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시기 해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이순신이 직접 기록한 일기로, 그의 군영에서의 일상, 전략, 해전, 개인적인 생각 등을 담고 있다. 총 8권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7권이 전해지며,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친필본과 이를 바탕으로 정조대에 정리된 전서본이 있으며,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일기에는 전투 상황뿐 아니라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 당시 사회상 등이 기록되어 역사적,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산시의 문화유산 - 여민루
여민루는 조선 시대 아산군 관아 입구에 세워진 문루 건물로, 백성의 뜻을 취한다는 의미를 담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에 익공 양식의 공포를 갖춘 다락 형식의 건물이다. - 아산시의 문화유산 - 배방산성
배방산성은 충청남도 아산시 성재산 정상부에 있는 백제 시대 석축 산성으로, 테뫼식 산성 형태이며 둘레는 약 1500m이고, 성 내에 우물과 군창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백제 토기 조각 발견으로 백제 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온양 방씨 유래 설화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 군사 책 - 내란기
《내란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내란을 겪으며 자신의 시각으로 서술한 역사 기록으로, 루비콘 강 도하부터 알렉산드리아 전쟁 시작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으며 객관성 부족 비판에도 불구하고 로마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카이사르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군사 책 - 갈리아 전기
《갈리아 전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기록한 라틴어 저서이며,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집필되었고, 갈리아 및 게르만족의 문화와 풍습을 묘사하고 있다. - 충청남도의 국보 -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지석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2매의 매지권으로, 왕과 왕비의 생년월일, 사망일, 장례 날짜 등이 기록되어 있어 무덤의 주인을 확인하고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 풍습과 사후 세계관, 백제와 중국 남조의 문화 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충청남도의 국보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국보 제323호의 거대한 석불로, 은진미륵이라고도 불리며 토속 신앙과 불교가 혼합된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 난중일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
| 한글 | 난중일기 |
| 한자 | 亂中日記 |
| 로마자 표기 | Nanjung ilgi |
| 일본어 | 난중일기(乱中日記) |
| 문화재 정보 | |
| 국가 | 대한민국 |
| 유형 | 국보 |
| 번호 | 76 |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길 48 (염치읍, 현충사) |
| 시대 | 조선시대 |
| 소유 | 대한민국 정부,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중 |
| 수량 | 합 8책 |
| 문화재청 | 11,00760000,34 |
| 세계기록유산 정보 | |
| 이름 | 난중일기 |
| 국가 | 대한민국 |
| 영문명 |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
| 등록 구분 | 기록유산 |
| 등록년도 | 2013년 |
| 지역 | 아시아 · 태평양 |
| 등재 URL | ‘난중일기’·‘새마을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
2. 구성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 2,539일간 군중 생활과 전란의 정세를 기록한 일기이다.[2]
7년 간의 전쟁 동안 이순신 본인이 항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내용은 당시 조선 수군의 지휘에 관한 비책(秘策), 국가 및 조정에 대한 충성과 강개, 왜군에 대한 분노의 감정 토로 등이 실려 있으며,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록하고 있다.[3] 또한, 항복하는 일본군 병사에 대한 내용이나,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등도 적혀 있다.[7]
일기는 해군 최고 사령관이 직접 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인 생각을 솔직하게 기록했다는 점과, 전략적인 측면의 세세한 정보, 당시 서민들의 모습까지 기록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기이다.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이며,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8]
원래 일기는 「임진일기」(1592년),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을미일기」(1595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속정유일기」(1597년), 「무술일기」(1598년)의 8권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을미일기」를 제외한 7권이 전해진다.[5]
2. 1. 판본
《난중일기》는 조선 정조 19년(1795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서 처음 붙여진 제목이다. 원래 제목은 《임진일기》, 《계사일기》 등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로, 친필 원본과 전서본이 있다.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正字)로 탈서(脫草)한 전서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 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하였다.《난중일기》의 대표적 사본과 간본은 다음과 같다.
