종과 함께 일본 3대 명종으로 꼽힌다.

4. 2. 국가지정사적: 호코지 대불전 터 및 석루·석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원한 대불(노사나불)을 안치하기 위해 분로쿠 4년(1595년)에 창건된 호코지는 도요토미 시대부터 에도 시대 중기에 걸쳐 3대에 걸친 대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6장 3척(약 19m)으로 도다이지 대불(14.7m)보다 높아 일본 제일의 높이를 자랑했다. 간세이 10년(1798년) 낙뢰로 소실되기 전까지 일본 삼대불 중 하나였다.[20] 3대 대불은 도다이지 대불과 달리 목조였기 때문에 대좌와 기단을 제외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덴포 14년(1843년)에 규모가 축소되어 재건된 4대 대불은 1973년(쇼와 48년)까지 존속했지만, 실화로 소실되어 호코지에서 대불은 사라졌다. 분로쿠 5년 7월 13일(1596년 9월 5일) 게이초 후시미 지진으로 개안 전의 초대 대불은 손괴되었다.[37]

대불전 터와 함께 석루와 석탑(귀무덤, 말무덤)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호코지 대불전 터 및 석루·석탑: 석루는 호코지 옛 경내를 구획하던 돌담으로, 교토 국립 박물관 서문에서 북쪽으로 남아 있다. 석탑은 호코쿠 신사 서쪽에 있는 통칭 "미미즈카(귀무덤)"와, 동 신사 경내 동남쪽에 있는 통칭 "우마즈카(말무덤)"(2기 모두 오륜탑)이다. 1969년 (쇼와 44년) "호코지 석루 및 석탑"이라는 명칭으로 국가지정사적이 되었다. 2014년 (헤이세이 26년) 대불전 터가 추가 지정되어,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 대불전터 녹지 공원: 대불전의 중심 부분 유구가 보존되어 있다. 2000년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보존을 위해 되메우기하여 녹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대불전터 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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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기타

호코지에는 교토시 지정 유형 문화재인 "호코지 대불전 유물 9점"이 보존되어 있다.[86] 이 유물은 대불전 관련 동제 풍탁·동제 설 각 1점, 철제 금륜 4점과 대불 관련 동제 연육편·동제 연판·철제 광배 금구 각 1점으로 구성된다.[86] 풍탁과 설에는 "국가안강(国家安康)" 종을 제작한 명월 삼창(名越三昌) 등이 게이초 17년(1612년)에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86] 다른 7점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86] 유물 일부는 종루에 놓여 연중 관람 가능하며, 교토 국립 박물관 정원에도 기둥 금륜이 전시되어 있다.

호코지 본당은 원래 닛켄인 객전 건물을 메이지 시대에 이전한 것이다.[16] 닛켄인은 묘법원 부속 사찰로, 현재의 교토 국립 박물관 본관 위치에 있었다.[16] 이전 시 1/10 크기의 노사나불 좌상(현재 호코지 본존)이 안치되며 건물 개조가 이루어졌다.[16] 불간 등을 뚫어 공간을 넓히고 천장 높이를 개조하여 좌고 약 2m의 노사나불 좌상을 안치했다.[16] 간분 10년(1670년) 10월 11일 묘법원 문주 교서 법친왕 일기에 닛켄인 객전 도면이 있어, 현재 본당 구조와 일치하므로 간분 10년(1670년)에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16]

현재 호코지 본존은 당시 대불의 1/10 크기 모상으로 여겨지는 노사나불 좌상이다. 분카 원년(1804년)에 개안 공양이 행해졌으며,[16] 좌고는 약 2m이다. 당시 대불 조형을 전하는 희귀한 예시로, 평소에는 비공개지만 유리문을 통해 약간 볼 수 있다.

호코지 대불의 미간에 납입되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미간 곤리불도 있다. 몇 대째 대불부터 미간 곤리불이 납입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3대 대불에는 납입되었음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간세이 4년(1792년) 보물 개장에서 미간 곤리불을 대불에서 떼어내 전시했는데, 60일간 225,180명이 방문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16] 간세이 10년(1798년) 낙뢰 화재 시 소방관들이 대불전 소화를 포기하고 퇴피할 때 태내불은 떼어내 반출되었다.[16]

간무 천황 칙명으로 사이초(덴교 대사)가 엔랴쿠지 건립을 위해 히에이산 등산 중 계시로 조각했다 전해지는 대흑천상도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음에 들어 1/10 크기로 만들게 한 상도 대흑천당에 안치되어 있다. 평소 비공개.

