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1. 개요
김정호는 1804년경 황해도 토산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다. 그는 1834년 《동여도지》를 시작으로, 《청구도》, 《여도비지》, 《동여도》를 제작했으며, 1861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동여지도》 제작 과정에서 전국을 답사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기존의 지도와 자료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에게 옥사했다는 설은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과 서울의 지명에 그의 호가 사용되기도 했다.
-
김정호 -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한국의 대표적인 고지도로, 전국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다양한 지형지물과 시설물을 기호와 색상으로 표기하여 가독성을 높였으며, 휴대와 이용이 편리하도록 제작되었다. -
김정호 -
고산자로
고산자로는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의 호를 따서 명명된 서울특별시의 도로이며, 1966년 지정된 왕십리 로터리부터 시작하여 성수대교에서 종암로까지 이어진다. -
청도 김씨 -
김윤정 (1869년)
김윤정은 대한제국 시기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주미공사관에서 요직을 지냈으나 이승만과의 갈등 이후 귀국하여 군수와 부윤을 역임했고, 한일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 참여관과 도지사를 지내며 친일 관료로 활동한 인물로,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청도 김씨 -
김경진 (정치인)
김경진은 1989년 사법시험에 합격 후 검사, 변호사, 제20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민의당, 무소속, 민주평화당을 거쳐 윤석열 대통령 후보 캠프에 합류, 현재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동대문구 을 당협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정치인이다. -
한국의 지도 제작자 -
신숙주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언어학자, 외교관, 정치인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세조 즉위 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외교와 국방에 기여했으며, 《해동제국기》, 《동국정운》 등의 저술을 남기고 영의정을 지냈다. -
한국의 지도 제작자 -
정상기
정상기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로, 이익의 제자로서 경세치용학파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정확한 측량법을 이용한 지도 제작과 조선 전역을 답사하여 제작한 팔도도로 조선 시대 지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2. 생애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對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따르면,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1834년 (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 (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 (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1861년 (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 (고종 3년)까지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헌상하였는데, 그 정교한 지도를 보고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로 투옥되고, 그 판목은 몰수 소각되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 〈대동여지도〉의 목판이 남아 있으며, 〈대동여지도〉 제작을 후원한 최한기, 신익(申櫶)도 처벌받지 않았다. 사서에 남아 있는 김정호에 관한 기록에도 처벌이나 옥사를 나타내는 문구는 없다. 한국의 역사학에서는 이를 조선총독부의 날조로 보고 있다.
3.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지도를 통해 세상의 형세를 살피고, 지지를 통해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지도와 지지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治國)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는 없었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내용을 넣어 알 수 있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지도와 지지가 갖추어졌지만, 김정호가 살던 시대에는 편찬된 지 300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져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동여도지》의 구성은 《동국여지승람》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하다는 자신의 주장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경제를 운영하는 데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관방, 역참, 학교, 서원 등 42개 항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했다.
4. 김정호와 관련한 오해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여 흥선대원군에게 바쳤는데, 지도가 너무 정교하여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로 투옥되고 판목은 몰수 소각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는 『대동여지도』의 목판이 남아 있으며, 『대동여지도』 제작을 후원한 최한기, 신헌도 처벌받지 않았다. 사서에 남아 있는 김정호에 관한 기록에도 처벌이나 옥사를 나타내는 문구는 없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조선총독부의 날조로 보고 있다.
4.1. 전국 답사설
김정호가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조선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하여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로, 대체로 그들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않았다.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라는 구절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상기, 최한기, 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인 당빌 역시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것과 비슷한 예다.
역사학연구소에서 저술한 《교실밖 국사여행》(사계절출판사)에서도 김정호가 답사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 조선은 중앙정부가 행정을 편리하게 하려고 지도와 지리지를 많이 저술하였으므로, 김정호는 기존 지리학 문헌들을 연구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4.2. 옥사설
1866년경 김정호가 사망한 것에 대해, 흥선대원군이 김정호와 그의 딸을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역사라는 주장도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는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고,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주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게다가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도 남아 있다. 또한 김정호와 교류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받은 기록이 없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 죽다)로 표현하고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 등으로 적시하지 않았다.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도 김정호가 투옥된 기록은 없다.
최근 연구에서는 신헌 등이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되어,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는 『대동여지도』의 목판이 남아 있으며, 『대동여지도』 제작을 후원한 최한기, 신헌도 처벌받지 않았다. 사서에 남아 있는 김정호에 관한 기록에도 처벌이나 옥사를 나타내는 문구는 없다. 한국의 역사학에서는 이를 조선총독부의 날조로 보고 있다.
4.3. 〈지구전후도〉 중간설
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5. 지도와 지리지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
--
--
--
--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종종 "조선의 이노우에 타다타카"라고 불린다.
6. 평가 및 영향
--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종종 "조선의 이노우에 다다타카"라고 불린다.
7. 기타
* 95016 김정호: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 고산자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으로,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