- 친필 원본: 이순신 본인이 초서로 쓴 친필 원본이다. 임진년에서 계사년, 정유년 일기는 일기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갑오년에서 병신년의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다. 긴박한 상황에서 흘려 적은 것으로 삭제와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 쓴 초서 글씨들은 전서본 등 후대 활자본에서도 오독이나 탈자가 확인되기도 한다.
- 전서본: 친필본을 토대로 조선 정조대에 초서를 정서하는 작업을 통해 정리한 판본이다.
- 난중일기초: 1935년 12월 20일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판독하여 간행한 판본이다. 친필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치되, 친필본의 형태와 체재를 그대로 살려 날짜별로 나열하였다. 수정된 내용은 오른편에, 관련 내용은 위에, 인명과 지명은 옆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 충무공유사: 이순신의 집안인 덕수 이씨 집안에 전해져 오는 문헌으로, 친필본 《난중일기》를 옮겨 적은 유일한 판본이다. 친필본과 전서본에 누락된 32일치(을미년 30일, 병신년 1일, 무술년 1일치 분량)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난중일기》 친필 원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권수 | 내용 | 분량 |
|---|---|---|
| 제1권 | 1592년 5월 1일 ~ 1593년 3월 22일 | 27페이지 |
| 제2권 | 1593년 5월 1일 ~ 1593년 9월 15일 | 30페이지 |
| 제3권 | 1594년 1월 1일 ~ 11월 28일 | 50페이지 |
| 제4권 | 1596년 1월 1일 ~ 1596년 10월 11일 | 41페이지 |
| 제5권 | 1597년 4월 1일 ~ 1597년 10월 8일 | 27페이지 |
| 제6권 | 1597년 8월 4일 ~ 1598년 1월 4일 | 20페이지 |
| 제7권 | 1598년 음력 9월 15일 ~ 10월 7일 | 8페이지 |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전쟁 상황과 개인적인 생각,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 등을 솔직하게 기록하여 당시 시대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3. 주요 내용
《난중일기》는 단순한 전쟁 기록을 넘어,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리더십, 그리고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 1. 개인적 기록
친필본은 5월 1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문 7권 8책으로 군중에서의 일과를 비롯해 조정에 바치는 장계와 등본, 별책, 부록 등이 초서로 적혀 있다.[2]
임진년에서 계사년, 정유년 일기는 일기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갑오년에서 병신년의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것으로 삭제와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쓴 초서 글씨들은 전서본 등 후대 활자본에서도 해당 부분의 오독 내지 탈자가 확인되기도 한다. 《난중일기》를 연구한 노승석은 필기 상태가 유난히 심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에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파직에 투옥, 백의종군에 이어 모친상까지 당하는 악순환 속에 있었던 이순신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만큼 이순신의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기로써의 성격을 제대로 간직한 간본이라 할 수 있다.
기록에는 이순신 장군의 군영에서의 일상생활, 전략, 해전, 이순신 장군이 교류한 다양한 군 장교와 민간 관리들의 이름과 배치, 지리적 및 대기 상황에 대한 세부 정보, 그리고 그의 군 지휘의 사건과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관찰과 논평이 상세히 적혀 있다.[3] 이 기록들은 연속적이지 않다. 이순신 장군이 매일 기록을 유지할 수 없었던 기간을 나타내는 서술의 끊김이 일기에 걸쳐 존재한다.[3] 또한 이순신 장군이 나중에 이전 기록을 수정한 것으로 보이는 5권과 6권 사이에 일부 중복이 있다.[4]
3. 2. 군사 기록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이 있었던 정유년의 일기는 두 개의 사본이 존재한다. 모두 이순신 본인이 쓴 것으로, 정유년 4월 1일부터 10월 28일까지 쓴 제5책(전 27매)과 정유년 8월 5일부터 이듬해 무술년 1월 4일까지의 일을 기록한 제6책(전 20매)의 사본이다.[11] 정유년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가 중복되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하면 제5책에서 간지의 착오가, 제6책에서 기사의 상세한 확충이 확인된다. 김경수는 이에 대해 이순신이 처음 쓴 정유년 일기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시간의 여유를 틈타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11] 명량해전을 치르던 날인 9월 16일의 일기는 난중일기 분량 가운데서도 가장 긴 분량의 일기이기도 하다.
