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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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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1862년(철종 13년)부터 1866년(고종 3년) 사이에 편찬한 지리지이다. 《동여도지》와 《여도비지》를 참고하여 제작되었으며, 《동여도지》의 내용을 재배치하고 분량을 축소하여 15책으로 구성되었다. 김정호가 편찬한 다른 지리지와 달리 인용한 65종의 사료명을 밝히고 있으며, 최한기, 최성환, 신헌 등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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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
지리 정보
기본 정보
한글대동지지
한자大東地誌
로마자 표기Daedong jiji
상세 정보
저자이상태
제목한국 고지도 발달사
연도1999
출판사혜안
출판 위치서울
185~242쪽

2. 편찬 시기

《대동지지》는 1862년(철종 13년)부터 1866년(고종 3년)까지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에는 1864년(고종 원년)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정호가 1866년 사망할 때까지 편찬 작업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3]

2. 1. 기존 학설과 오류

《대동지지》의 편찬 시기는 종래에 1864년(고종 원년)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대동지지》 첫 장에 “신라 시조 원년 갑자로부터 본조 철종 14년 계해까지는 무릇 1920년이며 32갑자에 해당한다.”[2]라는 기사와 《대동지지》 권1 경도 국조기년(國朝紀年) 철종에 관한 기사 다음에 실린 “주상 전하 원년 갑자”(主上殿下元年甲子)라는 내용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라 1862년(철종 13년)부터 1866년(고종 3년)에 김정호가 죽을 때까지 편찬을 계속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위의 “주상 전하 원년 갑자” 다음 줄에 “중궁 전하는 민 씨이며 본적은 여주이고 부원군 민치록의 딸”[3]이라는 기사가 나와 있는데, 그녀의 왕비 간택은 1866년(고종 3년) 3월 6일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는 《대동지지》가 그때까지는 편찬 중이었음을 뜻한다. 또한 《대동지지》 권5에는 충청도의 도명이 역적 김순성으로 말미암아 공충도로 바뀐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는 1862년(철종 13년)이었고, 이때를 상한으로 본다.

2. 2. 최근 연구와 새로운 주장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정호가 1862년(철종 13년)부터 1866년(고종 3년)에 사망할 때까지 《대동지지》 편찬을 계속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대동지지》 권1에 "주상 전하 원년 갑자" 다음 줄에 나오는 "중궁 전하는 민 씨이며 본적은 여주이고 부원군 민치록의 딸"[3]이라는 기사는 명성황후 간택이 1866년(고종 3년) 3월 6일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이는 《대동지지》가 그때까지 편찬 중이었음을 뜻한다. 또한, 《대동지지》 권5에는 충청도의 도명이 역적 김순성으로 말미암아 공충도로 바뀐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는 1862년(철종 13년)이었고, 이때를 상한으로 본다.[2]

3. 편찬 체제

《대동지지》는 《동여도지》를 기본으로 하고 《여도비지》를 참고하여 보완한 지지이다. 《동여도지》에서는 역대 주현 등 역대지가 별책으로 첫머리에 편찬되어 있는데, 《대동지지》에서는 이를 맨 마지막에 〈방여총지〉(方輿總志) 편목으로 배열하고 있다. 세 지리지의 총목은 전국 주현 지지의 배열이나 명칭 등이 거의 동일하다.[1]

책의 분량은 《동여도지》가 22책, 《여도비지》가 20책인데, 《대동지지》는 15책으로 다소 줄어들었다. 문목을 비교하면 《대동지지》는 《동여도지》의 42개 문목보다 20개 적은 22개 문목인데, 이는 《대동지지》의 문목이 《여도비지》의 문목처럼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지도 작성에 필요하지 않은 몇몇 문목은 생략되었다.[1]