5. 한국과의 관계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과 명나라 병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오도록 명령했다. 1597년 호코지 문 앞에 미미즈카(귀무덤)를 만들고, 교토 오산의 승려들을 모아 세가키 공양을 성대하게 열었다.[86] 이는 전쟁의 잔혹함과 히데요시의 권력 과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역사학자 가와우치 마사요시는 히데요시가 호코지 문전에 미미즈카를 축조한 것은 참배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어 조선 출병의 전과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86]

1969년 "호코지 석루 및 석탑"이라는 명칭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대불전 터가 추가 지정되었다. 석루는 호코지 옛 경내를 구획하던 돌담으로, 교토 국립 박물관 서문에서 북쪽에 남아있다. 석탑은 호코쿠 신사 서쪽의 "미미즈카(귀무덤)"와 경내 동남쪽의 "우마즈카(말무덤)"(2기 모두 오륜탑)이다.

5. 1. 임진왜란과 귀무덤(미미즈카)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에서 희생된 조선인과 명나라 군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 호코지 문 앞에 미미즈카(귀무덤)를 만들었다.[86] 이는 전쟁의 잔혹함과 히데요시의 권력 과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5. 2. 조선 통신사와의 갈등

1597년 조선 통신사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된 귀무덤 때문에 호코지 방문을 거부했다.[39] 이는 조선 통신사가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 조선의 자존심과 역사 인식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일본 측 외교관으로서 양측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6. 현대의 호코지

1973년 화재로 대불과 대불전이 소실된 후, 호코지는 과거의 웅장함을 잃었지만, 여전히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 대불전 터는 발굴 조사를 거쳐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과거 대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국가안강(國家安康)' 명문이 새겨진 범종은 여전히 호코지에 남아,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과 관련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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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적 史料京都見聞記 第5巻 1992
[65] 서적 江戸の絵を愉しむ―視覚のトリック― 岩波書店 2003
[66] 음성자료 京の大仏さん http://www.mahoroba.[...]
[67] 서적 百鬼繚乱 江戸怪談・妖怪絵本集成 国書刊行会 2002
[68] 서적 図説日本民俗学全集 民間信仰・妖怪編 あかね書房 1960
[69] 서적 江馬務著作集 (第6巻) 生活の陰翳 中央公論新社 1988
[70] 서적 京都市内遺跡発掘調査概報 京都市文化市民局 2003
[71] 서적 史料京都見聞記 (출판사 정보 없음)
[72] 논문 文政京都地震(1830年)における京都盆地での被害要因の検討 -桟瓦葺屋根の普及による被害の拡大- 東京大学
[73] 서적 発掘調査で見つかった恭明宮
[74] 간행물 京都市内遺跡発掘調査概報 京都市文化市民局
[75] 서적 京をわたる 名橋100選 淡交社
[76] 서적 明治時代の恭明宮 京都市埋蔵文化財研究所・京都市考古資料館
[77] 웹사이트 昭和48年3月27日 東山区方広寺大仏殿炎上(写真提供:京都新聞社) https://www.city.kyo[...] 京都市消防局 2017-02-24
[78] 논문 巨大仏像の構造について 東大寺図書館
[79] 서적 京都伏見歴史紀行 山川出版社
[80] 서적 東寺の建造物 古建築からのメッセージ 東寺
[81] 논문 誠信と屈折の狭間―対馬藩儒雨森芳洲をめぐって
[82] 서적 発掘調査で見つかった恭明宮
[83] 간행물 平成12年度 京都市埋蔵文化財調査概要 京都市埋蔵文化財研究所
[84] 간행물 京都市内遺跡発掘調査報告 平成25年度 京都市文化市民局
[85] 법령 平成26年10月6日文部科学省告示第140号 2014-10-06
[86] 문서 方広寺鐘楼内の方広寺大仏殿遺物の説明書
[87] 간행물 平成12年度 京都市埋蔵文化財調査概要 京都市埋蔵文化財研究所
[88] 간행물 京都市内遺跡発掘調査報告 平成25年度 京都市文化市民局
[89] 웹사이트 五条橋大仏殿眺望図 https://bunka.nii.ac[...] 文化庁 2023-05-31
[90] 웹사이트 花洛一覧図(高精細画像版) https://www.rekihaku[...]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23-05-31
[91] 블로그 まぼろしの「大仏」:巨大すぎて変えられない地形 https://kyotokoteisa[...] 京都高低差崖会 2014-10-25
[92] 간행물 演劇界 演劇出版社
[93] 논문 塵劫記の大佛殿
[94] 서적 復元思想の社会史 建築資料研究社
[95] 서적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2. 역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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