《정유일기》(丁酉日記) 후권(後券) 음력 9월 16일자에 기록된 명량 해전의 날, 12척의 배를 이끌고 울돌목에서 300여 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와 맞닥뜨려 적선 31척을 부수고 일본 함대를 격퇴하는 전승을 거둔 이순신에게, 앞서 안골포 해전 때 조선군에 투항했던 항왜 준사(俊沙)가 바다에 떠다니던 왜장의 시체를 가리켜 "저기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은 놈, 안골진(安骨鎭)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는 자입니다."라고 보고했고, 이순신은 사부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마다시를 갈쿠리로 건져올려 재차 준사에게 확인시킨 뒤, 마다시의 시체를 토막내어 적 앞에 보임으로써 적의 기세를 꺾었다고 적고 있다.
안골포에서 항복한 항왜인 준사가 알아보고 이순신에게 가리켜 알렸다는 마다시라는 이름의 왜장에 대해서는, 정유재란 당시 구루시마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했으나 울돌목에서 전사한 이요 출신의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라고 알려져 왔으나, 《양국임진실기》(両国壬辰実記)의 찬자 야마자키 히사나가(山崎尚長)는 각주에서 아와지섬을 중심으로 활약한 또 다른 수군 세력인 간 씨(菅氏)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자제 가운데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으로 불렸던 간 마사카게(菅正陰)를 마다시로 거론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울돌목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징비록》을 일역하기도 한 재일 사학자인 박종명(朴鐘鳴)도 이 설을 지지하였다. 일본측 자료로 명량 해전 당시 일본 수군 장수의 한 명이었던 도도 다카토라의 행장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에는 "선봉에 섰던 배들이 적선에 당해 부서진 것이 몹시 많았다. 그 와중에 구루시마 이즈모노도노(来島出雲殿)[12]도 전사(討死)하였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 속에는 이순신이 전쟁 가운데, 혹은 전쟁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한 언급도 있다. 《정유일기》 말미에 이순신은 중국의 역사책 《송사》(宋史)를 읽고 느낀 소감을 적어두었고, 역사 속의 인물의 행적을 되새기며 구국에 대한 충정을 다시금 상기한다. 이순신의 오랜 지우인 류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戦守方略)에 대해 "수전과 육전, 화공법에 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한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29]이라며 칭찬하고, 한국의 옛 역사를 읽고 개탄스럽게 느낀 자신의 생각을 일기에 적기도 했다.[30]
《갑오일기》말미에서는 '난도(難逃)',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가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인재가 없으니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增蓋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와 같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확인되어, 이순신이 일찍 《삼국지연의》를 접하고 읽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정유일기》에는 백의종군 도중 한산도의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마침 남쪽으로 내려온 박천군수(博川郡守) 류해(柳海)로부터, 과천의 좌수(座首) 안홍제(安弘濟)라는 인물이 죄도 없이 억울하게 관에 잡혀가 여러 차례 형장을 맞아 거의 죽을 지경이 다 되었는데 말과 스무 살 된 계집종을 뇌물로 바치고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 안팎에서 뇌물의 많고 적음을 갖고 죄의 경중을 정한다고 기가 막혀 하며 "이런 게 '백 전의 돈이 죽은 혼도 살린다'(一陌金錢便返魂)는 것인가?" 라고 한탄하였는데,[31] 이 구절은 명(明)의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에 실린 '영호생명몽록' 중 내용의 부분으로, 이순신이 《전등신화》를 접하고 읽은 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류해는 이순신을 만난 다음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배설 및 가리포첨사에게 보내는 이순신의 문안 편지를 갖고 승평(순천)을 거쳐 한산으로 갔고, 두 달 뒤인 7월 16일 새벽,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거제 앞바다의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전서본 일기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친필본은 5월 1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문 7권 8책으로 군중에서의 일과를 비롯해 조정에 바치는 장계와 등본, 별책, 부록 등이 초서로 적혀 있다. 임진년에서 계사년, 정유년 일기는 일기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갑오년에서 병신년의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것으로 삭제에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쓴 초서 글씨들은 전서본 등 후대 활자본에서도 해당 부분의 오독 내지 탈자가 확인되기도 한다. 《난중일기》를 연구한 노승석은 필기 상태가 유난히 심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에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파직에 투옥, 백의종군에 이어 모친상까지 당하는 악순환 속에 있었던 이순신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만큼 이순신의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기로써의 성격을 제대로 간직한 간본이라 할 수 있다.