3. 1. 《동여도지》, 《여도비지》와의 관계

《대동지지》는 《동여도지》를 기본으로 하고 《여도비지》를 참고하여 보완한 지지이다. 《동여도지》에서는 역대 주현 등 역대지가 별책으로 첫머리에 편찬되어 있는데, 《대동지지》에서는 이를 맨 마지막에 〈방여총지〉(方輿總志) 편목으로 배열하고 있다. 세 지리지의 총목은 전국 주현 지지의 배열이나 명칭 등이 거의 동일하다.[1]

책의 분량은 《동여도지》가 22책, 《여도비지》가 20책인데, 《대동지지》는 15책으로 다소 줄어들었다. 문목을 비교하면 《대동지지》는 《동여도지》의 42개 문목보다 20개 적은 22개 문목인데, 이는 《대동지지》의 문목이 《여도비지》의 문목처럼 포괄적이기 때문에 《동여도지》의 모든 문목이 20개 문목에 포함되어 있고, 지도 작성에 필요하지 않은 몇몇 문목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1]

3. 2. 분량 및 문목 비교

《대동지지》는 15책으로, 《동여도지》(22책)와 《여도비지》(20책)보다 분량이 적다. 《대동지지》의 문목은 22개로, 《동여도지》의 42개 문목보다 간략하지만, 《여도비지》의 문목처럼 포괄적이어서 내용은 대부분 포함되었다.[1] 지도 제작에 불필요한 일부 문목은 생략되었다.[1]

4. 인용 서목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편찬한 다른 지지들과는 달리 인용 서목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인용 서목에 따르면 중국 사서 22종, 한국 사서 43종, 도합 65종의 사료를 참조하였고, 중국과 한국의 사서를 가리지 않고 정사류는 빠짐없이 인용했다. 인용 순서는 정사, 관찬사료, 사찬사료 순으로 배열하였는데, 이는 김정호가 정사류를 중시하는 역사의식을 지녔으리라 추측케 한다.[4]

《대동지지》는 앞선 지지와 지도를 참조하였으므로, 《청구도》 범례에 소개된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지도식이나, 《여도비지》 관상감조에서 인용한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등과 같이 인용서목에 나오지 않았으나 인용했으리라 여겨지는 사료도 상당수 있다.

4. 1. 인용 서목의 특징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편찬한 다른 지지와 달리 인용한 사료명, 곧 인용서목을 밝히고 있다. 인용서목에 따르면 중국 사서 22종, 한국 사서 43종, 도합 65종의 사료를 참조하였고, 중국과 한국의 사서를 가리지 않고 정사류는 빠짐없이 인용했다. 인용 순서는 정사, 관찬 사료, 사찬 사료 순으로 배열하였는데, 이는 김정호가 정사류를 중시하는 역사 의식을 지녔으리라 추측케 한다.[4]

인용서목에 나오지 않았으나 인용했으리라 여겨지는 사료도 상당수 있다. 예를 들면 〈청구도〉 범례에서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지도식을 소개한다거나 《여도비지》 관상감조에서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를 인용하고 있으나, 《대동지지》의 인용서목에서는 빠져 있다.

인용서목에 나온 사료는,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사료는 최한기의 후원으로, 관찬 사서나 자료는 최성환과 신헌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4. 2. 인용 서목 외 참고 자료

청구도》 범례에 소개된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지도식이나, 《여도비지》 관상감조에서 인용한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등은 《대동지지》의 인용 서목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김정호가 이전에 편찬한 지지와 지도를 참고했으므로 이러한 자료들도 함께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4]

4. 3. 자료 수집 과정 (추정)

의 인용서목에 나온 사료는,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사료는 최한기의 후원으로, 관찬 사서나 자료는 최성환과 신헌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4]

참조

[1] 서적 한국 고지도 발달사 혜안
[2] 문서 기신라시조원년갑자 지본조철종십사년계해 범일천구백이십년삼십이갑자
[3] 문서 중궁전하민씨 적여주 부원군치록녀
[4] 문서 이와 달리 이병도는 이러한 김정호의 인용서목을 두고 제1차 사료를 제쳐놓고 제2차, 3차 사료를 인용한 고루성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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