원본 『난중일기』는 7권으로 나뉘어 205쪽의 두루마리로 구성되어 있다.[2] 기록에는 이순신 장군의 군영에서의 일상생활, 전략, 해전, 이순신 장군이 교류한 다양한 군 장교와 민간 관리들의 이름과 배치, 지리적 및 대기 상황에 대한 세부 정보, 그리고 그의 군 지휘의 사건과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관찰과 논평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 기록들은 연속적이지 않다. 이순신 장군이 매일 기록을 유지할 수 없었던 기간을 나타내는 서술의 끊김이 일기에 걸쳐 존재한다.[3] 또한 이순신 장군이 나중에 이전 기록을 수정한 것으로 보이는 5권과 6권 사이에 일부 중복이 있다.[4]
| 권 | 기간 | 쪽수 | 판본 |
|---|---|---|---|
| 제1권 | 1592년 5월 1일 ~ 1593년 3월 22일 | 27 | 대형 |
| 제2권 | 1593년 5월 1일 ~ 1593년 9월 15일 | 30 | 대형 |
| 제3권 | 1594년 1월 1일 ~ 1594년 11월 28일 | 50 | 대형 |
| 제4권 | 1596년 1월 1일 ~ 1596년 10월 11일 | 41 | 대형 |
| 제5권 | 1597년 4월 1일 ~ 1597년 10월 8일 | 27 | 대형 |
| 제6권 | 1597년 8월 4일 ~ 1598년 1월 4일 | 20 | 대형 |
| 제7권 | 1598년 음력 9월 15일 ~ 1598년 음력 10월 7일 | 8 | 대형 |
3. 3.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
이순신은 일기 속에서 자신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남기고 있다.; 권율
: 1594년 이순신은 전윤으로부터 "수군을 거창으로 잡아왔는데 원수 권율이 방해한다"는 전언을 들었다. 그는 이를 일기에 적고, "예전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랬으니 한탄해 뭐하겠는가"[13]라고 권율을 비판했다. 6월에는 광양현감이 두치에서 수군을 옮겨 복병시켰는데, 도원수 권율의 서출 처남인 조대항이 권율에게 무고하는 말만 믿고 광양현감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문책하는 일이 있었다. 이순신은 이에 대해 "사사로이 행한 것이 이리 심하니 통탄을 비길 데 없다"고 평했다(나중에 권율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후회). 을미년 일기에서도 이순신은 남해현령 기효근 등을 공초한 권율의 초안을 보고 "근거도 없이 망령되게 고한 말이 몹시 많으니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라며, 원수의 임무를 맡아 행하는 게 괴이하다고 평했다.[14]
; 김응서
: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1595년 5월 1일, 조정의 명도 없이 사사로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교섭하면서 고니시를 '대인(大人)'이라고 칭하는 등의 일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있었다. 김응서에게 비변사낭청 김용이 찾아와 구두로 선조의 유지를 전한 날, 이순신은 일기에 "김응서라는 자는 어떤 자인데 스스로 개선하고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쓸개가 있는 자라면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15]라고 평했다. 한편으로 진주성의 폐허를 함께 둘러보기도 했다. 훗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첩자 요시라로부터 전해들은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 도해에 대한 거짓 정보를 조정에 보고했고, 조정으로부터 출병해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이 정보의 신빙성이 약하다고 출동 명령을 거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내놓게 된다.
; 류몽인
: 류몽인의 이야기집 《어우야담》에는 이순신에 관한 일화가 몇 편 등장한다. 1595년 암행어사로 남도에 파견된 류몽인은 임실현감 이몽상,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하고, 순천부사를 탐관오리의 으뜸이라고 평했다. 또 담양군수 이경로나 나주목사 이순용, 장성현감 이귀, 창평현감 백유항 등의 악행을 덮어주고 조정에 포상을 요청했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해 "나라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도 않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는 변명만 믿고 있다"며, 중국 송의 간신 진회가 무목(武穆)에게 하던 짓이나 다름없다[16]고 비난했다.
; 류성룡
: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군무와 정무를 두루 수습했던 류성룡은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과 가까운 사이였다. 임진년 3월 5일, 이순신은 류성룡(당시 좌의정)에게서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받고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다"며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라고 평가했다. 갑오일기 2월 12일, 이순신은 한양에서 온 선전관에게서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를 받고 다음날 답신을 썼다. 이때 이순신은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맙고 그립기가 끝이 없다"고 적었다. 7월 12일, 이순신은 "류 정승(柳相)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이일)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적었다(실제 류성룡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9년 뒤인 1607년에 사망). 그는 "이는 류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서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을 이길 수 없다."고 썼다. 류성룡은 훗날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생애와 전과를 비중있게 언급했다.
; 원균
: 원균은 이순신의 일기 속에 120회 언급되어 있다. 계사년(49회)과 갑오년(46회)에 집중되어 언급되는데,[17]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진도 지휘선이 왜적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을 비난하며 경상수사(원균)를 원망했고,[18] 죽은 왜적의 수급을 얻으려 적이 가득한 섬 사이를 오가는 경상수사 군관과 가덕첨사 사후선을 잡아 보냈더니 이순신에게 화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19] 또 장계를 거짓으로 꾸며 올리고,[20] 탈영한 격군들을 데리고 자신의 주둔지에 숨은 휘하 포작(어민)들을 숨겨주느라 금모포 만호가 보낸 관리들을 포박하고,[21] 명나라 경략 송응창이 경상우병사 최경회에게 보낸 불화살 1,530대를 혼자 다 쓰려고 계책을 꾸미고,[22] 이순신에게 날이 밝으면 나가 왜적과 싸우자는 공문을 보내놓고 다음 날 이순신이 왜적 토벌에 대한 공문을 보내자 술에 취해 정신없다고 핑계를 대며 대답하지 않았다.[23] 이순신에게 복병을 함께 보내자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24] 이 밖에도 술에 취해 헛소리를 했다는 등의 비난이 있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25], "원 수사의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26]라고 평했다. 원수 권율의 질책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원균의 모습을 우습다고[27] 비웃는 등, 매도에 가까운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어머니 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문상을 보냈을 때조차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한다만 이는 원수의 명이다"[28]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에 대한 감정의 골은 깊었다.
; 이원익
: 이원익은 1595년 8월 체찰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던 중 이순신과 만났다. 8월 22일 진주에 온 이원익은 다음날 이순신과 대면했고, 이순신은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을 둔 것 같다."고 일기에 적었다. 28일까지 체찰사 이원익은 체찰부사 김륵, 종사관과 함께 이순신과 남해를 돌며 진을 합칠 곳, 왜적과 싸울 만한 곳을 둘러보고 군중의 폐단을 의논하고 헤어졌다. 12월 18일에도 체찰사 이원익은 통제사 이순신과 사천의 보에서 만나 새벽 두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받을 때, 이원익은 정탁과 함께 이순신 구명에 나섰다.
; 정경달
: 정경달은 임진왜란 당시 선산군수로 의병을 모아 김성일, 조대곤 등과 금오산에서 왜병을 상대로 승리했고, 1594년부터 이순신 막하에서 종사관으로 활약하며 둔전 경영과 관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임진일기 마지막 장에 실린 이순신이 쓴 서간 초안에는, 전 관찰사에게서 도주(道主, 관찰사) 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으니 검사하지 말라는 공문을 받았으나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 감독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호소하며 추수 동안만이라도 맡겨둘 수 없겠느냐고 묻는 내용이 있다. 정경달 또한 전쟁 중 쓴 일기가 문집 《반곡집》(盤谷集, 1800년 간행)에 '난중일기'라는 편명으로 실려 전한다.
; 정탁
: 갑오일기 2월 4일, 찬성(贊成) 정탁에게서 온 편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탁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이원익과 함께 이순신을 구해줄 것을 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정유년 4월 1일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났을 때, 정탁은 류성룡 등 다른 조신들처럼 사람을 보내 이순신을 위로했다. 이순신을 구해줄 것을 요청한 정탁의 차자는 《신구이순신차초》(伸救李舜臣箚草)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4. 역사적, 문학적 가치
조선 정조는 재위 12년(1788년) "우리나라를 재건하게 한 큰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내각에 내려 전서를 편찬하고 활자로 인쇄되는 대로 한 본을 통영의 충렬사에 간직해두고 제사지낼 것을 명했다.[32]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보고서, 진중에서 남긴 7년간의 일기와 시문 등 이순신의 행적과 관련 기록에 정조 본인이 이순신을 추모해 쓴 글이 더해졌다. 간행은 윤행임과 유득공 등이 맡았으며, 초서로 쓰여 있던 친필본 일기의 내용을 정자체로 바꾸고 판각하는 탈초 작업이 이때 처음 이루어졌으며, 흔히 알려진 '''난중일기'''라는 제목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이충무공전서》는 초간본을 비롯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 간행되었고, 내용은 간본 모두 동일하다. 《이충무공전서》 권5에서 권8에 해당하는, 이른바 전서본 《난중일기》의 내용은 날짜면에서 친필본보다 많으며, 총 7년 2,539일의 분량 가운데 1,593일의 기록이 실려 있고 946일은 누락되어 있다.[33] 친필본에 실려있던 내용 상당수가 생략된 한편으로 친필본에 없는 을미년 일기 전문과 임진년 정월 초하루에서 4월 22일,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 11월 8일부터 17일까지의 일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난중일기》의 정본을 제작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5만 명의 조선 군민이 왜병과의 분전 끝에 몰살당한 제2차 진주성 싸움(1593년)이 있었던 해에 쓴 《계사일기》 7월 2일자에서 이순신은 진주성(晋州城)이 왜병에 포위되어 위태롭다는 소식을 김득룡으로부터 전해 듣고 놀라고 걱정스럽다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부정하는 투로 적었지만, 7월 6일에 광양으로부터의 보고를 통해 진주성 함락의 소식을 전해듣고, 9일에는 광양과 순천이 왜병에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이어지고 난 뒤에 "이 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색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고 썼다. 소설 《칼의 노래》(2001년 발행)를 발표한 한국의 소설가 김훈은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다"는 이 《난중일기》 문장을 두고 "이것은 죽이는 문장입니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고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었다는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죠.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연 수사학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죠. 내가 사랑하는 주어와 동사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에 입각해 있습니다."라고 평했다.[37]
김훈은 또, "이순신은 또 일기에다, '오늘 어떤 녀석이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고 썼습니다. 기막히지요.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게 목을 베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완강한 사실에 입각하는 것이죠.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 머리를 베어서 장대에 끼워서 성 앞에 걸었다. 그래놓고 그 다음 문장을 계속 써요.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해군들은 바람 부는 게 가장 큰 문제죠. 배들을 바닷가에 나란히 자동차 세우듯이 대놓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배들이 서로 흔들려서 배들끼리 부닥칩니다. 바람이 불면 해군은 배를 끌어서 뭍 위로 올려놔야 배가 부숴지지 않죠.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자는 병사들을 깨워서 물가로 내려 보내서 배를 끌어올리라고 지시했다'고 씁니다. 이 부하 놈 하나를 죽였다는 것 그게 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써버립니다. 수사, 형용사, 부사가 하나도 안 나오고 밋밋하고 재미가 없지만, 부하를 죽였다는 문장과 바람이 불었다는 문장 사이에서 그의 문장은 삼엄한 긴장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아주 전압이 높은 문장입니다. 볼트가 높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문장입니다. 만지면 전기가 올 것처럼 찌르찌르하는 문장이죠."라고 평했다.[38]
일기는 「임진일기」(1592년),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을미일기」(1595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속정유일기」(1597년), 「무술일기」(1598년)의 8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을미일기」를 제외한 7권이 전해져 보존되어 있다.[5]
일기는 해군 최고 사령관이 직접 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인 생각을 솔직하게 기록했다는 점과, 전략적인 측면의 세세한 정보, 당시 서민들의 모습까지 기록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기이다.[5] 또한, 항복하는 일본군 병사에 대한 내용이나,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등도 적혀 있다.[7]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가 2013년 6월 18일,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된 자리에서 「세계의 기억」 유산으로 등재되었다.[8]
일본에서는 2000년부터 2001년까지 3권으로 구성된 『난중일기 임진왜란의 기록』을 북도만지(北島萬次) 번역으로 평범사(平凡社)·동양문고(東洋文庫)에서 출판하였다.
5. 도난 사건 및 번역
1935년 12월 20일,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일본인 지카자와(近澤)가 운영하던 인쇄부에서 《난중일기》 판본을 간행했다. 이 판본은 《조선사료총간》 제6권에 '난중일기초 임진장초'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는데, 이미 1928년 5월에 조선사편수회는 이순신 관련 유물 일체를 촬영해 놓은 상태였다.[34] 1934년 연차계획안 사료총간 목록에는 난중일기 초본과 임진장초(활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판본은 친필본과 전서본 내용을 합치되, 친필본 형태와 체재를 살려 날짜별로 나열했다. 마멸 등으로 판독 불가능한 글자는 미상 기호로 처리하고, 수정 내용은 오른편에, 관련 내용은 위에, 인명과 지명은 옆에 주석을 달았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 난중일기초를 가장 대표적인 전범으로 삼았으며, 비교적 완벽하게 편집된 간본으로 평가한다.
1916년에는 조선연구회 주간 아오야나기 난메이(靑柳南冥)가 전서본 《난중일기》를 토대로 일본어 해석과 함께 《원문화역대조 이순신전집》에 수록된 간본을 냈다. 그러나 이는 임진년 1월 1일부터 을미년 5월 29일까지의 내용만 발췌한 것이었다(이듬해 《이순신전집》에 난중일기에 현토를 단 《난중일기장》이 간행됨).
1967년 12월 31일, 현충사에 보관 중이던 《난중일기》가 도난당했다가 이듬해 1월 9일 부산에서 회수되었다. 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난중일기》 영인본 500부가 제작되어 전국 공공도서관 및 박물관에 배포되었고,[35] 원본 열람은 금지되었다.
1960년 4월 이은상이 번역한 《이충무공난중일기》가 문교부에서 간행되어 가장 오래된 국역본으로 알려졌으나, 1953년 설의식이 쓴 《이순신 수록(手錄) 난중일기》가 더 오래된 국역본으로 밝혀졌다. 1955년 11월 30일에는 북한에서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리순신장군전집》을 번역, 이상호가 5천 부를 간행했다.
홍기문 번역본은 신문관본과 통영본 《이충무공전서》, 조선사편수회 간행 《난중일기초》를 바탕으로 번역되었으며, 《이충무공전서》 중 충무공 저작이 아닌 것은 삭제했다. 홍기문은 "친필본보다 전서본이 간략한 것은 윤행임이 삭제하고 이두문을 임의로 수정했기 때문"이라며 판본 문제를 지적했다. 이는 친필본과 전서본 최초의 합본 번역이나, 북한 사투리가 포함되고 활자본만 참고하여 친필본의 미상, 오독 부분을 밝히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이후 중간본 간행).
이은상은 1960년 간행본에서 "초고와 전서 중 채택된 난중일기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무술일기 빠진 부분을 장예초본 별책(《충무공유사》일기초)에서 찾아 수록하고 "친필 초고를 완전 채록했다"고 자부했다(단, 장예초본 별책과 《충무공유사》일기초가 동일함을 몰랐다). 1960년 부산대 총장 윤인구는 충무공연구실을 설치, 친필 난중일기 초고 7책 215장을 사진 촬영하여 경무대(청와대), 부산대 도서관, 현충사에 비치했다.[36]
1968년, 이은상 번역본(친필본+전서본 합본)이 현암사에서 크라운판으로 간행되었다. 같은 날 지문각에서 이석호 역주본도 나왔는데, 이석호 역주본은 126일치가 빠지고 이순신 한시가 부록되었으며, 가격은 현암사판(800원)보다 저렴한 390원이었다. 이은상 번역본은 《난중일기》 속 지명과 현대 지명을 대조한 표를 부기했다.
2004년부터 문화재 디지털 정보화 사업으로 난중일기 원문과 사진이 국가기록유산에 게재되고, 노승석이 친필본 탈초와 원문 해독 중 10여 곳의 오류를 발견했다. 노승석은 2005년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동아일보사)을 냈고, 《충무공유사》 해독 중 찾은 32일치를 추가한 표정교감본 임진일기를 2007년 3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를 통해 간행했다. 5월에는 박해일 교수 외 3인이 친필본을 활자로 옮긴 《이순신의 일기초》를 냈는데, 원문에 구두점을 넣지 않고 장계와 서간문 출처를 밝혀 친필본 형태로 상세 편집했다.
6.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2013년 6월 18일,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된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는 《난중일기》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8]
《난중일기》는 해군 최고 사령관이 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인 생각을 솔직하게 기록했다는 점, 전략적인 측면의 세세한 정보와 당시 서민들의 모습까지 기록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기로 평가받는다.[5] 또한, 항복하는 일본군 병사에 대한 내용이나,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등도 기록되어 있다.[7]
참조
[1]
웹사이트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https://english.cha.[...]
2023-01-16
[2]
서적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Yonsei University Press
1977
[3]
서적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Yonsei University Press
1977
[4]
서적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Yonsei University Press
1977
[5]
웹사이트
駐大阪韓国文化院 Korean Cultural Center
https://k-culture.jp[...]
2023-09-05
[6]
웹사이트
국보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
2023-09-05
[7]
웹사이트
週刊東洋文庫1000:『乱中日記 壬辰倭乱の記録(全3巻)』(李舜臣著 北島万次訳注)
https://japanknowled[...]
2023-09-05
[8]
웹사이트
「乱中日記」、セマウル運動記録が世界記憶遺産に
https://www.mindan.o[...]
2023-09-05
[9]
간행물
제17328호 / 관보(정호) / 발행일 : 2010. 8. 25. / 63 페이지 / 1.2MB
http://gwanbo.mois.g[...]
2010-08-25
[10]
뉴스
‘난중일기’·‘새마을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3-06-19
[11]
논문
이순신의 난중일기
2004-09
[12]
기타
[13]
기타
갑오일기
1594-01-18
[14]
기타
을미일기
1595-04-30
[15]
기타
을미일기
1595-07-07
[16]
기타
갑오일기
1594-02-16
[17]
논문
[18]
기타
계사일기
1593-02-22
[19]
기타
계사일기
1593-02-28
[20]
기타
계사일기
1593-05-21
[21]
기타
갑오일기
1594-05-13
[22]
기타
계사일기
1593-05-27/30
[23]
기타
계사일기
1593-06-10/11
[24]
기타
계사일기
1593-08-26
[25]
기타
계사일기
1593-02-23
[26]
기타
계사일기
1593-08-06
[27]
기타
을미일기
1595-08-17
[28]
기타
정유일기
1597-05-08
[29]
기타
임진일기
1592-03-05
[30]
기타
병신일기
1596-05-25
[31]
기타
정유일기
1597-05-21
[32]
기타
정조실록
1732-08-19
[33]
논문
이순신의 난중일기 연구
2001
[34]
서적
조선사료총간
[35]
뉴스
동아일보
1968-02-20
[36]
뉴스
경향신문
1968-01-10
[37]
서적
회상
생각의 나무
2008
[38]
서적
회상
생각의 나무
20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